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윌리엄 에임스, `신학의 정수`, 40장 세례와 성찬
40 세례와 성찬
신약성경의 성례들은 세례와 성찬이다. 성례는 하나님이 제정했기 때문에 이들을 열심히 헌신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신자들에게 최대의 의무이다. 하지만 성례들은 구원에 필수적이 아니며 성례가 부재하거나 결여된다고 해서 구원이 박탈되는 것은 아니다. 성례들은 적법한 사역자들이 아닌 자들 혹은 교회 집회 밖에 있는 자들에 의해 집행되지 않아야 한다.
세례는 입교 혹은 중생의 성례이다. 세례가 은혜언약 전체를 모든 신자들에게 인치고 이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주지만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접붙임을 받는다는 것을 대표하고 확증한다, 롬6:3,5,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 우리는 -- 우리가 --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고전12:13, 우리가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우리는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에게로 처음 접붙임을 받았을 때, 칭의와 양자됨의 관계에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접붙이는 성례로서 세례는 죄의 용서를 대표한다, 마1:4. 그리고 우리가 세례에 의해 세례시 이름이 공포되는 성부, 성자, 성령에로 봉헌된다는 점에서 세례는 양자됨을 대표한다.
거룩성이 항상 우리가 접붙임을 받은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신자들에게 유래하므로 세례는 또한 성화의 세례이다. 딛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롬6:4-6.
그리고 영화가 진정한 거룩성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세례는 또한 영원한 영광의 인침이다, 딛3:7, 우리로--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그러한 유익들이 세례시 입교에 의해 인침을 받기 때문에, 세례는 오직 한 번만 시행되어야 한다. 자연적 생이 오직 출생에 의해 한번 일어나듯, 영적인 생도 중생에 의해 오직 한번만 일어난다.
신자들의 유아들에 대해 본 성례를 금지되어서는 안 된다. 첫째, 은혜 언약과 언약의 첫 번째 임침이 그들에게 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신자들이 속한 언약은 아브라함과 맺어진 언약인데(롬4:11,갈3:7-9), 이는 명백히 유아들에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이제 신자들에게 시행되는 언약은 그리스도 강림 이전의 언약보다 더욱 크고 더욱 완전한 위로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위로가 신자들에게만 관련되고 그들의 유아들에게는 연관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그들에 대한 위로는 그리스도 강림 이전보다 이후가 더욱 협소해지고 편협해지게 될 것이다. 넷째, 세례는 할례를 대체한다, 골2:11,12. 따라서 세례는 할례와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자녀들에게 속한다. 다섯째, 세례로 인치는 중생의 발단에서는 인간은 단지 수동적이다. 따라서 인간의 세례나 할례를 받을 때에는 다른 성례들과는 달리 어떠한 외적 행위도 필요하지 않고 단지 수동적으로 받는 것만 필요하다. 따라서 유아들은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주요한 유익에 관련되는 한, 본 성례에 참여할 수 있다.
신앙과 회심은 신자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을 구성할 수 없다. 따라서 신앙과 회개가 결여했다고 해서 오늘날 유아들에게 세례가 금지될 수는 없다. 이는 아브라함 당시 신앙과 회개가 결여되었다고 해서 유아들에게 할례가 금지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본 성례의 표징은 물인데, 물 그 자체가 아니라 침수하거나 살수함으로 부정한 것을 정결케 한다는 의미에서의 물이다. 물이 선택된 것은 물은 공동으로 사용되는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도의 피 혹은 죽음에 의해 수행된 영적인 씻음을 적합하게 나타내주고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도의 피흘림 혹은 적용을 적합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찬은 교회 내에서 가시적으로 양육 받고 성장할 수 있는 자에게만 시행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이는 성인들에게만 주어지고 유아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가장 온전하고 가장 완전한 양육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쳐지기 때문에, 양육에는 한 가지 표징이 아니라 이중적인 표징 즉 몸의 영양을 위해서 필요한 빵과 포도주가 사용되었다.
빵과 포도주가 사용되는 것은 그 이외에 어떤 것도 우리가 점진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매우 긴밀한 연합, 즉 그리스도의 몸의 제사와 그리스도의 피흘림에 기초한 연합을 적합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용도는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과 가장 밀접하다.
본 성례에서 화체설이나 공재설을 주장하는 것은 세례의 경우에서보다 더 맹신과 어리석은 미신에 가깝다. 본 성례에서 양육은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하거나 그리스도가 육신적으로 빵과 포도주에 임재하기를 요청하지 않는다. 오직 빵과 포도주가 그들이 적용되고 활용될 때 변화되며, 그리스도는 신앙으로 빵과 포도주를 받는 자들과 함께 영적으로 임재할 것이 요청된다.
제정의 말씀인 “이것은 내 몸이다”는 성경(하나님 자신이 보다 명확한 해석자다)의 다른 성례적 구절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창10:17,10,11,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