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존 오웬, "영의 생각, 육신의 생각", 2장 영의 생각의 본질, 3장....
2장 ‘영의 생각’의 본질
신령한 정서로부터 나오는 생각과 묵상은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은혜를 구성하는 가장 우선적인 것들입니다. 우리의 생각들은 나무에 피어나는 꽃과 같습니다. 꽃은 만발하였으나 열매는 적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꽃을 통해서만 맺히는 법입니다. 꽃을 통해 그 나무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사람의 이지의 구조(frame of mind)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자라나는 식물을 보고 토양의 성질을 판단할 수 있듯이, 사람이 가진 마음의 성향은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생각들을 통해 드러납니다. 생각은 영혼의 가장 원초적인 활동입니다. 마음은 생각을 통해 자기 속에 있는 감취어진 것을 토해내듯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치 샘에서 솟아나는 물처럼 말입니다.
마음은 생각의 창고입니다. 그 창고에서 흘러나오는 생각의 일부만으로도 마음에 쌓아놓은 것들의 본질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본성에 속한 것이든, 은혜에 속한 것이든 마음은 하나의 샘 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샘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샘은 수많은 생각들을 끊임없이 쏟아냅니다. 결국 마음은 그 샘이 쏟아내는 생각들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교만하고, 더러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가진 마음의 성향이 바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거룩하고 신령하여 온전히 하늘에 속한 것에 생각을 향하고 있는 사람은 신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빈번한 생각들은 마음의 내면적인 구조와 상태를 가장 정확하고 명료하게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마음의 주된 성향이 육신적이면 육신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마음의 성향이 언제나 영적인 생각들을 내게 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편 기자가 사람들의 ‘속 생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시49:11), 그것은 사람들의 가장 깊은 마음의 원리들과 성향 속에 늘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자신들을 기만하는 정욕의 ‘속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약1:14). 그들이 마음 깊이 늘 품고 있던 그 정욕의 ‘속 생각’이 육신을 위한 계획을 마련하도록 강력하게 마음의 생각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아간의 경우를 보십시오(수7:21). 그가 재물을 본 순간 탐심 어린 생각이 곧바로 일어났습니다. 어떤 외부의 강압적인 자극이나 특별한 계기가 없어도 자신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성향과 경향으로 인해 아주 자연스럽게 그러한 생각들이 우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탐하는 것을 어떻게 행할까 항상 궁리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심을 채울 외부적인 대상을 찾아 나섭니다. 그들의 마음은 죄를 지을 궁리로 분주합니다.
영적인 사람들도 내면의 속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인이 가진 속 생각이 쉬지 않고 악한 생각을 뿜어내는 것처럼, 영적인 사람들도 ‘영적인 생각’을 힘차게 솟구쳐내는 마음의 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45:1에서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영적인 샘이 영적인 것들에 대한 거룩한 생각을 솟아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그 생명수의 샘은 바로 신자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원리, 새로운 본성의 원리, 믿는 자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은혜 주시어 있게 하신 원리입니다. 그것은 어떤 외적인 영향력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샘솟듯 저절로 솟아나는 것이며 영혼 전체를 영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영적인 생각은 바로 그러한 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5). 선한 사람은 쌓은 선에서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선한 생각들이 선한 열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그 속에 쌓여있는 것의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잠시, 겉으로 드러나 영적인 모양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생각들이 마음의 샘 근원에서 나온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외부로부터 내면에 가해지는 일시적인 자극으로 인해 마치 마음 근원의 본질이 변화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 내면에 존재하는 ‘양심’은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양심의 가책은 마음에 영향을 끼치거나 인상을 주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성향이나 정서와 정반대의 성질을 가진 행동들을 유발합니다. 물은 아래로 흘러내리는 성질이 있지만 도구를 이용한다면 땅 위로 솟구 쳐 올라갑니다. 그러나 도구를 통해 가해지던 압력이 중단되면 물은 그 본래의 성향으로 돌아와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사람들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세상적인 본성을 가지고 모든 삶의 행로를 세상에 맞추어 나아가던 사람도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게 되면 순간적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양심의 가책은 그들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하늘의 것들을 생각하게 하여 마치 그것이 그들의 본질적인 삶의 행로였던 것같이 보이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각성의 힘이 사그라져 마음이 양심의 가책을 상실하게 되면 그들의 생각은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여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여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시78:34-37).
육신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느끼는 두려움도 이러한 일시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영적인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묵상하는데 열심을 내다가, 고통을 주었던 원인이 사라지면 그토록 신령했던 생각들은 잦아들기 시작하고, 그러한 생각을 가져야 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렘13:23). 어쩔 수 없는 환경이 닥쳐와 잠시 몸을 숙였을 뿐, 속마음의 성향과 습관이 그렇게 쉽게 변할 리가 없습니다.
3장 ‘영의 생각’의 허울을 둘러 쓴 ‘육신의 생각’
복음서에 보면 전파되는 말씀을 기꺼이 듣고 기쁨을 얻고 말씀 전파를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일들에 대해 생각들을 한 이들이었고, 또 그런 생각들의 효과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이지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에 간여한 이들이 외식자(外飾者)들로 판명나고, 영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는 이들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이유를 마13:20-21절에서 밝히고 계십니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그들이 가지는 선한 생각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내면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복음시대에 살고 있는 자들 중에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들은 자기들에게 부단히 제시되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그러한 생각들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마치 소낙비가 내린 뒤의 물과 같습니다. 소낙비는 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소낙비로 불어났던 물들이 다 흘러 지나가 버리면 그 물이 지나갔던 수로에는 그저 돌멩이와 더러운 오물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말씀의 교리가 그런 이들에게 소낙비같이 떨어지면 다소간 영적인 것들을 생각하도록 길을 열어 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 샘’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잠시 그런 영적인 것들을 생각하다가 메말라 버려 바닥을 드러내고서 어리석고 더러운 것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가장 거룩하고 신령하게 생각하는 최선의 사람들도 말씀 설교를 통해서 자극을 받아야 영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고 확대하고 확고하게 합니다. 그 점을 반드시 유념해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을 전파하는 목적입니다. 말씀 전파는 두 가지 방식의 효력을 냅니다.
첫째, 우리에게 증거되는 말씀은 우리 영혼의 ‘영적 양식’입니다. 말씀을 토대로 영적 원리가 유지되며, 그로 인해 모든 은혜가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많을수록 우리는 영적으로 생각하는 일을 더 풍성하게 해낼 것입니다.
둘째, 그 말씀은 은혜를 실행으로 옮길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믿음과 사랑과 두려움과 신뢰심과 경외하는 마음의 진정한 대상을 우리 영혼에 제시하며, 모든 은혜들이 우리에게 작용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해 내면적인 은혜의 원리에서 나오는 생각들은, 순간적이며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와 다릅니다. 먼저, 이 내면의 원리에서 나는 생각들은 설교되는 것들 자체를 향한 ‘믿음과 사랑의 특별한 작용’들입니다. 진리를 사랑함으로 받아 나온 생각들입니다. 증거된 진리의 내용들 자체의 선함을 사랑함으로 나온 것입니다. 설교되는 명제들의 진실성 자체만이 아니라, 그 진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그 생각들 속에 있습니다.
내면의 원리에서 나는 생각들은 ‘영혼의 만족’을 동반합니다. 설교되는 말씀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만족은 오직 설교되는 것들의 능력을 사랑하고 체험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만족이란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는 은혜의 본질과 설교되는 말씀이 서로 맞아 들어가는 것을 느낄 때 가질 수 있는 상쾌함입니다. 말씀의 증거가 우리 속에 있는 은혜의 본질에 강한 확신과 위로를 줄 때, 우리의 영혼이 은밀한 만족과 자신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불규칙하게 일어나는 생각들은 이렇게 동반하는 것들이나 효력들이 없습니다.
증거되는 말씀 진리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영적 성장’의 방편들입니다. 채소들이 자라는 것은 증식하려는 감각의 폭발하고 분출하는 힘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성장에 그 믿음과 사랑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증거되는 말씀이 새로운 성품의 원리를 자극하여 여러 생각들을 하게 하여 그 속에서 ‘영혼의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과 마찬가지로 ‘기도’역시 같은 성질을 가진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가장 큰 목적은 마음속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은혜의 원리를 자극하고 북돋는 데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대한 거룩하고 영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에 걸맞는 정서를 갖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일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일시적으로 받은 자극이나 인상에 의한 일에 불구하다면, 그것은 단지 그 마음에 은혜의 샘 근원을 전혀 가지지 않은 가운데 행하는 외적인 일에 불과합니다.
간혹 사람들의 영적인 생각들이 ‘자기 은사의 실행’을 통해서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 속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은사들을 실행하는 데도 불구하고 은혜의 작용은 전혀 없을 수 있습니다. ‘은사’란 우리가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수완이나 기능들을 영적인 용도에 맞게 활용하게 하는 무엇입니다.
예를 들어, 영적인 일들을 표현한 아주 ‘긴 기도문’을 읽어 내려가면서도 그 마음에 영적인 생각들은 전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마땅히 작용하여야 할 마음의 작용은 배제시키면서 그저 읽혀지는 문장의 철자에 생각을 집중하고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목적을 위해 은사의 기능을 활용하면서도 정작 마음에는 영적인 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작용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수행하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데, 이것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영혼까지 속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일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자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영적인 은사를 받은 자들의 경우라면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기도라는 의무를 감당하면서 자신의 은사들을 활용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외적인 은사의 기능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우리 마음에 있는 생명의 샘 원리에서 자연스레 솟아 나온 것인지.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련되어 보이는 외식자들이 경건의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과 다른 이들을 기만하는 방식만큼 간교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기도의 은사들을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웁니다. 기도의 의무를 매일 감당하는 아주 훌륭한 신자들로 여겨지는 이들이라도 자신이 감당하는 기도의 의무가 그러한 외식의 악에 빠져들게 하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 문제에 대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신자들이라도 단지 은사의 기능만을 활용하는 것에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불붙는 믿음’과 ‘지속적이며 견고한 믿음’이 얼핏 비슷해 보이는 것처럼, ‘은사의 기능’과 ‘은혜의 작용’도 외적인 모습만으로는 구분해내기 어렵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특별한 빛과 인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복된 인도하심이 있다면, 우리가 감당하는 모든 의무가 진정한 믿음에서 나온 것인지, 또 그 속에 은혜의 작용이 있는지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공정하고 냉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의무들을 감당할 때 우리의 마음을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행하는 의무의 원리와 목적과 의도, 그 모든 활동들을 부지런히 살피면서 매일 우리 영혼 전체를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창고에 가득히 쌓아 놓았던 것이 금과 은이 아닌 구리와 납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을 가득 쌓아 놓고 자신이 부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큰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행했던 모든 영적 의무들을 저울과 시금석으로 달아 볼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거룩한 의무들을 감당하면서 스스로를 검증하고 시험해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드리고 있는 ‘간절한 기도’가 정말 바른 것인지를 부지런히 살펴보십시오. 포도주같이 흘러나왔던 우리의 기도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엄격하게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영적인 마음과 생각 없이 영적인 의무들을 외적으로 감당하는 헛된 수고를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