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고 소망으로 산다 (강의안)
자유주의 교회에서 힘을 얻고 있는 믿음에 대한 개념은 이와 매우 다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따르면, 믿음은 본질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 것과 같다. 최소한 인생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서 사람의 행복을 얻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우리 자신의 순종을 통해 구원을 얻겠다고 생각한다는 뜻일 뿐이다. 이것은 율법주의를 승화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우리의 순종이 소망의 근거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의 모든 성취가 포기되고 중세 종교로의 회귀가 일어났다. 16세기 초에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일으켰고, 그는 갈라디아서를 자신의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가 재발견되었다. 우리의 모든 복음적 자유가 그 재발견에 근거하고 있다. 루터와 칼빈에 의해 갈라디아서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이 되었다. 그러나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갈라디아서에 대한 그 이전의 해석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은 개혁자들과 반대되는 해석이다. 바울이 일차적 관심사는 정신적 종교를 위해 예식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위해 인간의 공로를 반대하는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다. 그 결과는 노예 상태다. 율법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는 비참한 속박이다. 해방을 의미하는 “자유주의”라는 단어가 실제로는 비참한 노예 상태라는 사실이 첫눈에도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 현상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복된 뜻으로부터 벗어나면 언제나 더 나쁜 어떤 주인의 속박 아래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유주의 교회에 대해서, 바울 당시의 예루살렘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다시 그리스도 복음의 자유로 회복시키시기를!
복음의 자유는 하나님의 선물에 근거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선물로부터 시작한다. 이 선물에 따라오는 것이 칭의 곧 죄책의 제거,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바른 관계의 회복, 그리고 중생 혹은 신생, 곧 기독교인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귀한 교리에 대한 한 가지 그럴듯한 반대가 있으므로, 그에 대한 대답으로 기독교의 구원의 길을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새 창조라는 교리에 대한 그럴듯한 반대는 이 교리가 관찰된 사실과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정말로 새로운 피조물인가? 그렇지 않아 보이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을 주목해 보아도 그럴듯한 변화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은 동일하게 연약해 보이며, 불행하게도 때로 동일한 죄를 범한다. 새 창조는 그리 완전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 새 창조를 보면서 처음 창조에서처럼 보기에 매우 좋았다고 말할 것 같지 않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반박이다. 그러나 바울은 새 창조를 그렇게도 과감하게 선언한 구절에서 놀라운 말로 이 반박에 답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것은 새 창조의 교리다. 그리고는 즉시 반발에 답한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이라는 말은 어떤 사실에 대한 인정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육체 가운데 산다는 사실, 곧 이전과 동일한 이 세상의 삶의 상태에 종속되어 지속적으로 죄와 싸운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라고 바울은 말한다(그 반박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보는 것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사는 것이다. 위대한 변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죄는 아직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 삶의 시작은 새로운 출생이지, 완전히 장성한 사람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비록 새 생명이 단번에 완전한 열매를 맺지는 못하지만, 그 열매가 반드시 맺히리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안다. 그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날에 그것을 완성시키리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안다. 그를 사랑하여 그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께서, 그를 버리지 않고 성령을 통해 세워 완전한 사람으로 만드실 것을 그리스도인은 안다. 바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는 말로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순간적인 행동에 의해 시작되지만, 그 이후에는 하나의 과정으로 계속된다. 신학적 언어를 사용해서 말한다면, 칭의와 중생 다음에 성화가 뒤따른다.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이미 현재의 악한 세상에서 해방되었지만, 실질적인 자유에 도달하는 것은 미래의 일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게으름이 아니라 전투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이다(갈5:6). 그가 구원의 수단으로 삼은 믿음은, 야고보서에서 정죄된 것과 같은 믿음이 아니라 역사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행하는 일이 사랑이며, 바울은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갈라디아서의 나머지 부분에서 설명한다. 기독교적인 의미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매우 실천적이고 포괄적인 것이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그러나 믿음이 사랑의 삶을 생산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삶을 만들어 낸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 성령의 역할이 “믿음으로 역사하는 사랑”이라는 말에서 믿음의 역할과 정확하게 똑같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실은 여기에 믿음의 참된 개념이 있다. 참된 믿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한다고 말할 때 (예를 들어, 그것이 산을 옮긴다고 말할 때처럼) 이런 말은 표현의 부족 때문에 사용되는 말일 뿐이다. 믿음이란 일의 정반대다.
믿음은 주지 않고 받는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가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믿음이 사랑을 통해서 역사한다고 말할 때 이것의 참된 의미는 모든 기독교적인 활동에 필요한 근거가 믿음을 통해 죄책의 제거와 새 사람의 출생이라는 방식으로 주어진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 성령이 그리스도인과 함께 또한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거룩한 삶을 이룬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들어와서 사랑을 통해 일하는 힘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에 의해서만 살아지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소망으로 사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쓰라린 전투 한 가운데 있다. 온 피조물이 지금까지 고통 속에서 함께 신음하고 진통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죄의 슬픈 증거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준 소망에 따르면, 최후 승리가 있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의 고투가 끝나면 하늘의 영광이 임할 것이다. 이 소망이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관통한다. 기독교는 이 허망한 세상에 묶여 있지 않고, 영원을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평가한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 대해 자주 이의가 제기된다. 기독교의 “내세성”이 이기심의 한 형태라는 반박이다. 그리스도인이 천국을 바라고 옳은 일을 한다는 비판이다. 오히려 의무감 때문에 소멸의 어둠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는 자들이 더 고귀하지 않은가!
기독교 신앙에서 천국이 단순한 즐거움만을 의미한다면, 이 반박이 어느 정도 무게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천국은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의 그리스도와의 교제다. 우리의 현재의 사랑은 너무나 차갑고, 우리의 현재의 섬김은 너무 미약하다. 그러나 미래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합당한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현재 세상에 대해 불만족하는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지만, 그것은 거룩한 불만이다. 그것은 우리 구주께서 복되다고 선언한 의를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이다. 우리는 감각의 장막에 의해서, 그리고 죄의 장막에 의해서 구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므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주님을 만나려는 열망은 이기심이 아니다. 보지 못했지만 사랑하는 그분을 위한 열망은 이기심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그것은 갈등의 삶이면서 동시에 소망의 삶이다. 영원의 측면에서 이 세상을 보는 삶이다. 이 세상의 유행은 지나가며,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현대 자유주의 교회의 “프로그램”은 이것과 매우 다르다. 그 프로그램에는 하늘을 위한 자리는 거의 없고, 실제로는 이 세상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실제적으로 자유주의 설교자는 내세에 대해 할 말이 거의 없다. 이 세상이 그의 모든 생각의 중심이다. 종교 자체,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이 지구의 상태를 향상시키기 위한 수단이 된다.
참된 종교가 공동체 혹은 국가의 여러 기능 중 하나에 불과해졌다. 그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참된 종교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심지어 빈틈없는 사업가나 정치가들조차도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으나,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필요로 한다. 종교 없이 해보려 했지만 실험은 실패했고, 이제 종교에 도움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는 문제 해결을 위해 종교를 필요로 한다.) 종교가 건강한 사회에 필수적이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공동체를 위해서 교회를 하나 가져야겠다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이런 태도를 어떻게 평가하든지, 기독교가 이런 방식으로 취급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렇게 취급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독교는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되기를 거절해 왔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로 이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밝혔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지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36). 이 엄청난 말의 의미가 무엇이든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이라는 가장 숭고한 관계까지 포함한 다른 모든 관계보다도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들이 기독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기독교가 그런 관계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실제로 세상에서 많은 유용한 것들을 이루겠지만, 그런 유용한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이 볼세비즘과 싸우는 것, 통일된 나라를 이루는 것, 건강한 공동체, 국제평화이든 마찬가지다. 우리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들을 더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면,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의 나라까지 잃을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 설교자는, 과거의 복음주의는 개인들을 구하려 했지만, 새로운 복음주의는 사회라는 유기체 전체를 변화시키려 한다고 말한다(“사회복음”). 과거의 복음주의가 개인적이었다면, 새로운 복음주의는 사회적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회의 주장에 대항해 개인 영혼의 가치를 강조한다. 기독교는 개인에게 요동치며 유행하는 모든 인간적인 견해에서 피할 피난처를 제공하며, 사람이 홀로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갈 수 있는 은밀한 묵상의 장소를 제공한다. 기독교는 필요하다면 세상에 대해서까지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제공한다. 기독교는 인간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회를 이루는 한 요소로 만드는 것을 결연하게 반대한다. 기독교는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취급하는 모든 구원의 수단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개인주의적이고, 사회적이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가 개인주의적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그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사람의 사회적 필요를 충분히 채워 준다.
첫째, 개인이 하나님과 맺는 교제조차도 개인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할 때 혼자가 아니다. 여기서도 자유주의 신학과 기독교 사이의 구분이 가장 심오한 신 개념의 차이로 압축된다. 기독교는 진지하게 유신론적이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고작해야 절반 정도 유신론적이다. 사람이 일단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도달하면, 그에 대한 경배는 이기적인 고립이 아니라 인간의 중심 목적으로 간주된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동료 인간에 대한 봉사를 무시하고 진행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지배적인 교리는 이것과 매우 다르다. 기독교적 믿음에 의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자유주의 교회에 의하면, 이론은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회적 요소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제에서도 발견된다. 기독교적 가르침에 따르면 그런 제도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족이다. 그런데 이 제도가 점점 뒤로 밀리고 있다. 사회와 국가의 과도한 개입에 의해 가족이 점점 배경으로 밀리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생활은 부모의 통제와 영향력을 점점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학교를 선택하는 일이 국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지역 사회”는 레크리에이션과 사교 활동만을 담당한다. 그 결과는 명백하다. 아이들의 삶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 가정의 사랑스러운 분위기 속에 있지 못하고 국가의 공리주의에 포위되리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부흥이 이런 과정을 뒤집으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른 모든 사회 기구에 대해서 가정이 다시 권리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적절한 한계 안으로 축소된다 해도 인간 삶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며, 그런 자리에 있을 때 기독교의 지원을 받을 것이다. 더욱이 이 지원은 기독교 국가인가 아닌가와 무관하다. 바울이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말한 사회는 네로 치하의 로마 제국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국가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현 상태 아래서 정부의 필요를 인정한다.
개인주의와 연관되는 인간 삶의 넓은 측면들에 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의 “내세성”은 이 세상의 전투로부터 후퇴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주님 자신이 그 엄청난 사명을 가지고 삶의 혼잡과 압력 속에서 살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도 세상의 일로부터 후퇴해서 문제를 단순화시키려 하지 말고, 예수의 원칙들을 현대 산업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에 적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복음적 그리스도인이 월요일 아침에 자신의 기독교를 뒤에 남겨 두고 한 주일을 시작한다면, 그는 자신의 고백에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사업과 모든 사회적 관계를 포함한 모든 삶이 사랑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적용된 기독교”에 관한 관심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적용할 기독교”가 없이는 적용된 기독교도 없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이 현대 자유주의와 다른 것이 이 점이다. 자유주의자는 적용된 기독교가 기독교의 모든 것이라고, 기독교는 단지 생활 방식일 뿐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적용된 기독교는 그 이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행동의 결과라고 믿는다.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현재 상태의 인간의 품성이 예수의 원리들에 따르도록 형성될 수 있다고 믿지만,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제도에 의해서는 악이 제어는 되겠지만, 파괴는 되지 못한다고 믿으며, 따라서 새로운 건물을 짓기 전에 사람이라는 재료가 변혁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차이는 특별히 선교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자유주의 신학의 선교사는 기독교 문명의 복들을 전파하려고 노력할 뿐, 개인들을 인도해 이방 신앙을 버리도록 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에 비해 기독교 선교사는, 단지 기독교 문명의 영향으로 만족하는 것은 도움이 아니라 방해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의 사명이 영혼 구원이라고 믿으며, 영혼은 예수의 도덕적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속 사역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선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