[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상권), 18장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김영희강의안)
18 장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
- 주께서 구약 선지자들이 기록한 것을 어떻게 성취하셨으며 실현하셨는가? 이것은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살며 박해를 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쓰고 있다. 주님의 변화산상의 변화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한 바 영광의 음성을 들은 일들을 말한다. 하지만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다. 구약 선지서로 돌아가 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것들이 입증된 것을 보라 그러면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강한 믿음의 보루를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하여 포괄적인 진술을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이 놀라운 인물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이다.
예언의 성취야말로 가장 놀랍고 주목할 만한 사실의 하나이다. 이것이 모두 정확히 성취되었다. 유대인들이 어째서 그분이 걸림이 되었는지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이다. 그들은 선지자의 글을 읽긴 했으나 편견 때문에 눈이 멀어 말씀을 보는 대신 그 말씀 위의 그들 나름의 첨가된 사상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선지서에서 가장 세밀한 항목에 이르기까지 기록된 예언을 본다. 그의 인물됨과 삶을, 행하시려한 일과 그 속에 내포된 가르침을 생각해 보라.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 구약성경으로부터 복음을 설교할 수 있다. 구약성경은 복음으로 가득차 있다.
예언은 선지서에서 뿐만 아니라 시편에서도 발견된다. 시편22편을 읽어 보라.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문자 그대로 정밀하게 서술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주께서 세우려하신 나라에 관한 놀라운 가르침과 함께 부활마저도 예언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방인들이 들어옴에 관한 예언과 오순절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사건의 명백한 기록도 발견된다.
우리 주님은 어떤 의미에서 율법과 선지자를 성취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무용지물로 만든다고 해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만 따로 인쇄해서 내어놓는 것을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 둘은 불가분리적으로 한데 뭉쳐있다.
-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어떻게 성취하셨는가? -
“기한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다”(갈4:4) 우리의 유한한 마음이 이 말씀의 참 뜻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주님은 율법 위에 무한히 높으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고 율법 아래 있게 되셨고 율법을 실현하셔야 했던 분으로 오셨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율법 아래 두셨을 때보다 그분의 거룩한 율법의 불가침성과 절대성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신 때는 없다. 우리 주께서는 율법을 얼마나 세밀히 지키셔야 했는지 보라. 주는 율법을 세밀한 항목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 그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쳐 사랑하게 하셨고 변함없이 율법을 확립하셨으며 율법의 절대 순종의 필요를 주장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탄생에서는 물론 그의 생애에서 그가 율법에 종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분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인가?
만일 율법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못하다면 십자가의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십자가에 대하여 말할 뿐 아니라 십자가의 교리를 선언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십자가에 대하서 감상적인 태도로 말하거나, 십자가를 일종의 도덕적 감화를 발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 속에 연민의 정을 일으키기 위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을 그저 일반적으로 시위하려는 것도 아니다. 십자가는 결국 율법의 관점에서만 최종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율법은 하나님에 대하여 죄를 범하고 그의 거룩한 율법을 깨뜨린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선언한다. 율법을 성취하는 방법은 죄의 형벌을 수행하는 방법이다. 이 형벌은 죽음이다. 그가 죽음으로 율법은 성취되어야 했다.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처럼 형벌이 죽음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죄를 처벌하심에서 하나님의 법은 완전무결하게 성취되었다.
주님은 가장 이상하고 놀라웁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죄로 인한 형벌을 자기 위에 지심으로써 구약성경의 모든 모형을 성취하신 것이다.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에 관한 기록들, 장막과 성전의 의식과 제단과 정결을 위한 놋대야에 관한 기록들을 읽어 보라.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진설병과 제사장과 각종 그릇들과 기타 이것들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것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침내 궁극적으로 행해져야 했던 것의 그림자, 모형, 예언 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 주님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리고 하늘에 자기를 바치심으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들 속에서 우리를 통하여서도 율법을 성취하신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4) 우리 주님이 이 지점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그는 율법의 의를 성취하셨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 그는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 속에 이것을 성취한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율법을 사랑할 마음과 이 사랑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율법에 굴복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되기를 원하며 이렇게 될 능력을 받았다. 즉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 새 언약 아래서는 율법이 우리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율법과 선지자의 위치는 어떤 것인가?
아직 성취되어야 할 율법이 남아 있다. 의식법은 이미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에서 의식법은 전부 성취되었다. 성전의 휘장은 이미 그가 죽으실 때 둘로 찢어졌고 성전과 그 성전에 속한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단이시요, 희생물이시요, 정결을 위한 놋대야요, 향이시요, 기타 모든 것임을 보지 못한다면 아직 레위기의 율법의식에 묶여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가 나의 번제물이시요, 나의 희생제물이시요, 나의 모든 것임을 보지 못한다면, 이 모든 의식법은 아직도 나에게 적용되는 셈이며, 내가 이것을 이행하지 않을 때는 내가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민법은 하나님의 신정국으로써 이스라엘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신정국이 아니다. 베드로는 벧전2:9-10절에서 새 나라는 곧 교회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민법 역시 성취된 것이다.
도덕법의 위치는 다르다. 도덕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항상 있어야 할 관계를 세우시고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가 우리 주님께서 첫째가는 큰 계명이라 말씀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이 두 계명은 옛 의식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도덕법은 예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랬던 대로 오늘에도 유효하며 세상 끝까지 우리가 완성될 때까지 유효할 것이다. 이 과정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장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죄는 여전히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우리의 위치이다.
미래는 이 세상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의 일점일획도 이와 같이 완전히 수행될 것이다. 율법을 깨뜨리는 자는 마침내 형벌을 받을 것이다. 주 예수 안에서 제공된 것을 수행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의 표현인 율법의 정죄를 달게 받을 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율법에 대한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율법이 행위언약이라는 의미에서 율법 아래 있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저주에서 구출 받았다. 이제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써의 율법 아래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것이 의의 규범으로써의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율법을 은혜와 반대되는 무엇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율법은 한때 율법의 언약이 있었다는 의미에서만 은혜와 반대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은혜 아래 있다. 율법은 결코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다할 수 없도록 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율법은 은혜가 가득하여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거짓된 율법관과 거짓된 은혜관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은혜란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여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며 그리스도가 의로왔던 것처럼 의롭게 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은사)을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기 때문이다. 은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그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지키기를 열망하게 된다.
이 두 가지를 분리시켜서는 결코 안 된다. 성결은 하나의 체험이 아니다. 율법을 사랑하며 이 율법을 지키도록 의욕하게 하는 새 마음과 성향을 가져야 하며, 주님은 그의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19)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하나님의 뜻은 십계명과 도덕법이다. 이 법은 폐하지 않았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 대속적 속죄론은 그가 율법을 완전히 수행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은 자기 몸을 율법에 완전무결하게, 능동적으로, 수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적극적으로 굴복시키셨다. 모든 예표는 그분 안에 성취되었다. 나머지 예언도 확실히 수행될 것이다. 이 영광스러운 구속사역의 결과는 죄인들에게 용서를 주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즉 율법을 즐거워하며,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며, 성결을 열망하며, 그리스도를 닮으며, 그와 같이 살기로 열망하는 사람들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