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3/11 주일설교,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 고후 10:3-5
2018-03-11 주일설교
본문: 고후 10:3-5
제목: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
1.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고후10:3-4a)
바울은 세상 떠나갈 시간이 되었을 때에, 이렇게 고백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딤후4:6-8)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의 달려갈 길을 가면서 선한 싸움이 있다.
싸워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 죄와 그 배후에 있는 사탄과 육신과 세상이다.
싸워서 이기면 의의 면류관과 상급과 축복이 있다.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패배하고 그 노예가 되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피흘려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와는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법, 성령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죄는 인간의 모든 불행과 비극과 위기를 만드는 원인이다.
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 채 교육과 정책과 프로그램으로 해결할려고 하지만,
그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인간은 날로 악해지고 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죄를,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죄의 노예가 되고, 포로가 되고 만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죄를 다스리지 못하면 인생은 비극과 불행과 사망으로 끝이 난다.
사람들이 짓는 죄들의 뿌리에는 원죄가 자리잡고 있다.
원죄를 먼저 처리해야 그 가지들인 죄들과 싸워 이길 수 있다.
아담이 물려준 원죄이지만 사람의 능력으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하나님의 능력과 방법으로 처리해 주셨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셨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그 죄를 처리하셨다,
우리에게는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이 사실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원죄’(Sin)를 처리한 그리스도인들은,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이 되어, 이제는 ‘죄들’(sins)과 싸워 이길 수 있게 하셨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어도 정죄함이 없고 오직 징계가 있을 뿐이다.
죄들과의 싸움은 육신에 따라 육신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기 전까지는 육신과 결합되어 육신으로 행한다.
그러나 육신에 따라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않고 ‘성령에 따라’ 싸운다.
육신과 성령은 서로 거스리는 관계이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갈5:16-17)
로마서도 육신을 따르는 것과 성령을 따르는 것이 다르고, 다른 결과를 낳는 것을 말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만을 생각한다.
육체의 욕심을, 자신의 삶의 원리로 규범으로 목적으로 삼는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게 된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인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한다.
성령의 역사와 감화를 자신의 삶의 원리로 삼고,
성령이 쓰신 말씀을 자신의 행위의 규범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 것이다.
그 엄청난 차이와 결과를 명심하고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
내 인생에 삶의 활력과 평안이 없다면 육신의 생각으로 산 결과라고 보면 된다.
선한 싸움을 싸울 때에도 성령으로 싸우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육신을 따라 육신으로 싸우는 악한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신적인 방식이나 육신적인 목적으로 싸운다면 그는 육신으로 싸우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명예와 영광이나 복수,
또는 자신들의 영토와 지배력을 확장하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식으로 “육체에 따라 싸우지 않는다”.
우리의 목적이 영적인 것이기에, 우리의 수단도 영적인 것이다.
영적인 싸움을 위해 영적인 수단을 사용한다.
죄들은 물론이고, 사탄과 육신과 세상과 싸울 때에도 영적으로만 이길 수 있다.
사람을 원수로 여기고 육신에 따라 육신의 방법으로 싸워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문제를 더욱 키울 뿐인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고 해결의 실마리를 잡게 된다.
원수 갚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몫이다.
하나님은 원수와의 직면을 통해서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만드신 후에는 반드시 그 죄에 대한 심판을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드시기 위해 앗수르와 바벨론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만드신 후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죄악을 심판하시고 멸망시키셨다.
그러한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 인생의 여정 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으라.
2.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운다.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는 죄를 이길 수도, 세상을 이길 수도 없다.
우리의 육신을 이길 수도 없고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사탄을 이길 수도 없다.
세상도 사람도 그 속에 견고한 진들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고 하나님의 법인 양심을 주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과 양심의 법을 어기고 죄를 지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죄로 물들게 했다.
사람 속에는 이성이 왕으로 자리잡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자 하는 견고한 진이 있다.
사람의 자아와 자존심과 보복감정과 복수심을 보면 그 진이 얼마나 견고한지 알 수 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그 고집하며 성질하며 완고함과 교만함하며 그것이 견고한 진이다.
몸에 벤 어린 시절이 견고한 진이 되어 남은 일생을 집요하게 끌고 간다.
아들은 아버지의 성품과 삶을 닮고, 딸은 어머니의 성품과 삶을 그대로 닮는다.
대를 이어서 내려가는 가족문화는 그 어떠한 능력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진이다.
세상도 그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니까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문명과 교육의 이름 아래 세상의 철학과 지혜와 초등학문들의 견고한 진 위에 세워져 있다.
그 견고한 진으로 하나님을 대항하고 하나님의 법을 대적한다.
세상의 철학과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바리새인은 말씀의 원리는 버리고 껍데기만 지키기 위해 말씀을 율법화한다.
사두개인은 말씀을 세상 지혜로 해석하고 합리화하고 교회를 세상화한다.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의 미혹에 넘어가는 것은 그들의 견고한 진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고 불의를 좋아하면 하나님은 그 심판으로
미혹의 역사를 보내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
우리가 오늘 읽은 세 절의 말씀에 ‘무너뜨린다’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온다.
무너뜨려야 할 것은, 견고한 진이요, 모든 이론이요, 모든 지식이요, 모든 생각이다.
사람의 철학과 세상의 지혜로 형성된 견고한 진이 무너뜨림을 받아야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다.
의지하던 기왕의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려야만 새로운 건물을 세울 수 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것이 구원이다.
새 사람을 입을려면 옛 사람의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무엇으로? 사람이 세운 것을 사람이 무너뜨릴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무너뜨릴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역사하실 때 사람 속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
견고한 진이 무너져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은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것이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사람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역사였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역사가 계속될 것이다.
교회는 오직 그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오순절날 임한 성령이 다시 임하고, 거듭나고 회심하는 역사가 교회 가운데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부흥이다.
사람들을 끌어다 많이 모아 놓는 것이 부흥이 아니다.
그것은 강도의 소굴이요, 장사하는 백화점일 뿐이다.
성도와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성령의 부으심을 위해,
교회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간구해야 한다.
견고한 진이 패하고 새 건물이 흥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말이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눅2:34)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견고한 진들이 무너지고,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역사가 부흥으로 일어나야 한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다시 일으켜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지고 천국을 살고 영원한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3. 모든 이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4-5)
인간의 견고한 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모든 이론이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 지식이요, 모든 생각이다.
하나님 아는 것이 성경이지요, 성경을 대적하여 높아진 지식들이다.
인간의 모든 생각이, 자기의 옳은 소견이, 모든 이론과 높아진 지식을 낳는다.
모든 이론과 지식은 다시 생각을 낳고 순환하게 된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생각들이 다 육신의 생각이요 그 생각들이 사망을 가져온다.
사망은 인간의 어둠과 혼란과 공허를 총칭하는 말이다. 우울증과 불안과 절망도 포함한다.
성령이 오시고 말씀으로 살아야 생명을 얻고 평안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육신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 속에 세상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것이 바로 무너뜨려야 하는 견고한 진인 것을 알고,
성령과 말씀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우리의 많은 고난과 연단도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면서 하나님은 기어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게 하신다.
예수를 만나기 전 품고 살았던 모든 이론 모든 지식 모든 생각을 사로잡고 무너뜨려야 한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복종하게 해야 한다.
성령의 생각이 기록된 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을 항상 묵상하면서, 우리 안에서 오늘도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나도 힘을 다해 수고를 해야 견고한 진을 무너뜨릴 수 있다.
우리도 해산의 수고를 해야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수 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서 가나안 땅이 사사시대 암흑의 땅으로 변했다.
우리 인생도 그 소견대로 살면 암흑의 땅으로 변하고 만다.
그 소견이 바로 무너뜨려야 할 견고한 진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너뜨리자.
몸에 밴 어린 시절의 견고한 진이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고 의지를 지배한다.
오직 어떠한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무기를 삼아야 한다.
견고한 진을 만들고 있는 모든 생각, 모든 이론, 모든 지식을 무너뜨리고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자.
죄들과 사탄과 세상과 육신은 힘을 잃고 굴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