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제임스 페커, `청교도 사상`, 3장, 부흥운동으로서의 청교도주의 (강의안)

강대식 2018. 1. 18. 22:23

3장  부흥운동으로서의 청교도주의

 

1. 청교도 운동의 정의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시대가 허용했던 것보다 더 발전된 영국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추구한 운동이라고 정의한다. 이 운동은 일세기 이상 동안 계속 뭉쳐 이어진 성직자-평신도 운동이었다. 그들은 특성에 있어 성경주의자이며 칼빈주의자였다. 참되고 진정한 신약성경 형태의 교회 생활을 실현시키고자 하였고, 공유하는 문헌이 있었다.

 

나는 부흥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통해 성령으로 영적 사망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생명의 믿음을 전달하시고 활기없이 잠들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내적인 삶을 다시 새롭게 하시는 역사라고 정의한다. 하나님께서는 부흥 가운데 엣것들을 새롭게 하시고, 율법과 복음에 새로운 능력을 부여하시고, 마음과 양심이 눈멀고 딱딱하고 차가운 자들에게 새로운 영적 각성을 주신다.

 

따라서 부흥은 교회들과 그리스도인 집단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사회에 신령하고 도덕적인 영향을 끼치게 한다. 사도행전 처음 몇 장과 신약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연결시켜 볼 때 부흥의 표적들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외감과 복음의 진리를 들 수 있다. 곧 죄에 대한 깊은 각성은 깊은 회개로 이어져,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결과가 된다.

 

다음에 영의 강력한 언어의 자유로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을 억제할 수 없이 증거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편에서 은혜의 역사를 강화하고 급속하게 진행시키심으로 사람들은 말씀에 의해 거꾸러지고, 성령에 의해 변화를 받게 된다. 사도행전을 모범으로 따른다면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자신의 권능을 나타내시고 자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자신의 나라를 넓히시고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는 본질적으로 집합적인 현상이다.

 

2. 청교도의 개혁

 

나는 청교도주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교도의 역사가 부흥의 역사로 이야기되는 날을 기다려야 한다고 감히 말한다. 그 날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 청교도의 전도와 교육과 경건과 목회 사역과 영적 경험에 대한 분석이 시작되었으나 아직 갈 길이 멀고 이 자료에 대한 신학적 평가는 유아 상태에 있다. 나의 논증에 대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제시한다.

 

첫째, ‘영적 부흥은 청교도들이 추구하고 있다고 공헌한 바의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청교도는 부흥이라는 말을 그들이 추구하는 바를 나타내는 전문적 술어로 사용하지 않고, ‘개혁이라는 어휘로 자신들의 목적을 표현하였다. 박스터의 <개혁된 목사>는 활력과 열심과 목적에 있어서 갱신되었다는 의미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목회를 개혁하셔서 그들이 자신들의 의무들을 열심히 그리고 신실하게 행하게 하신다면 분명히 이 백성은 개혁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일관되게 교회의 개혁을 교리와 질서와 같은 외적인 문제들로만 이해하고 심령과 생활의 내적인 갱신에 대해서는 상관을 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교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던 개혁목표의 영적 차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무엇보다도 교회가 영적으로 흥하는 것을 보기 원했다. 그리고 그들은 갱신된 목회자 없이는 이 소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복음적인 자격을 갖춘 목회자에 대한 관심이 청교도의 우선권 목록 중에 언제나 최우위였다.

 

청교도에게는 죄인들의 구원이라는 말은 단지 그들의 회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제 가운데 영적 건강과 힘과 헌신적 순종으로 성장-간단히 말해서 거룩’(청교도는 이 위대한 말을 경건한 삶의 모든 국면과 범위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했다)까지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한 성직자에 대한 청교도의 세 가지 칭찬 능력있고(powerful)’ ‘수고하고(painful)’ ‘유용한(useful)' 목회가 없다면 영국 백성 가운데 거룩은 절대로 현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청교도 성직자가 일 세기 이상 동안 설교와 목회에 자신을 바친 이유였다. 그들의 추구한 대의는 개조라기보다는 부흥이었다.

 

청교도 경건 문헌의 중심 주제는 개인의 부흥이었다’. 존 다우네임, ‘그들은 설교와 문헌에서 이론과 적용에보다는 경험과 실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판단의 정보를 주고 지식을 증가시키기 보다는 주로 심령의 성화에 더 이바지하였다. 또한 경건한 생활의 의무들 가운데 실행을 분발시키고 새로운 순종 가운데 믿음의 열매를 맺는 데 이바지하였다’.

 

청교도 서적들의 범주로는 다음과 같은 서적들이 포함된다.

1) 복음 서적들

이 서적들은 죄와 유혹, 회개와 믿음, 회심과 중생을 다루는 것이다. 청교도 신학은 중생이라는 주제에 대한 집중으로 중생의 신학이라고 칭해져 왔다. 존 로저스의 <믿음의 교리>, 퍼킨스의 <회개의 본질과 실제에 대한 논문>, 리차드 십스의 <상한 갈대>, 윌리암 와틀리의 <새로운 탄생>, 존 플라벨의 <은혜의 방법>, 일년에 2만부가 팔린 박스터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비회심자에게 돌아와 생명을 얻으라는 부르심>, 한 세대 내에서 7만부가 배포된 조셉 알레인의 <비회심자에 대한 경고>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율법에 의한 예비 작업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2) 결의론적인 서적들

이 서적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정해진 행위 기준들을 낱낱이 기술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양심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청교도의 결의론은 매일매일의 생활에 있어서 평범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었다. 결혼과 가정, 생업, 신비, 재물의 사용, 진리의 청지기 직분 등을 다룬다. 박스터의 대작 <훈령집>이 대표적이다.

 

3) 공생적 서적들

이 서적들은 위로하기’, 즉 강건하게 하고 격려를 주기 위해서와 그리스도인에게 승리의 보장에 근거한 즐거운 순종을 위한 동기와 자원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이 범주로는 복음의 여러 주제들-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공로,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 그리고은혜의 언약 가운데 삼위일체의 세 인격에 의해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 을 설명하는 무수한 책들이 분류된다. 이 풍성한 내용들은 아무리 오래 되었고 난해할지라도 아직까지도 필적할 만한 책들이 없다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전체로서의 청교도 경건 문헌은 비범하게 동질성을 나타내며 그 목적은 일관되고 있다. 그 목적은 성도들에게 소명된 순례와 전투와 선행의 생활 가운데 믿음과 회개와 확신과 기쁨의 열심을 유발하는 것이다. 개인적 부흥이라고 칭하는 것을 매우 적절한 영적 상태로 창출하고 유지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성직자를 주님의 가족을 가르치고 먹이고 부양하며, 널리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양들을 찾는 주님의 사자와 파수꾼과 청지기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목회자의 선구자인 리차드 그린햄은 1570년에서 1590년까지 캠브리지 부근에서 사역하였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자신의 양떼가 일터로 흩어지기 전에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월, , , 금요일에 새벽 설교를 했다. 주일에 두 번 설교를 했고, 매주일 저녁과 목요일 아침에 교구의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하였다. 그는 아침에는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병자들을 심방하거나, 또는 쟁기를 잡고 일하는 이웃들과 협의하기 위해 밭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너무 열렬했고 비상한 노역을 하였으므로 모든 그의 와이셔츠는 물에 흠뻑 담근 것같이 땀으로 젖곤 했다. 그는 강단에서 내려오자 마자 다시 올라갈 정도로 과로를 했다.

 

그는 보기 드문 목회 상담자였다. 그는 괴로워하는 양심들을 위로하고 안도하게 해주는 큰 경험과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원근 도처에서 영적 고통과 유혹들로 번민하는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이 신령한 의사의 명성은 널리 퍼져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부름을 받았다. 주님께서 그의 수고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뻐하셨으므로 그의 지식과 경험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위로의 회복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경건함과 통찰력과, 복음적인 메시지와 근면한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회는 사실상 열매가 없었다. 그는 그의 후임자에게 나는 한 가정 외에는 아무에게도 나의 목회로 이루어진 유익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린햄은 푸른 초장을 갖고 있었으나 양떼는 야위어 있었다.’

 

리차드 페어클로프는 1647년에서 1662년까지 한 촌락에서 목회했다. 그의 친구인 존 하우가 그의 장례식 설교에서, ‘그에게는 항상 많은 성도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병든 사람들을 심방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의 책임 안에 있는 모든 가정들을 위해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개인적으로 그리고 따로따로 대화를 나눔으로 그들 영혼의 현재 상태를 알기 위해 노력하였고 게다가 또 교훈과 책망과 권고와 훈육과 격려 가운데 자신을 적절하게 그들에게 사용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힘들어하지 않고 즐겁게 그리고 철저하게 행했다. 그의 마음 전체는 자신의 일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은 해 동안 매일 그는 새벽 세 시에, 또는 더 일찍 일어나 다른 사람이 잠들어 있을 때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이것은 그가 진실로 기뻐하는 일이었다)’

 

이 생활 방식은 그린햄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였으나 이제 추수기가 이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리차드 박스터의 사역이다. 그는 1641년부터 1660년까지 키더민스터에서 사역하였다. 키더민스터는 성인 2천명 정도의 촌락인데 그들 대부분이 그의 목회에 의해 회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들을 대부분 무지하고 교양없고 술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로-- 그들은 생명있는 진실한 설교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목회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내가 그곳에 처음에 왔을 때에는 한 거리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정은 한 가정이었으나 내가 그곳을 떠날 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가정은 여러 거리에 몇 가정밖에 안되었다. 내가 개인 면담과 그들을 교리문답하는 일을 시작했을 때 마을 전체에서 오기를 거절한 가족은 매우 적었다(박스터는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지 않거나 표면상으로 경건한 삶에 대해 진지한 약속을 하지 않고 나와 헤어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 박스터가 말하는 바는 <개혁된 목사>에서 그가 묘사하고 추천하는 실행이며 또한 우리가 하우이에게서 들었고 페어클로프도 따랐던 실행으로, 곧 개인적인 영적 교제를 위해 조직적으로 가족들을 면담하는 것이다. 박스터는 한 주에 이틀을 할애하여 매일 7,8가정 비율로 이런 방법으로 가족들과 만나 매년 교구의 8백 가정들과 모두 관계를 가졌다. ‘나는 먼저 그들이 교리문답의 내용을 암송하는 것을 듣는다(그가 사용한 교리문답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었다)’. 그 다음에는 그 의미에 대해 구두시험을 보고, 마지막으로는 가능한 한 모든 마음을 끌 수 있는 이유와 열심을 가지고 책임있는 사랑과 실천을 그들에게 강권한다. 나는 한 가족에 약 한 시간을 사용했다.

 

그 실행의 가치에 대한 그의 간증은 강조적이다. ‘나는 우리가 지금까지 흑암의 왕국을 분쇄하는 가장 바른 진로를 전혀 택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한 나의 모든 공적 설교보다 더 뚜렷한 성공의 표적들을 알고 있다.’ ‘진실한 경건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겸손한 정신과 태도의 소유자들이었다.’ 이제 공백 기간이 지나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추수 때가 온 것이었다. 나의 마지막 논평은 이것이 바로 부흥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과거에 목회자들이 중요한 역할들과 거룩한 삶을 담당하며 영혼들의 유익을 목타게 구했고, 완전히 자신을 헌신하고 자신들의 시간과 힘과 재산을 바치며 고통이나 희생을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곳에 많은 사람들이 진실한 경건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 연구에 있어 나의 과제를 청교도주의가 부흥운동이었다는 주장을 확실하게 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휘필드는 1767년에 썼다. ‘지난 30여년 동안 나는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보다 참되고 살아 있는 신앙이 부흥하면 할수록 더 많은 훌륭한 과거의 청교도 저술들이 요구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620년대에 앤트림에서 있었던 부흥만큼 극적인 사건은 청교도의 영국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에 열광적인 제임스 글랜디닝은 복음을 설교하는 법도 알지 못하고 율법을 설교하여 로버트 블래어와 그 밖의 사람들이 그를 대신하여 설교를 했는데 로버트 플래밍은 이 일을 복음의 밝고 뜨거운 태양의 명멸이라고 칭했다. 또한 청교도의 영국에는 1631년 월요일 커크 오 쇼츠에 있었던 일같이 압도적인 사건도 없었다. 그때에 수줍은 존 리빙스턴은 그 전에나 그 후에 두 번 다시 설교를 하지 않았는데 한 시간 반 동안이나 설교를 했고 그 설교 후에 500명이 그의 설교에 수반된 능력에 의해 회심을 했다거나 또는 자신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변화했다고 간증했다. 1620년대 언제쯤인가 유명한 존 로저스가 청중들에게 성경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질타했던 잊을 수 없는 날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입장으로 말했다. “그래, 나는 너희에게 오랫동안 나의 성경을 맡겼다. 그런데 그 성경이 아무아무 집들에서 먼지와 거미줄에 완전히 덮혀 있다. 너희는 성경을 듣는 것에 관심이 없다. 너희가 내 성경을 그렇게 사용하느냐? 좋다. 너는 내 성경을 더 이상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의자에서 성경을 집어들고 마치 그것을 그들에게서 가져가 버리는 것같이 보이게 했다. 그러나 곧 그는 역을 바꿔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역할을 취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극히 진지하게 소리지르며 간청했다. “주여,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셔도 좋지만 당신의 성경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지 마소서, 우리 자녀를 죽이시고 우리 집을 불태우시고 우리 재산을 멸하소서. 그러나 우리에게서 당신의 성경만은 남겨두시고 당신의 성경은 가져가지 마소서.” 그 다음에 그는 다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역할을 취했다. “너희가 그렇게 말하느냐? 좋다. 잠시 동안만 너희를 시험해 보도록 하겠다. . 너희를 위한 성경이 여기 있다. 나는 너희가 어떻게 그것을 사용하는지 볼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더 말하고 더 실행하고 더욱 그에 따라 사는지 볼 것이다.

 

이 말은 그곳에 있었던 토마스 굿윈이 존 하우에게 이야기해 준 것이다. 그는 교회에 가득한 사람들이 눈물에 젖었고 굿윈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며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는 밖으로 나갔을 때 말에 올라탈 힘이 없어 15분 동안 말 목에 매달려 있었다. 그처럼 비범한 영감이 그에게 임했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대체적으로 임하여 성경에 대한 태만을 고치도록 충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청교도의 부흥은 비교적 조용하고 질서적인 역사였던 것 같다. 예외가 있다면 부흥이 절정에 달했던 1640년대와 1650년동안 지나치게 끓어올랐던 광신을 들 수 있다.

 

3. 청교도의 부흥

 

청교도 신학과 예배는 발전함에 따라 더욱 부흥의 산출물과 부산물로서의 그 특성을 나타냈다. 청교도 목회 기록에 대한 자세한 탐구는 부흥 운동에 신선한 빛을 던져 줄 것이다. 엘카나 웨일스는 그 자신의 사람들보다는 낯선 사람들과 이따금씩 설교를 듣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더 많은 회심자를 얻었으며 전국에서 영혼을 회심시키는 데 가장 성공한 설교자로 간주되었다.

 

헨리 오스랜드는 이곳 저곳을 말타고 다니면서 열정적으로 설교하여 많은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했다.” 또한 어린이 복음 전도자인 토마스 라이는 목회를 마친 후 40년 이상 동안 어린이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뛰어난 재주로 기억되었다. 이들 외에도 수백명의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은 부흥기에 활동한 부흥의 목회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내력은 우리를 청교도 운동의 바로 중심에 데려다 줄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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