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상권 23장 죄를 억제함에 대하여 (김영희강의안)
23 장 죄를 억제함에 대하여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29-30)
주님은 죄의 성격을 다루어야 할 방법을 지시하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죄의 성격을 보고 그것을 미워하고 버리기를 바라신다.
- 본문의 말씀은 어떤 뜻인가?
우선 순수한 해석으로, 우리 주님은 깨끗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간음 행위를 범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다음과 같은 반론을 예측하셨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본질상 그렇게 구성되어 있어 우리의 기능은 불가피하게 죄로 유도한다. 우리는 오른 눈을 가지고 있고 오른 손을 가지고 있다. 내가 내 오른 눈과 오른 손을 가지고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면 내 눈과 손을 개량하고 깨끗케 하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들은 주께서 오른 눈과 오른 손만을 언급하시기 때문에 오른 눈을, 오른 손을 빼어 버리고 찍어 버려도 왼 눈과 왼 손이 있으므로 아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마음을 순수하게 가지려 한다면 두 눈과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찍어내야 함을 보여 주신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성결 개념을 신체적인 문제로 간주하려는 우리의 성결, 성화 개념을 조롱하고 계시는 것이다.
저는 이 해석을 전적으로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들이 정확히 해석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보다 나은 해석은, 우리 주님이 죄의 무서운 실제적 성격과 무서운 위험, 그리고 죄를 처리하고 제거해야 할 중요성을 가르치시려 하신 것이다. 주님은 귀중한 것들, 즉 눈과 손에 관해 말씀하시며 특별히 오른 눈과 오른 손을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결국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이다. “ 만일 너희가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이 어떤 의미에서 죄의 원인이 되고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라” 죄는 우리 삶에서 그처럼 중대하다. 주님은 성결의 중요성과 죄의 결과로써 우리가 직면하는 무서운 위험을 강조하시기 위해 이런 방법을 쓰셨다.
- 우리는 죄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우리 마음 속의 죄의 오염, 우리 속에 있는 이 세력, 타락의 결과로써 우리의 본성 속에 기생하는 이 세력들을 처리하는 문제가 된다. 단순히 소극적으로 처리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첫째 요점, ‘우리가 죄의 성격과 그 결과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결과 성화가 없는 주 원인은 죄에 대한 그릇된 견해 때문이며, 성화에 대한 거짓된 교훈 때문이다. 우리는 ‘죄’(Sin)관념을 ‘죄들’(sins)로부터 명백히 구별해야 한다. 죄를 행동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죄들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주님은 어째서 십자가로 죽음으로 향해야 했는가? 죄가 그 원인이다. 죄는 그런 식으로만 처리될 수 있는 존재이다. 죄는 하늘에서 마져도 문제가 된 것이다. 죄는 이처럼 심원한 문제이므로 문제를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죄는 그분으로 하여금 온갖 고뇌와 고통에 복종하게 한 존재이며,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한 존재이다. 이것이 죄이다. 죄는 행위만이 아니며, 그것은 생각이요 사악한 욕망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단순히 도덕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죄의 목록을 작성하고 분류하지 말라. 죄는 하나님의 아들의 관점에서 생각하며 죄가 그의 삶과 사역에서 무엇을 유발하였는가를 생각하라. 우리 속에 있는 오염의 정도가 이렇다. 성결로 향하는 지름길은 그분의 고뇌와 고통을 생각하는 길이다. 죄의 성격이 하나님의 복되신 아들의 죽음에서처럼 그렇게 무섭고 가공스런 색깔로 나타난 적이 없었다.
둘째 요점, ‘영혼과 그 운명의 중요성’이다.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두 번씩이나 강조하신 것을 보라. 우리 영혼이 너무 중요하므로 죄의 함정에 빠지는 원인이 된다면 그것을 뽑아 제거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우리와 그분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아무리 소중한 사람이거나 소중한 것이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해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미워하고 한 쪽으로 제쳐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영혼과 그 운명의 중요성이 이러하므로 모든 것을 이것에 집중시켜야 할 것을 주님은 보여주신다. 이것이 우리 삶의 전면에 중심에 있도록 해야 한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영혼의 영원한 운명 사이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영원을 위한 준비임을 깨닫지 못하는가? 이 세상의 중요성 때문에 이것의 가치를 조금도 떨어 뜨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충분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더 영원을 위하여 우리를 기다리는 영광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로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불구자가 되어야 한다.
영혼과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있다. 내생에서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 이생에서 불구가 되는 것이 더 좋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여러분과 그 영원한 운명을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놓으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16:26)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셋째 요점,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우리 속에 있는 그것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멸하기 위함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죄를 연구하고 죄의 작용을 이해해야 한다. 죄를 미워하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청교도들과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조롱을 받으며 죄의 전문가라고 불리게 되었다. 세상이 웃을 테면 웃게 하자. 하지만 이것이 성결하게 되는 길이다. 죄를 분석하자. 그렇게 하면 할수록 죄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넷째 요점,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이상적인 방법은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을 갖는 것이라’는 것이다. 정욕에서 해방된 마음이다. 그러므로 다시 팔복에 돌아오게 된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우리의 표준은 항상 적극적이요 긍정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성결은 어떤 일을 행하지 않는다거나, 어떤 일정한 기간 동안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랄한 시기와 질투와 증오와 악의를 알지 못하고 항상 사랑으로 가득찬 마음을 가지는 것이 우리의 포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표준이다. 청교도들이 항상 ‘우리 마음의 역병’이라고 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의 성결한 삶이 진척될 것이다. 우리가 정통이요, 저 자유주의자들이나 현대주의자들과 다르기 때문에 만족해 하며 이제는 우리의 위치만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함을 의미할 뿐이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다섯째 요점, ‘죄를 억제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내 버리라” 여러분이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진다면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이 쓴 ‘죄를 억제함에 대하여’를 읽기를 바란다. 이 용어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손을 찍어 내던져 버려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은 죄가 육체 속에 거하고 있다고 간주하는 견해이다. 이 거짓된 견해로 초기 기독교에서는 문자 그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독신주의가 성화와 성결에 절대 필요하다는 관념도 같은 카테고리에 속해 있다.
바른 견해는 바울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3:5)고 했다. 같은 원칙이 되고 있다.
첫째 원칙은 우리는 육신의 일을 길러서는 안 된다. 여러분에게 해가 될 것을 읽지 말라는 것이다. ‘네 눈을 빼어버리라’ 책들, 신문, 소설, T.V, 영화 이것들은 유혹의 근원이 되고 있다. 또 재치는 있으나 정욕을 유발하는 이야기와 농담을 피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영혼을 위한 것이라면 그들이 화내고자 한다면 내게 하라. 나는 내 지체를 죽여야 한다. 이것이 그 의미다.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정직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 점에 대해 병적인 고지식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병적인 고지식은 항상 그 자체에 그 상태의 성공에만 관심을 가지지만, 참된 성결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우리의 영적 맥박을 짚어보며 우리의 영적 체온을 재면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대신 그분을 위하여 그렇게 한다면 이 모든 것을 즉각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원칙은 우리는 육신을 용의주도하게 억제해야 하며 정욕의 온갖 충동과 악의 꾀임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깨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내 몸을 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셋째 원칙은 죄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를 다시 한번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육신의 행실을 죽이기 위한 싸움에서 이보다 더 자극적이고 고무적인 것이 없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수치와 죽음의 고통을 참으신 목적은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며, 모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며,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
- 위의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볼 때 우리에게 성령이 절대 필요함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일들을 실천해야 하지만, 성령께서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힘과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성령은 여러분 안에서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여러분에게 의욕을 일으켜 일하게 하신다. 우리가 이 육신의 일을 죽이는 과정을 출발한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실 것이다. 이것은 약속이다. 이 능력으로 ‘눈을 빼어 내버리며’ ‘손을 찍어 내버리며’ ‘육신를 죽이며’ 이렇게 해서 이 문제를 처리하게 될 것이다. 한편 주님은 우리 속에 계속 일하시며 우리가 점과 흠과 티와 주름 잡힘이 없이 그 앞에 서기까지 계속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