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하권, 15장 비판하지 말라 (김영희강의안)
15 장 비판하지 말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
- 주님은 6장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늘 아버지가 보고 계심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다. 사생활에서나 선행을 행하려고 할 때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하면 이런 일에 아무런 가치나 공로가 없다. 만일 자신을 만족시키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려고 한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런 다음 주님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세속성과 그 교활성을 말씀하신다.
- 산상설교의 마지막대목인 7장에는 하나의 기본 주제 곧 비판이라는 주제로 되어있다.
이 주제는 주로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기본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가 하늘 아버지의 앞에서 행하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강력히 주장하시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생각하고, 우리의 삶의 최종 심판, 영원한 운명의 결정을 생각하며 행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 대부분은 이생과 이 세상이 전부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는 데 있다. 어떤 것을 아는 것과 아는 것을 사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내내 심판의 과정을 겪고 있음은 우리가 최종 심판을 위해 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결산 보고를 해야 할 것을 기억하며 이런 생각을 깊이 염두에 두고 모든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장의 주제이다.
주님은 이 주제를 여러 모양으로 다루시며 두 집에 대한 묘사에서 클라이막스로 끌어올린다. 한 사람은 실천하였고 또 한사람은 실천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산상 설교의 크기와 탐사성 있는 성격과 가르침의 깊이를 생각하게 된다. 산상 설교는 우리가 어디에 숨든 우리를 온통 들추어내어 하나님의 빛 앞에 노출시킨다. 산상 설교처럼 철저하게 정죄하며, 철저하게 실천 불가능하며, 그처럼 두려운 교리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없다. 이 설교 안에서 우리는 모두 벌거숭이가 되며 소망이 전혀 없게 되는 것이기에, 이신칭의의 교리를 알지 못하였다면 산상 설교를 살펴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대 설교는 교리로 가득차 있으며 또 교리로 이끌어 간다. 이 설교는 신약성경의 모든 교리에 대한 일종의 서론이다.
- “비판하지 말라” 교회사에는 각 시대는 그 시대 나름의 해당되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의 우리는 각양 정의의 가치를 업신여기는 시대, 사상을 혐오하고 신학과 교리와 교의를 증오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안위와 타협의 특색을 띄우는 시대이다. 이 시대는 자기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믿는 사람을 싫어하는 시대이다. 이 시대는 그런 사람을 함께 어울리기 힘든 까다로운 사람으로 여기고 물리쳐 버린다. 교회사에는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원칙을 굳게 지켰기 때문에 찬양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영광을 받는 사람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길 중간’에 있는 사람이요, 그의 편견(견해)으로 인해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상냥한 사람이다. 어떤 특정교리를 주장하지 않아도 삶이 고달프고 힘들다고들 한다.
이 같은 시대에 있어서 이 진술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견을 표시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시대는 판단을 위한 시대가 아니며 오늘에 필요한 것은 연합과 친교라고 그들은 말한다. 개중에는 공산주의라는 위험한 적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모두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마저 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6) 판단에 관한 진술에 뒤이어 오는 명령은 판단과 분별을 행사하라고 말씀하신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15) 어떤 표준을 가지고 분별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말씀이 ‘제멋대로 자유롭고 부드러운 태도’를 의미한다거나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관대한 태도를 의미한다는 해석은 참된 해석일 리가 없다. 더 나아가 성경은 경찰이나 사법부가 국가의 법을 지키는 것은 의무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교회에서 판단이 행해져야 할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교회는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전되며, 권징이 행사되는 곳’이다. 프로테스탄트 교부들에게 있어서 권징은 말씀 선포와 성례와 같이 교회의 징표였다. 그런 오늘에 와서는 권징이 무엇인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이 판단 문제는 교리 문제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피해야 하게 되어있다.(딛3:10) 어떤 사람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한 그는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으며 그가 무엇을 믿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이단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평안을 비는)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요이1:10) 오늘날에는 이런 것은 사랑이 없으며, 지나치게 까다롭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이러한 관념은 비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이것이다.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정죄 문제이다. 남을 정죄하는 것을 피하려 하다 다른 극단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또한 거짓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생활은 이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행함이 칼날 위로 걸어가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 편이나 저 편의 오류를 피하여 진리에 중심에서 행해야 한다. 기독교 생활은 항상 균형잡힌 생활이다. 이것은 분별이나 판단을 거부함을 의미하지 않으며, 동시에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경고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산상 설교에서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그들이 크게 잘못된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과 정죄하는 태도였다. 이것은 초대교회를 괴롭힌 것이었고 이후 하나님의 교회를 늘 괴롭혀 왔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이 점에서 우리는 얼마나 죄가 많은지요! 이것은 고통스러운 주제이다.
- 남을 정죄하는 영은 어떤 영인가?
스스로를 의롭다하는 영이며, 그 배후에는 항상 자아가 도사리고 있으며, 자기의 나타냄이요, 우월감의 나타남이요,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이다. 이 영의 중요한 부분은 혹평적인 성향이다. 비편적인 것과 혹평(악평)적인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참된 의미의 비평은 결코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것이다. 여기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비판의 죄를 범한 사람은 바로 악평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 사람은 비평을 위한 비평을, 남의 결점을 즐기는 사람이다. 결점을 찾지 못하면 중요하지 않거나 관계 없는 일들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먹을 것과 마시는 문제들에 대해 서로를 판단하고 이 날과 저 날보다 낫게 여기는 일들을 피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모두 하나님께 판단 받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지의 여부는 이처럼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유쾌하지 못한 일을 듣게 될 때 유쾌함을 느낀다면 잘못된 영이다. 이 영은 원칙이 설 곳에 편견을 놓으며 인신공격을 가하는 경향이 있다. 교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게 이 점에서 가장 잘못된 사람들이라고 말해서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어째서 원칙을 옹호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주제를 바꾸어 공격하는 것이다. 인신공격과 같은 방법은 비판의 영이 나타날 때인 것이다.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그 사실을 알려고도 하지도 않으며 판단을 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이 모든 사실을 찾아본 다음에 판단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바리새적 영을 범하는 것이 된다.
이 영은 실로 사람 자체에 대하여 최종적인 심판을 선언하는 성향을 나타낸다. 야고보와 요한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영이다. 주님은 그들을 꾸짖으시고 ‘너희의 영이 어떠한지 너희가 모른다 인자기 온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기 위함이 아니요 구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셨다. 사람을 정죄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만 속하는 권세를 찬탈하는 것이 된다.
-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판단하지 말라’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라는 복음을 가지고 있고,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함을 감사하자.
놀라운 은혜와 긍휼로 구원받은 것을 깨닫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을 통과한 사람들로서, 그를 위해 살며 그를 닮은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