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스펄전 목회/목사론(6)

강대식 2018. 2. 15. 04:18

영혼 구원이란 무엇인가?

 

영혼 구원은 기독교 사역자의 주된 사역이요, 참신자라면 누구나 힘써 행해야 할 사역이다. 우리는 바울처럼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는 것”(고전9:22 참고)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다른 교회 신자들을 데려와 우리 교회의 교인으로 등록시키는 것은 영혼 구원이 아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양들을 위대한 목자이신 주님께로 인도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세력을 불리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은 이기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을 숭고한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1. 영혼 구원은 업적이 아니다

 

영혼 구원을 업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연말에 교회가 양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교인 명부에 좀 더 많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고자 혈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런 덫에 쉽게 걸리곤 한다. 양적 성장이 사역자의 알파와 오메가’(22:13)가 된다면 참으로 개탄스런 결과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참된 회심자들로 교회를 채우려고 노력하라.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모두 지킬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신중하게 행하지 않으면 교회에 이익보다는 해를 더 많이 끼칠 수 있다. 품행이 단정하고 신앙생활을 잘할 것처럼 보였던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목회자는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성찰하여 죄를 뉘우치게 하기보다 성급하게 믿음을 고백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그 젊은이들은 현재 교회를 더욱 멀리하고 있다. 숫자를 불리는 데만 급급한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났다고 생각할 만한 증거가 전혀 없는 사람을 충실한 신자로 받아들이면 교회는 물론 당사자에게 큰 해를 끼치게 된다.

 

우리는 세례 받는 사람 수의 증가나 교회의 양적 성장을 영혼 구원과 동일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런 수치로 영혼 구원을 평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평생 시험해 보아야 할 일을 불과 일 분도 못 되어 확실하다고 판단하거나 사람들의 머릿수를 세는 행동 따위를 그만두라. 잘못된 결신을 이끌어 낸다면, 이는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고 온갖 악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2. 영혼 구원은 감정의 흥분이 아니다

 

영혼 구원 사역을 감정이 흥분하도록 부추기는 수단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물론 위대한 부흥 운동에는 항상 감정의 흥분이 뒤따랐다. 큰 폭발음 없이 바위를 깨뜨릴 수는 없고, 쥐 죽은 듯 고요하게 전쟁을 치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사람들의 마음이 고무되고,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증거들을 영적 운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마차를 달리게 하는 목적이 먼지를 일으키는 것이라 여기고, 빗자루로 먼지를 일으킨다면, 이익보다는 해를 끼칠 소지가 높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그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여자가 집 안을 쓰는 이유는 먼지를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동전을 찾기 위해서였다(15:8 참고).

 

감정의 흥분이나 가시적 효과를 목표로 삼지 말라. 집회가 끝난 뒤에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는 등 온갖 혼란스러운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 물론 때로는 진지한 감정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런 현상을 일부러 조장해서는 안 된다. 흥분한 감정에 이끌려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은 흥분이 가라 앉으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곤 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은 상식과 이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헛소리, 절규, 광신주의는 지식을 따르는 참된 열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당부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이보다 더 강하게 당부하고 싶지 더 적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3.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라

 

그렇다면 하나님을 위한 영혼 구원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영혼을 하나님 앞과 구원으로 인도해야 할까? 나는 영혼 구원의 주된 방법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인간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출발점이다.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영혼 구원의 시작이요 끝이다.

 

하나님은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55:3)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사람들에게 들을 가치가 있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우리는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16:15 참고). 성경에 계시된 위대한 진리들을 가르쳐야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어떤 설교자들의 말을 듣다 보면, 복음이 마치 정신을 일깨우는 향유나 뇌를 각성시키는 독한 술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복음은 소식이다. 그 안에는 가르침이 있고, 인간이 알아야 할 문제에 관한 정보가 있다. 복음은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진리이다. 복음은 마법의 주문이나 주술이 아니다. 복음은 깨달음과 믿음을 요구하는 진리와 사실을 계시하는 것이다. 복음은 합리적인 체계를 구축하며, 인간의 지성에 호소하고, 깊은 생각과 성찰을 요구하며, 양심과 반성의 힘을 일깨운다.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무조건 믿으라, 믿으라!’라고 소리친다면, 그들이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믿음을 권고할 때에는 적절한 가르침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권고는 아무 쓸모가 없다.

 

사람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는 많은 가르침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회개하라!” 무엇을 회개하란 말인가? 이 물음에 대답하려면, “죄는 무엇인가? 죄의 해악은 무엇인가? 죄의 결과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아울러 생각하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성경은 지식 없은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19:2)라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믿게 하고 그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주님의 도구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복음의 교리를 열정을 다해, 분명하고 명료하고 간결하게 전해야 한다. 특히 인간의 상태를 조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확실히 드러내 주는 실천적인 진리를 전해야 한다. 회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논리로 진리를 은폐하고 적당히 거짓으로 둘러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불신자들에게는 성령의 이름조차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진리만을 들어야 하므로 그들에게는 항상 진리를 전해야 하며, 죄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오직 진리만을 전해야 한다. 우리에게 영혼 구원 사역을 맡기신 주님은 거짓을 사실인 양 꾸미거나 진리를 은폐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진정한 복은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정확히 일치할 때 주어진다.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를 은폐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 말씀을 듣는 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해를 끼친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은 자신이 어떤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치유를 경험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죄의 옷을 벗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의 옷을 입을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진리를 가르치고, 인간의 본성이 사악하고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마음을 살피게 하며, 잠자는 양심을 깨우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설교자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그분과 화목하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상기시켜 주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죄인들을 타락한 상태에서 구원할 의무가 없으실 뿐 아니라 그들을 그런 불행한 상태로 방치하더라도 온전히 의롭고 온당하시다고 가르쳐야 한다. 또한 우리는 어떤 공로로도 그분의 은혜를 살 수 없고 그분을 설득할 수 없으며,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어야 한다. 설교자의 임무는 죄인들이 절대적인 무능력을 느끼고 오직 그들을 도우실 수 있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만드는 것이다.

 

진리를 가르치지도 않고서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성령의 뜻에 어긋난다. 허튼소리나 흥분된 감정, 또는 그럴듯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애쓰는 것은, 끈끈이 덫으로 천사를 붙잡고 음악으로 별을 유혹하려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가장 매혹적인 것은 순결한 복음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정복하시는 무기는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이다. 복음은 모든 상황에서 언제나 똑같이 효력을 발휘한다. 복음은 가장 강퍅한 마음을 뚫을 수 있는 활이요, 가장 심각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향유이다. 오직 복음만을 전하라. 그 외에 다른 것을 전해서는 안 된다. 옛 복음을 의지하라. 사람을 낚는 데 다른 그물은 필요 없다. 주님이 주신 그물은 가장 큰 물고기를 잡아 올릴 만큼 튼튼하고, 가장 작은 물고기를 낚을 수 있을 만큼 촘촘하다. 이 그물을 넓게 던지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4:19)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4. 진리를 직접 느끼게 하라

 

영혼을 구원하려면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알게 해야 할 뿐 아니라 진리를 직접 느끼게 해야 한다. 항상 지성에만 호소하고 감정을 울리지 못하는 말씀 사역은 절름발이나 다름없다. 교리를 알면 마땅히 하나님을 향하여 열정이 생겨나야 한다. 죄인에게는 머리와 마음이 모두 있다. 우리는 생각과 감정에 똑같이 호소해야 한다. 감정이 움직이지 않으면 회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죄에 대해 슬퍼하고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회심을 기대하기 어렵다. 진리가 영혼 깊이 스며들어 마음이 온통 진리로 물들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감정의 근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신령하지 못한 감정을 자극해 생각을 조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설교자들은 설교할 때 죽어 가는 어린이나 장례식에 관한 일화를 즐겨 사용한다. 그들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자극해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때로는 그런 감정이 정서를 순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 무슨 가치가 있을지 궁금하다.

 

자연스런 슬픔의 감정은 그 자체로는 아무 유익이 없다. 영혼에 깊은 인상을 심어 주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억지로 감정만을 자극하려고 들면, 생각을 방해하여 정작 관심을 기울여야 할 진리를 외면하게 만들기 싶다. 사람들은 그런 설교를 듣고서 열정이 넘치는 훌륭한 설교였어라고 말한다. 청중이 죄를 슬퍼하거나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눈물을 흘린다면, 눈물이 강물처럼 흐른다고 해도 괜찮다. 그러나 슬픔이 한갓 자연스런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아무리 눈물을 많이 흘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훌륭한 의사는 치료해야 할 부위만을 정확히 절개한다.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사역자도 슬픈 감정 가운데서 영혼을 복되게 하는 것만을 자극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심히 두드려 죄를 애통해하게 만든 다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해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계속 복음을 가르쳐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게 해야 한다. 준비 단계에서부터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사모해야 한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을 전할 때는 더욱더 그분의 능력을 사모해야 한다. 거듭남은 성령의 가장 고귀하고도 신성한 사역 가운데 하나이다.

 

5. 참된 거듭남의 증거를 살피라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죄인의 영혼에 역사해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구원으로 인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듭나야 한다.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새 생명을 얻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고후5:17 참고).

 

언뜻 생각하면 인간적인 수단은 하나도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를 영화롭게 하기를 주저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도구 된 사람들을 존중하며 그들에게 큰 능력을 허락하신다.

 

거듭남, 즉 새로운 탄생은 전인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 거듭남의 본질은 인간의 내면에 새로운 원리를 창조해 심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새로운 본성, 곧 신령한 본성을 창조하신다. 성경은 (the spirit)’(soul)’과 구별한다. 우리가 믿는 중생 교리는 다음과 같다.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은 혼과 육체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러다가 거듭남을 체험하면 그 안에 더 고귀하고 새로운 본성인 이 창조된다. 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불길에서 나오는 불꽃이다. 이 불꽃이 마음에 떨어져 거기에 영원히 거한다. 이 불꽃을 받은 사람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벧후1:4 참고). 거듭난 사람은 육체와 혼과 영으로 구성된다. 영은 그때부터 육체와 혼을 지배한다(고전15장 참고).

 

우리는 첫 사람 아담처럼 육()의 몸을 지니고 있다가 거듭남을 통해 새로운 상태가 되어 살려 주는 영을 소유한다. 이 영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천국을 볼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께서 청중들에게 임하여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야 한다. , 성령께서 마른 뼈들에게 임하여 죄 가운데 죽은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37:1-14, 2:1 참고). 그들은 그런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결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전2:14, 8:7).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통해 새롭고도 신령한 마음이 창조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런 역사를 일으킬 능력이 없다. 우리가 성령의 도구이고, 또 성령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허락 하신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엄청난 사역을 결코 감당할 수 없다. 우리의 사역을 통해 거듭남이라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거듭남의 증거 가운데 첫 번째는 죄의 확신이다. 죄의 확신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표징이다. 마음에 창조된 새 생명은 강한 자책감을 일으킨다. 죄를 애통해하는 마음이 그 첫 번째 징후이다. 요즘에 저주받은 자신의 상태를 슬퍼하지도 않고 칭의를 확신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데, 사실 그것은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의의 옷을 입혀 주기 전에 먼저 죄의 옷을 벗기신다. 그분은 복음으로 죄인들을 살리기 전에 율법으로 그들을 죽이신다. 죄를 깨달은 흔적이 없는 사람을 본다면, 그에게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결론지어도 괜찮다. 성경은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16:8)라고 말한다.

 

그리고 죄의 확신을 느끼면서도 공포와 불신앙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사탄이나 인간의 부패한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죄를 진정으로 깊이 뉘우치는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도록 온 힘을 다 쏟아야 한다.

 

참된 회심의 또 하나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단순한 신앙이다. 죄인이 자신과 자신의 공로를 모두 버리고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기 전까지 그를 구원으로 인도했다고 자신해서는 안 된다. 온전한 구원을 얻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다루고 싶다. 왜냐하면 온전하지 못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자가 단지 부분적으로만 구원받을 뿐이고, 나머지는 앞으로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과연 복음일까? 우리는 죄인들에게 오직 주 예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라고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으로 시작한 일을 육신으로 마쳐도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쉽다. 회심자들에게서 주 예수님을 믿는 단순하고 진지하고 헌신적인 믿음의 증거가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결코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 외에 가식 없는 회개도 거듭남의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회개는 오늘날의 부흥 운동가들이 많이 사용하지 않는 옛말이 되었다. 회개는 생각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어린이 찬송가 가사가 회개를 적절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전에 사랑하던 죄를 버리는 것이 곧 회개라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진정으로 뉘우쳤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네.”

 

진정한 회심은 죄를 슬퍼하고, 죄를 지은 것을 애통해하며, 죄를 미워하고(죄를 미워하는 것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뜻),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영혼 안에 있는 생명이 겉으로 보이는 행동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참믿음과 참회개는 쌍둥이와 같다. 둘 중 어느 것이 먼저냐고 따지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바퀴살은 바퀴가 움직이면 함께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모든 은혜는 성령을 통해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순간 함께 시작된다.

 

회개는 반드시 필요하다. 눈물 한 방울 없는 눈과 강퍅한 마음으로는 절대 구원자이신 주님을 바라볼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애통하는 마음, 양심의 가책, 죄를 멀리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는 데 초점을 맞추는 한편, 온 마음이 철저히 변화되어 죄를 온전히 뉘우칠 때까지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된다.

 

거듭남의 또 다른 증거는 진정한 삶의 변화이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이전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회개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런 사람의 회심은 가짜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정신과 성품도 바뀌어야 한다. 본래 나무의 성질이 아니라 접붙인 가지의 성질을 닮은 열매가 맺혀야 한다. 죄를 되풀이하는 것은 죄의 종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전인이 새로워지지 않은 회심은 매우 의심스럽다. 고백과 행위가 일치해야 한다.

 

진정으로 회심했다면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기도는 경건의 생명을 유지하는 호흡이다. 기도가 없다면 그 사람을 죽은 영혼으로 생각해도 된다. 물론 기도가 복음의 가장 큰 의무요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이라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참믿음에는 항상 기도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회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확실한 증거가 드러나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아울러 거듭난 사람은 주님의 모든 계명에 기꺼이 복종하고자 한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그분의 뜻을 공공연히 저버리고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믿음을 고백한 회심자가 주님의 뜻을 알지만 그 뜻에 복종할 마음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의 주제넘은 태도를 부추길 것이 아니라 그의 구원이 거짓임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실수로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는 부드럽게 꾸짖어 바로잡아 주어야 하지만, 고집스런 불순종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런 태도를 묵인하는 것은 우리를 세우신 주님을 배신하는 것이다.

 

형제들이여, 영혼 구원의 증거들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 그런 증거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영혼 구원 사역이 완수되었다고 섣불리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영혼을 인도하는 자로서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야 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위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자.

 

영혼 구원 사역을 행하는 동안, 우리는 실패를 많이 겪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열심을 보였던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들은 개가 그 토하였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벧후2:22 참고). 그러므로 회심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성급히 판단하지 말라. 그들을 교회 회원으로 너무 일찍 받아들이지 말라.

 

회심자들을 시험해 그 진정성을 파악하기 전에 그들의 숫자를 세어서는 안 된다. 그런 과정을 거치려면 사역이 다소 더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성실하고 꾸준한 태도로 사역에 임해야 한다. 나무로 만든 벽을 마치 단단한 돌로 만든 벽인 양 칠해서 꾸미지 말라. 우리가 짓는 건물은 실속 있고 현실적이며 참되어야 한다. 오직 그런 사역만이 가치가 있다. 우리 모두 바울 사도처럼 하나님을 위해 참된 건물을 짓는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고전3:10-15).

                                                                                                                                                         -영혼 인도자에게 전하는 글-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유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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