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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상권), 29장 원수를 사랑하라 (김영희강의안)

강대식 2018. 1. 18. 22:16

29 장    원수를 사랑하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3-48)

 

이 대목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한 하나님의 율법의 왜곡과 대조해서 설명하고 드러내신 마지막 실례이다. 흠정역(A.V)에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여 너희에게 악행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로 되어 있으나 개정 개혁에는 단순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로 되어 있다. 교리상의 어떤 중요한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여기에 기록된 것과 동일한 가르침을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므로 흠정역에 기록된 가르침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 - 네 아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이것은 구약성경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 이웃은 이스라엘만을 의미했다. 다른 모든 사람은 원수로 여기라고 가르쳤고 미워하는 것이 그들의 권리요 의무라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을 모두 개로 여겼고 많은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멸시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원수를 미워하라고 할 가능성이 있는 진술들은 있다.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 사람들을 멸절시키라는 명령을 들었다. 살해당한 사람의 친척은 살해자가 도피성에 들어가기 전에 그 살해자를 죽일 허락을 받았다. 시편 69편에서 시편기자는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라고 했다. 이 문제의 해답은 이 시편을 포함하여 이 모든 명령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사법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로 하여금 이것을 쓰게 한 것은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그의 열심 때문이었다.

 

만일 여러분이 이 모든 저주가 항상 그 성격상 사법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는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23장에서 주님께서는 바리새 지도자들에게 화를 선언하시고 계신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권면과 바리새인에게 선언하신 이 화를 어떻게 조화시키겠는가?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이 말씀을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의 교훈을 부정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가인을 벌하셨고, 옛 세상을 홍수로 벌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완강하게 반항할 때 벌하셨다. 예수께서 친히 가르치신 신약성경의 교훈은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을 가르치고 있다. 최종적으로 회개치 않은 사람은 모두 지옥 불에,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지옥에 가게 되어 있다. 만일 여러분이 이 사법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가르침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모순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견해인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사법적 요소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지만 동시에 주님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마침내 멸망하리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모순은 없다. 모압족과 아모리족, 미디안족은 하나님의 일을 고의로 배척했으므로 하나님은 영원하신 재판장으로서 심판하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것을 원수를 미워하고 그들에게 거슬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미워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말씀으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의 원칙을 고의로 깨뜨린 것이다.

 

2. 주님의 가르침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에게 악행하는 자들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38-42절에서와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앞장의 입장은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클라이막스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여기서 훨씬 더 나아가신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을 듣는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이웃에는 필연코 우리의 원수들까지도 포함되어야 함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이 문제에 직면하는 최선의 방법은 원칙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로 온전하라 이 가르침은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중 가장 고양한 가르침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문제와 어려움을 직면할 때,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듯 처신해야 하며, 하나님을 닮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신 대로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우리는 그들의 신분에 따라 대하거나 그들이 우리에게 행하는 바에 따라 좌우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사심없는 사랑으로 행하신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마음을 자극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한 비이기적인 사랑이었다. 주님에 의하면 우리 모두 이런 사랑을 가져야 하며 다른 사란들에게 이런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을 사는 비결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초연해야 하며 더 중요한 것은 자기로부터 초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로부터 초연하기까지 다른 사람들이 그의 자아에 대하여 행하는 것에서 그가 결코 초연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악한 세상에서 벗어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초연한 위치에 있으며 보다 높은 수준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나라에 속해 있다. 그는 새 사람, 새 피조물, 새 창조물이다. 이 때문에 그는 만사를 다르게 보며 다른 모양으로 반응한다.

 

여러분의 삶에서 어느 하루의 일을 회상해 보라. 생각과 행동과 처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지배를 받고 있는가?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 속에 떠오르는 잔인한 생각들을 생각해 보라. 이것이 우리의 삶을 그토록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조종하고 있다. 주님은 결국 너희는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너희의 사랑은 너희가 사람들의 말에 지배와 통제를 더 이상 받지 않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 속에 있는 새 원칙, 곧 사랑의 새 원칙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이 원칙을 소유하는 순간 우리는 사람들을 전과 다르게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세상을 보시고 온갖 죄를 보시지만 해를 비취시며 비를 보내신다. 우리도 이렇게 하는 법을 이제 배워야 한다. 그들은 이 세상의 신의 지배를 받으며 무기력한 희생물이다. 우리는 괴로워 해서는 안 되며, 그들을 구할 수 있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시는 것을 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여러분이 사람들의 마음에 든다면 그들도 여러분의 마음에 들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행동은 그들을 친구로 만드는 것에 목표를 두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그들을 그들의 상태 그대로 간주하며 대하시지 않고 그들이 앞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의 관점에서 대하신다라고들 한다. 이것은 현대 심리학의 견해이다. 그들을 벌하지 말고 그저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그들을 구할 수 있다거나 그들을 무언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가?

첫째, 너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신랄한 말을 친절한 말로 응답하는 것이다.

둘째, “너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행을 베풀라 악의로운 행동에 대하여 호의의 행동으로 반응하라.

셋째, 너희에게 악행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기까지 그들이 무서운 파멸로 향해 가고 있음을 보게 되기까지 생각을 계속하며, 마침내 그들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게 되기까지 되어야 한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너무 관심을 가지신 나머지 자기를 생각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이렇게 대우해야 한다.

 

이것의 의미와 관계를 분명히 할 수 있기 위하여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과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주님은 네 원수를 좋아하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좋아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보다 타고난 천성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좋아하는 것이 아니요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하기는 하되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고 묻는다. 저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사랑은 느낌이나 감정 이상의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사랑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이다. 사랑은 능동적인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유대인이 강도의 공격을 받았을 때, 유대인은 도와 주지 않았지만 전통적으로 원수였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도와주고 모든 조처를 해주었다. 이것이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죄나 기타 다른 것 때문에 곤란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웃이다. 우리는 그를 도와야 한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행하셨다.

동시에 이것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실천이 되었다. 산상설교는 지근의 우리를 위한 것이다. 바울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하였다. 스테반을 보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역대의 성도들도 이와 같은 사랑을 보여주었다.

 

이 가르침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다. 사랑과 평화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가 이렇게 되지 못한다면 높고 크신 우리 주님께 큰 욕을 돌리게 된다. 여러분이 이런 유의 삶을 완전히 살지 못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지 말라. 우리는 모두 실패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위로를 받고 나서 이것을 이용하지 말며, 여러분이 주님을 닮지 못함으로 인해 더욱 아픔을 느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모두 이렇게 사랑했다면 부흥은 즉각 임했을 것이고, 온 세상은 어떤 일이 일어났겠는가!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 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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