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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하권, 28장 반석이냐, 모래냐 (김영희)

강대식 2018. 6. 8. 16:03

28 장    반석이냐, 모래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7:24-27)

 

거짓 그리스도인의 총괄적인 특색을 지금까지 고찰해 보았다. 이제 다음 것, 개별적인 특색을 고찰하기 전에 이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그 사람됨의 지수를 그의 일반적인 심성처럼 잘 표현해 주는 것은 없다. 이것을 무시하고 행동만을 세밀히 주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거짓 신앙고백자의 개별적인 특색은,

첫째,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데 열중한다는 점이다. 자아가 그의 생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자아가 그의 사고방식과 행동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 그는 위로나 그만의 이익을 구하며, 어떤 종류의 축복을 손에 넣으려고 애를 쓴다. 이 사람은 이것을 입수하는 방법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싶어한다. 이런 유의 동기가 그에게 활기를 띄게 하는 것이다. 성급하게 모래 위에 기초 없이 집을 세우는 사람의 문제점은, 그가 설계를 참고한다든가 건축가에게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설계도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 데 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수고를 하려들지를 않는다. 성경의 문법이나 구조에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가질지는 모르나 성경말씀을 알려는 진정한 관심은 없다. 그는 가르침의 전체를 참으로 보려고 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거짓 신자나 거짓 선지자는 이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둘째,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골라내어, 자기에게 호감이 드는 것에 주의를 집중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교리는 좋아하지만 하나님의 공의의 교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읽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낸 얼마의 위대한 구절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외울 수도 있다. 그는 자기 마음의 위로와 기쁨과 평안한 느낌을 주는 것이면 무엇에나 관심을 가진다. 금세기 초에 이와 같은 일이 있어 바울 서신을 읽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복음서만 읽었지만 복음서까지도 다 읽지 않았다. 기분에 거슬리는 곳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산상 설교뿐인데 여기서도 팔복의 말씀은 읽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라---’만 읽었다. 자기네는 유화주의자요, 이상주의자라고 했다. 이것이 전형적인 거짓 신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신이 검토를 받는 식으로 읽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경을 바로 읽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성경말씀 전체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긍휼을 믿는 만큼 하나님의 의를 가까이 하고 있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거짓 신자의 특색은 그가 조금도 그것들과 대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특색은, 그가 죄의 본성과 죄의 결과를 하나님의 성결하신 빛에 비추어 철저하고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문제점은 그가 비참한 느낌을 가지고 싶지 않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감과 불쾌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것에 있다. 그가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피하려 하는 것은, 불행하거나 불쾌한 기분이 되는 일이다. 그래서 성구를 뽑아내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죄의 교리가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마음의 평온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성경의 죄론을 바로 보지를 않는다.

성경은 무엇보다 우선 죄의 결과에 대한 해설서이며 그 생생한 묘사이다. 성경이 구약의 그 모든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윗의 간음과 살인을 범한 이야기는, 죄의 결과를 우리에게 명심시키고, 또 우리들의 마음속에 이 정도까지 우리들을 넘어뜨리는 힘이 존재해 있고, 모두 나면서부터 거짓되고 더럽고 타락한 상태에 있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거짓 신자는 이것을 싫어하는 나머지 성경이 하나 하나의 죄들을 구별하는 것에 반대한다.

 

셋째, 궁극적으로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원하지만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 그의 진정한 문제점은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의에 관심이 없다. 그는 성결에 관심이 없고, 그리스도를 닮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성급하게 집을 세우려는 사람과 같다. 그래서 안락의자에 앉아 기분 좋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을 자기 나름의 조건으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원하고 있다.

 

-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적극적으로 말하면, 그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를 지혜로운 사람에 비교할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행위에 의한 의인아님은 분명하다. 팔복의 메시지가 이것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팔복의 최초 말씀은 심령이 가난 자는 복이 있나니이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애를 써도 결코 우리 자신을 심령이 가난하게할 수 없다. 그리고 결코 우리 자신을 팔복의 어느 하나에 일치시킬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는 온전하라이것 역시 인간의 힘으로 전연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죄를 짓지 않는 완전주의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거나 혹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산상 설교를 읽고 항상 어디서나 그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실행할 수 있는 사람뿐이라고 말한다. 만일 여기의 가르침이 이런 것이라고 하면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2;26) 이것은 신앙에 대한 완벽한 정의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죽은 믿음이다. 신앙생활은 결코 안이한 생활이 아니다. 신앙은 언제나 실제적이다. ‘주여 주여는 단순히 지적동의이며,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여 주여라고 말한다 해도 주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자진해서 주님의 종이 되지 않는 한 무의미한 것이다.

첫째, 참 믿음은 언제나 그 사람의 생활에서 나타난다. 믿음은 말이나 행동에서는 물론 그 사람 전체에 나타난다. 사람의 외모나 태도가 그의 말과 행동에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심령이 가난하다면, 결코 교만하여 자기만족에 빠진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죄 때문에 애통하며 온유한 사람은, 결코 자기에게 만족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다. ‘주여 주여하면서도 자기 일만 생각하고 언제나 자신으로 만족하며 자신에 넘쳐있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라는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한다.

둘째, 믿음은 전 인격에 나타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움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요일1:6) 이것은 주께서 여기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반복한 것이다. 이것이 신약성경 전체의 메시지이다. 우리는 거룩하게 되기 위해구원받게 된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자신의 것으로 준비시키기 위해 성별하셨다.

 

- ‘지혜로운사람인가 어리석은사람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러분은 이 산상 설교에 반발을 느끼는가?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여러분은 산상 설교가 불가능한 것을 강요한다고 느끼는가? 이것은 항상 거짓 신자의 반응이다. 거짓 신자는 자기검토를 불쾌하게 생각한다. 자기검토가 그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거짓 신자의 특징은 산상 설교를 들어도 모두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잠깐 흥미를 느끼지만 교회 현관에서 한 마디의 대화를 나눈 결과로 사라지고 만다.

또 한 가지의 특징은 그들이 대체로 산상 설교를 칭찬하고 그 교훈을 찬미할지는 몰라도 산상 설교를 실천하지를 않는다.

 

참 신자는 산상 설교의 교훈에 정면으로 대하며 그 전체를 대하는 사람이다. 성경의 모든 구절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기분에 맞는 몇몇 시편을 들고, 수면제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체가 자기를 검토하고 탐사하게끔 한다. 그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12:11)의 의미를 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며 비판 아래 겸손하다. 산상 설교에 대해서 자기를 낮춘 후에 자기를 복종시키며, 심령이 가난하며, 자기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이 되며, 자기가 얼마나 무가치한가를 알기 때문에 온유하게 된다. 산상설교의 생활이 여러분이 진정한 소원이 되고 있는가? 이런 유의 생활방식을 원하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생애의 중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 이 시금석의 본질을 살피라. 그것은 여러분이 죄가 있는가, 완전한가를 묻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분이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를 묻고 있다.

 

참 신자가 율법에 관한 우리 주님의 교훈을 전부 받아들이는 사람임은 물론이다. 그는 다만 간음을 하나의 행위로서 범하지 않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정욕을 품고 여자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행동뿐 아니라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 나는 이처럼 깨끗하게 되고 싶다 라고 말한다. 그는 은밀히 구제하는 것에 대하여 왼손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또한 기도에 대한 교훈과 성한눈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고, 자기 자녀들을 분명코 등한히 하지 않으실 우리 아버지께 모든 것을 일임해야 할 것을 기억한다. 그는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려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야 한다는 교훈을 기억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해야 함을 되새긴다. 그뿐 아니라 그는 그 교훈을 철저하게 실천할 수 없는 자기를 슬퍼한다. 그래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린다. 그것을 얻을 때까지 밀고 나간다. 이것이 행한다는 뜻이다.

 

- 이것이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이다. 그는 성결을 원하고 기도하며, 성결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며, 천국의 기쁨을 지상에서 미리 즐기는 사람, 이것이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이다. 그의 최고 갈망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이 중대하고, 또 펼쳐지는 일이다. 이것이 산상설교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완전히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지만 이것을 목표하고 있다.

 

이런 시금석에 만족하게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은 오직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사람이다. 그 집은 무너질 것이다. 그 때 아무것도 없는 자기를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이 사실을 인정하여 1초라도 지체하지 말고 즉시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 분의 능하신 손 아래서 스스로 낮추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히 여기심에 온 몸을 던지라. 그리스도를 따르라. 그리하면 주께서 참된 여러분을 성결로 인도하실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인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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