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1 서론, 자연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은 뿌리가 전혀 다르다 (강의안)
1 서 론
이 책의 목적은 오늘날의 종교적 문제를 결정지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가능한 한 예리하고 분명하게 보여주어 독자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오늘날 어떤 문제를 예리하게 제시하는 것은 결코 인기를 얻을 만한 일이 아니다. 불경건한 일이라고 여긴다. 협동을 방해하고, 헌금을 줄이는 역할을 하고, 교회 통계표 막대 그래프의 기둥을 줄이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건방진 방해꾼이 되는 것이 때로 경솔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에 가서는 언제나 도움이 된다.
모든 의미가 퇴색된 전통적 용어의 경건한 소리 속에서 즐거워하는 종교,
혹은 “논쟁적” 문제들 앞에서 움츠러드는 종교는 결코 삶의 충격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들은 대개 고수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기 쉽다.
정말로 중요한 것에는 싸움이 있는 법이다.
특히 종교의 영역에서 현 시대는 충돌의 시기다. 늘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위대한 구속의 종교가, 지금은 전혀 다른 형태의 종교적 신념과 싸우고 있다. 이 종교적 신념은 전통적인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신앙에 더 파괴적이다. 이 현대의 비구속적 종교는 “현대주의 신학” 혹은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불린다.
“자유주의”라고 명명된 운동은 그 지지자들에게만 “자유로운” 것으로 간주된다. 반대자들이 보기에는 이 운동이 관련된 많은 사실을 편협하게 무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운동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뿌리는 하나다. 현대 자유주의 종교가 다양한 변종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뿌리는 자연주의다. 즉 기독교의 발생에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 (자연의 일상적인 과정과 다른) 개입했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이 자연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최근 삶의 조건이 크게 변화하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지난 백 년은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으며, 이 역사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할 수는 있지만 가장 완고한 보수주의자라도 그것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현대의 발견들, 그리고 이 발견들 위에 세워진 산업은 여러 면에서 새로운 세상이다. 우리는 공기 중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이 새로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물질적인 생활 조건의 변화는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변화는 인간 정신에서 발생한 강력한 변화의 산물이며, 더 나아가 영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오늘날의 산업 사회는 자연의 눈먼 힘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의식적인 활동의 산물이며, 과학의 성취에 의한 산물이다. 최근 역사의 눈에 띄는 특징은 인간 지식의 엄청난 확장이다.
이런 시대에는 과거로부터의 모든 유산이 철저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 시험에서 인류의 어떤 신념들은 산산조각이 났다. 만약 이런 태도가 정당하다면, 기독교보다 더 강력한 적대감에 직면할 제도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만큼 지나간 시대의 권위에 기초한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현재의 경험에만 의존하지 않고, 아니 현재의 경험에 일차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고대의 책들에(그중 가장 최근의 책이 약1900년 이전의 것이다)에 의존하여 자신의 주장이 진리임을 일관되게 호소해 왔다.
이 호소가 오늘날 비판받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책의 저자들이 자기 시대의 한계 속에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따라서 물질세계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현대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가장 조야하고 초보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의 의견이 오늘날 사람들을 위한 규범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1세기의 종교가 20세기의 과학과 함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현대 문화의 관계는 무엇이며, 기독교는 과학 시대에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까?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해결하려는 것이 바로 이 문제다. 기독교의 특징적인 내용들에 대해- 그리스도라는 인물에 관한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이라는 교리에 대하여- 과학적 반박이 있을 수 있음을 수용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자는 보편적 종교의 어떤 원리를 건지려 한다. 기독교의 특징적인 것들은 종교의 보편 원리를 어떤 시대 속에서 상징화한 것이며, 이 보편 원리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방어하는 것이 정말로 유효한지 질문해야 한다. 왜냐하면 외부 방어망을 적에게 내어주고 내부 성채로 퇴각하면, 적이 거기까지 공격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유물론은, 특히 심리학 영역에서, 기독교 도시의 저지대를 점령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삶의 모든 영역까지 밀고 올라온다. 유물론은 자유주의 설교자가 화평을 위해 포기한 기독교 교리들을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설교자의 철학적 이상주의까지 공격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양보만으로는 지적 갈등을 피하지 못한다. 오늘날의 지적 싸움에서 “승리 없는 평화”는 없다. 어느 한 쪽이 이겨야 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자가 기독교 교리를 하나씩 적에게 양보하고서 유지한 것이, 기독교와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해야 하는 종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기독교에 대한 현대인의 걱정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공포 속에서 전쟁으로 얼룩진 하나님 도성의 벽을 포기하고 모호한 자연 종교라는 벌판으로 피했다가 거기에 늘 매복해 있는 적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
과학과 기독교를 조화시키려는 자유주의 신학의 시도에 대해 두 가지 노선에서 비판을 가할 수 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첫째, 비기독교적이라는 것을 근거로, 둘째, 비과학적이라는 것을 근거로 비판받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로 첫째 노선의 비판에 집중할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전통적인 용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일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부류의 종교에 속한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또한 과학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신약성경의 기독교가 아니라 현대 자유주의 교회가 가정하고 있는 기독교이며, 오직 참된 하나님의 도성만이 현대의 불신앙을 물리칠 수 있는 방어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의 주요관심사는 기독교를 현대 과학과 조화시키려는 자유주의 신학의 시도가 실제로는 기독교의 모든 특성을 포기하는 것이며, 그 결과 남게 된 것은 본질적으로 기독교가 등장하기 이전에 세상에 있었던 것과 동일한 불명확한 종교적 열망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과학의 이름으로 반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독교로부터 제거하려는 노력 속에서, 또한 적이 그렇게도 원하는 양보를 제공하여 적을 달래려는 노력 속에서, 변증자는 그가 처음에 지키려 했던 그것까지 포기하고 말았다. 삶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때로 지키기 가장 어려워 보이는 것들이 가장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자유주의 신학이 ‘비기독교적’이라는 말은 때로 악담으로 들린다. 우리는 절대 그런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며, 괴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에 어울리는 최대의 존경심을 공유한다.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그들보다 크다면 이는 신자 자신의 우수성 때문이 아니라 분에 넘치는 특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며, 이로 인하여 남을 깔보기보다는 자신을 낮춰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고려 때문에 현재 문제가 되는 질문의 치명적인 중요성을 모호하게 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모든 설교가 여러 진영에서 이미 우세해진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통제된다면, 마침내 기독교는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며 복음의 나팔은 더 이상 울리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탐구는 교회가 처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임이 분명하다. 설교의 방법에 대한 모든 질문보다 비할 수 없이 큰 질문은, 설교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 질문이다.
현대 과학의 성취에 대하여는 과장되게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과학적 탐구는 많은 것을 성취했다. 여러 면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여기에는 간과되지 말아야 할 다른 측면이 있다. 현대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우리 조상들이 살던 세상보다 엄청나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한탄스러운 쇠퇴를 보이고 있다. 물질적 생활 조건은 개선된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 영역에서는 그만큼의 손실을 보고 있다.
그 손실이 가장 분명한 곳이 예술 분야일 것이다. 외적인 생활 조건에 강력한 혁명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를 경축하는 살아 있는 위대한 시인이 없다. 인류가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다. 위대한 화가들, 위대한 음악가들, 위대한 조각가들도 다 사라졌다. 존속하는 예술은 주로 모방하는 것이며, 그게 아니면 대부분 괴상하다. 물질적 번영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공리주의 교육의 영향으로 과거의 영광에 대한 인식마저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문학과 예술에서 발생한 이런 전대미문의 쇠퇴는 더욱 광범위한 현상의 한 증상일 뿐이다. 그것은 현대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상, 곧 인간성의 폭이 점점 좁아지는 현상의 한 사례일 따름이다. 현대 사회의 전체 발전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강력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는 개인의 선택을 최소화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주의라는 말을 가장 혐오하는 사회에서도 동일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일단 대다수 국민이 어떤 정권이 유익하다고 선택하면, 그 정권은 더 이상 주저 없이 개인을 무자비하게 억압한다. ‘복지’가 좋기는 하지만, 강압된 복지는 나쁠 수도 있다는 사실이 현대 입법자들의 마음에는 떠오르지 않는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공리주의를 그것의 논리적 결론까지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 복지를 위해 자유의 위대한 원칙들이 거침없이 내던져지고 있다.
그 결과 인간의 생명이 전례 없이 빈곤해지고 있다. 인격은 개인의 선택할 여지가 있는 영역에서만 계발될 수 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그 영역이 서서히, 그리고 꾸준히 축소되고 있다. 특별히 교육 영역에서 이 경향이 감지된다. 이제 교육의 목적이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성취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나아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무엇인지는 오직 다수의 의지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육에서 개인적 특이성은 무시되고, 학교 선택권은 부모의 손에서 박탈되어 국가의 손으로 넘어간다. 결국 아이는 심리학 전문가의 통제에 맡겨지는데, 그 전문가들은 인간 생명의 고상한 영역과는 아무런 접촉이 없는 사람들이며, 자기들의 보호하에 있는 아이들이 그런 고상한 영역과 접촉하는 것을 전부 방해하고 있다.
자유는 기초 원리가 상실되면 위험한 상태로 유지될 뿐이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조차도, 모든 고상한 열망이 상실된 메마른 공리주의가 대세가 되었다. 현대 집단주의는 인간의 참된 정신 발달에 필수적인 공부들을 제거해 버린다. 1922년 선거일에 오리건 주에서 주민투표로 한 법률이 통과되었는데, 바로 그 주에 사는 모든 어린이들이 공립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성장기의 저학년에서는 최소한 기독교 학교와 사립학교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모든 참 교육이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공립학교는 유물주의, 지속적인 지적 노력에 대한 억압, 실험 심리학의 위험한 사이비 과학에 대한 장려 등 영혼을 죽이는 체제이다. 공립학교 제도 자체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유익이 된다. 그러나 사립학교들이 완전히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건강성이 유지될 때만 공립학교가 유익이 된다.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상 교육을 제공하는 유익이 있지만, 그 제도가 일단 독점적이 되면,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완전한 압제의 도구가 된다.
중세에는 종교재판이 사상의 자유를 공격했지만, 현대의 공격 방법은 훨씬 효과적이다. 아이들의 사상이 형성되는 시기에, 국가가 임명한 전문가들이 그들을 밀접하게 통제하여, 인간의 고상한 열망이 압살되고 그 정신을 유물주의로 채우는 학교에 다니도록 강요한다면, 지금 남은 자유마저도 과연 유지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인간 영혼을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악한 기술의 지원을 받는 그런 독재는 과거의 조야한 독재보다- 불과 칼이라는 무기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생각만은 자유롭게 남겨 두었던- 훨씬 위험하다.
오늘날의 물질주의적 온정주의를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다면, 미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이 되어, 영적 모험은 억제되고, 모든 인류를 가장 협소하고 빈약한 재능을 가진 존재로 전락시키는 제도가 민주주의로 간주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무 늦기 전에 반대 운동을 일으키시고, 앵글로 색슨의 자유의 원리가 재발견되게 하시기를! 위대한 인물이 거의 없거나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적 삶의 영역이 전반적으로 축소되고 있는 상황임을 부인할 수 없다. 물질적 개선이 영적 쇠퇴와 병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현대주의와 전통주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이에 선택을 요구하는 세계의 이런 상태에 대하여 편견에 빠지는 일 없이 접근해야 한다. 현대의 한탄스러운 결함을 볼 때, 어떤 유형의 종교가 단지 현대적이라는 이유로 장려되거나 단순히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정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확실하다. 도리어 오늘날 인류의 상태는 우리로 하여금 이전 세대의 사람들을 그렇게도 위대하게 만든 요소가 무엇인지, 또한 현 세대의 사람들을 그렇게도 왜소하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 물을 수 있게 한다. 현대의 모든 물질적 성취 속에서, 우리는 온 세상을 얻고도 우리 영혼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공리주의의 천한 삶을 살도록 영원히 정죄받은 것인가? 아니면 인류를 과거의 영광으로 되돌릴 잊혀진 비결이 있는가?
이 작은 책의 저자인 나는 그 비결을 기독교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는 현재 자유주의 교회의 종교가 아니다. 중세에 그랬듯이, 지금 거의 잊혀졌다가 하나님의 선한 때 새로운 종교개혁에서 다시 한번 터져 나와 인류에게 빛과 자유를 가져다주기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메시지다. 그 메시지는 배제시키고 대비시키는 방법을 통해서만 분명히 드러러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교회를 거의 지배하고 있는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을 기독교에 대비하여 제시하면서, 우리는 단순히 부정적이거나 논쟁적인 목적만으로 열을 내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무엇이 기독교가 아닌지를 보여줌으로써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하며, 그리하여 사람들이 연약하고 비천한 요소들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의지하도록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