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스펄전 목회/목사론(2)
목회자의 자기 점검
장인이라면 누구나 연장을 가장 좋은 상태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연장이 무딘데도 잘 갈아 놓지 않으면 작업할 때 그만큼 더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연장에 날이 빠지면 힘이 많이 들거나 작품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장인은 잘 압니다.
사실 하나님은 형편없는 도구들로도 얼마든지 일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쓰지 않고 직접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목적에 합당한 수단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이 도구이므로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자신의 영과 혼과 몸이 거룩한 섬김을 위한 가장 직접적인 도구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능력과 내적인 생명이 싸움터의 도끼요 무기입니다.
맥체인 목사님은 독일어를 완벽하게 익히기 위해 여행을 떠난 한 친구 사역자에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자네가 독일어 공부를 열심히 하리라는 것은 잘 아네만 속사람을 잘 기르는 일도 소홀히 말게. 심령에 대해 말하는 거라네. 기병 장교가 칼을 얼마나 열심히 갈고닦는가? 얼룩 하나 없이 공들여 닦아 내지 않나? 자네는 하나님의 검, 그분의 도구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택함 받은 그릇은 그분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고 믿네. 대개 그릇이 얼마나 순결하고 온전한가에 따라 성공이 좌우될 것이네. 하나님은 재능 많은 그릇보다 예수님 형상을 닮은 그릇을 더 축복하신다네. 거룩한 사역자는 하나님 손에 들린 놀라운 무기라네.”
복음의 사역자가 개인적으로 영적인 문제가 있다면 자신에게나 사역에서나 아주 심각한 불행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불미스런 일이 얼마나 쉽게 일어납니까? 얼마나 조심해서 방지해야 할 일입니까?
언젠가 급행열차를 타고 가는데 멈춰 선 적이 있었습니다. 작은 나사 하나가 원인이었습니다. 나사 하나만 제대로 돼 있어도 열차는 철길을 따라 잘 달렸을 텐데 그 작은 쇳조각 하나가 없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열차 바퀴에 달린 기름통에 파리가 빠져서 차가 멈춘 일도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쓰임 받을 만한 사람이 작은 결점 때문에 장애에 부딪히거나 심지어 무용지물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결과가 복음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합니다. 물이 납으로 된 수도관을 통해 흘러가면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처럼, 복음도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 흘러가면 더럽혀진 나머지 결국 청중에게 해를 끼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칼빈주의 교리가 방탕함을 합리화하는 구실처럼 제시되거나, 알미니안주의가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회개할 수 있으니 전혀 긴박한 것이 아니라고 믿게 한다면, 영혼에 심각한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설교자가 은혜가 부족하면 사역의 지속적인 열매도 거의 없고 기대하는 만큼에 전혀 못 미치게 됩니다. 재능에 붙는 이자는 보잘 것 없습니다(재능만 믿고 사역하면 성과가 미미하다는 뜻).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전쟁(남북전쟁)에서 두세 전투가 패한 원인이 “싸구려” 군수품 업자들이 납품한 질 나쁜 화약 때문에 당연히 발사돼야 할 포탄이 불발탄이 돼 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 참된 생명력이 아예 없거나 하나님께 계속 은혜를 받을 만큼 못 되어, 초점을 벗어나고 목표와 방향을 잃고 시간을 낭비할 수도 있습니다. “싸구려” 설교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 목회자는 가장 먼저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인지를 검토해야 합니다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복음에 참예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지만 동시에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먼저 네 자신부터 단정히 하고 네 형제를 치장하라”고 랍비들은 말합니다. “더러운 손으로 남을 깨끗하게 하려 하지 말라”고 그레고리우스는 말합니다. 당신이 맛을 잃은 소금이라면 어떻게 남들에게 맛을 낼 수 있겠습니까?
회심은 사역자에게는 필수조건입니다. 강단에 서기를 열망하는 여러분은 반드시 “거듭나야”(요3:7) 합니다. 참으로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1:10)는 말씀은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은 가짜로 가득하고 주검 주위에 독수리 떼가 모이듯 육신적인 허영으로 가득한 뚜쟁이들이 목회자 주위에 몰려듭니다. 우리는 결코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받지 않도록(고전9:27) 진지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은 회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여기 계신 분 각자 자신의 내밀한 영혼에 조용히 자문해 보십시오. 회심하지도 않고 사역한다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마치 두더지가 독수리 새끼를 가르친다고 떠벌리고, 우렁이가 천사를 다스리겠다고 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강단은 그런 사람이 서기에는 두려운 자리입니다. 그러나 부적합하다고 해서 그런 사람이 사역을 맡지 못하게 막을 방법도 없습니다. 자기 고집대로 사역을 하겠다고 나서면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우선적인 가장 단순한 자격을 얻기까지 목회 직분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회심하지 않고 사역하는 것은 또다른 면에서도 끔찍한 일입니다. 소명 받은 일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면 당사자에게도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자신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매일 사람들에게 그분께 나오라고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오 여러분, 이것은 분명 끝없는 고역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여행객을 인도하고 아무 지형도 모르는 해안을 따라 배를 몰아야 하니 말입니다. 자신은 바보면서 남들을 가르쳐야 하니 말입니다.
사막의 순례자들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일 때 마침 간절히 기다렸던 우물을 발견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물 한 방울 안 남아 있다면 얼마나 허탈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목마른 영혼이 은혜 없는 목회자를 만난다면 생명수를 찾지 못해 죽을 지경일 것입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강단을 메우느니 차라리 강단을 없애는 것이 낫습니다.
안타깝게도 거듭나지 못한 목회자는 심각한 해를 끼치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경건의 균형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므로 조만간 도덕적인 죄를 범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됩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고 복음을 욕보입니까! 그런 사람에게 어떤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사후에는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리처드 백스터는 「참된 목자」라는 책에서 다른 많은 진지한 문제를 다루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대가 남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정작 자신에게는 없거나, 그대가 전하는 복음의 실제적인 역사하심을 자신은 맛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 세상에 구세주가 필요하다고 선포하면서, 마음으로는 주님을 소홀히 하거나 주님과 그분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라. 남들에게는 멸망하지 않게 주의하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이 멸망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이가 남들에게 고통의 자리에 가지 말라고 경고하고서도 자신은 그리로 급히 내려갔다. 많은 설교자가 회중에게 지옥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조심하고 열심을 내라고 수백 번 촉구하고서 자신은 지금 지옥에 있다. 남들에게 구원을 전하면서도 자신은 구원을 거부하고, 남들에게 전하는 진리를 자신은 소홀히 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하실 거라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2. 목회자는 일반 성도보다 뛰어나게 경건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중대한 말을 명심하십시오.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참된 신앙이라는 이 급선무가 해결되면, 그 다음으로 목회자에게 중요한 것은 탁월한 경건함입니다. 일반 성도들과 같은 수준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성숙하고 장성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생명력 있는 경건의 맥박이 힘차게 규칙적으로 뛰어야 합니다.
이집트인들은 가장 박식한 현인 중에서 제사장을 뽑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제사장을 너무 우러러 본 나머지 왕도 그들 중에서 뽑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모든 성도 중에서도 가장 사려 깊게 가려 뽑아야 합니다. 교회가 말만 거창한 풋내기에게나, 열심만 있고 경험 없는 자에게 우리의 믿음을 변론하도록 내보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영혼을 성숙시켜야 합니다. 아니면 능력이 하늘에서 임할 때까지 기다리게 하는 편이 좋습니다.
최고의 도덕성을 꾸준히 유지해야 합니다. 중대한 죄를 저지른 자가 강단으로 다시 복귀하는 것에 대해서는 극히 회의적입니다. 존 에인절 제임스가 말했듯이 “의의 설교자가 죄인의 길에 섰을 때는 그가 회개한 사실이 지은 죄만큼 널리 알려질 때까지는 회중 앞에서 다시 입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암몬 자손들에게 수염을 깎인 자는 여리고에서 수염이 자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삼하10:5). 안타까운 일이지만 신망이라는 수염이 한번 깎이면 다시 자라기 어렵습니다. 부도덕성이 한번 알려지면 대개 아무리 깊이 회개해도 당사자에게는 목회의 은사가 없다는 결정적 증거가 됩니다. 함량 미달인 사람을 강단에 다시 세우는 것은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목회 사역으로 부르실 때 우리도 직분에 걸맞은 강한 힘을 키울 수 있도록 은혜를 얻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끌려 다니면서 교회에 해를 끼치고 자신도 멸망하는 풋내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하고 남들에게 기대하지 못할 혁혁한 무공을 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사욕을 좇지 않고 오래 참는 것을 매일의 미덕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런 일에 합당한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 자신이 소명 받았음을 입증하려면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회자로서 여러분의 일생, 특히 여러분의 목회 생활은 여러분의 경건함의 정도에 크게 영향받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열심이 무뎌지면, 강단에서 점점 기도하지 않게 되고, 서재에 있을 때도 더더욱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메마르면 회중은 왠지 여러분의 공적인 기도가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아마 여러분 스스로 느끼기도 전에 회중이 먼저 여러분의 메마름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에는 설교 속에서 여러분의 영적인 침체가 드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단어를 잘 고르고 미리 설교문을 깔끔하게 다듬어도 영적인 힘이 눈에 띄게 사라질 것입니다. 삼손이 그랬듯이 여느 때처럼 아무리 용을 써도 큰 능력이 떠나 버렸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침체의 결과로 회중 모두 많건 적건 침체를 겪게 됩니다. 그 중에서 강한 성도는 침체되는 경향을 극복하겠지만, 약한 성도는 심각한 해를 입을 것입니다.
목회자와 회중과의 관계는 마치 손목시계와 공공건물에 걸린 시계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손목시계가 잘못되면 자신 외에는 시간을 착각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 왕실 근위대나 그리니치 천문대의 시계가 잘못되면 많은 사람이 시간을 착각할 것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시계와 같아서 많은 이가 그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목회자가 바르지 못하면 그들 모두 크든 작든 잘못된 길에 빠집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경건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스터는 말합니다.
자신을 잘 살피라. 사탄이 당신을 제일 먼저 가장 맹렬히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사탄을 대적하는 지도자라면 하나님이 사탄을 억누르지 않는 이상 사탄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사탄은 오래도록 ‘목자를 쳐서 양 떼를 흩어 버리는’ 전술을 써서 큰 재미를 봤기 때문에 그러니 형제여, 조심하라. 대적이 그대를 특별히 눈여겨보고 있다.
3.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개인적인 성품이 자신의 사역과 모든 면에서 일치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설교는 잘 하는데 품행은 엉망이어서 강단에만 오르면 다들 내려오지 말라고 했고, 강단만 내려오면 다들 다시 강단에 서지 말라고 했다는 어떤 이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가 그런 야누스 같은 모습을 닮지 않게 해 주시길 원합니다. 우리가 제단에서는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장막 문 밖에서는 벨리알의 자식들이 되는 일이 절대 없기를 원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바실리우스에게 했던 말처럼 “가르칠 때는 우레를 발하며, 교제할 때는 빛을 발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는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도 말과 행동이 서로 모순 되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말보다 행동이 분명하다”는 속담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삶은 가장 탁월한 말씀 사역조차도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성품이 우리의 말보다 더 설득력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눅24:19)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점에서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가르치는 말과 본이 되는 일에 둘 다 능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성결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면서 동시에 가장 값진 장신구입니다. 단지 도덕적으로 훌륭한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더 고상한 미덕이 있어야 합니다. 성품에 모순 됨이 없어야 하고 그 위에 거룩하게 구별된 기름 부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사람에게 향기를 발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삶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도리어 그리스도와 멀어지게 한다면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목회자의 거룩은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는 큰 음성입니다. 거기에 거룩한 기쁨이 더해지면, 그것은 놀라운 흡인력을 가집니다. 디디무스(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향내 나는 비둘기는 온 새 떼를 유혹한다. 너의 삶이 탁월하고 너의 덕이 귀한 향유와 같다면 성도들이 그 향기를 좇아 몰려올 것이다. 그러나 너는 “많은 사람 중에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처럼 탁월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과 닮아 있으면 사람들도 너를 닮으려고 애쓸 것이다.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할 일을 하라.” 이것이 네 삶의 좌우명이다. 남들도 다 하는 일만 하는 것은 노예근성이지 자녀의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영적인 아비가 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어두운 등불은 한 면으로는 조금 밝아도 길을 환히 밝혀 주지는 못한다. 그 불빛으로 많은 무리를 이끌거나 따르게 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또다른 존경할 만한 신학자(레이놀즈 주교)는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말했습니다.
동방 박사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별(마2:9),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불기둥(출13:21)은 단지 빛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앞서 갔다. 손은 에서인데 목소리만 야곱이면 무슨 소용인가? 율법에 따르면 흠 있는 자는 여호와께 제사드릴 수 없다(레21:17-21). 하나님은 이 구절로 목회자가 어떤 자격을 갖춰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제사장은 의복에 방울과 석류를 달아야 했다. 방울은 건전한 교리, 석류는 열매 맺는 삶을 상징한다(출28:33-34). 목회자의 악한 삶은 자신의 가르침을 욕되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로는 선포하면서도 행실로는 욕보인다.” 가르침으로는 세우면서 삶으로는 무너뜨리는 것이다.
목회자는 사소한 일에 있어서도 삶과 사역이 일치하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자기가 내뱉은 말을 꼭 지켜야 합니다. 진리는 우리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빛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신중한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은 성품의 세세한 측면까지 주의를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사소한 빚, 시간 안 지키기, 험담하기, 별명 부르기, 작은 말다툼 등 향유에 빠진 파리 같은 작은 악습들을 피하십시오. 많은 이의 신망을 잃게 하는 방종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거친 행동이나 눈에 거슬리는 사치도 멀리해야 합니다. 사소한 문제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습니다. “사역이 비난받지 않도록 실족하게 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결코 거칠고, 저속하고, 예의 없고, 상스러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죄에 가까운 천박한 태도는 어떤 것이든 독사를 피하듯 피해야 합니다.
기분 전환을 할 때조차도, 여러분은 목회자임을 기억하십시오. 그에 걸맞게 처신하십시오. 작은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법인데 하물며 도덕성, 정직, 성실 같은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얼마나 조심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문제에서 목회자가 실족하면 안 됩니다. 개인적인 생활도 사역과 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 목회할 날이 저물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목회직을 계속하면 하나님의 뜻을 욕되게 하고 자신을 파멸시킬 뿐이므로 빨리 은퇴할수록 좋습니다.
많은 이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온 하늘과 땅과 지옥에 우리를 쳐다보는 눈들이 가득하다 해도 아무 신경 쓸 일이 없을 만큼 그렇게 행동합시다. 우리가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우리의 공적인 위치는 큰 득이 됩니다.
-스펄전의 목사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