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제임스 패커, `청교도 사상`, 10장 청교도의 복음 설교에 대한 견해 (강의안)
제10장 청교도의 복음 설교에 대한 견해
1. 복음 설교의 접근
영혼 구원이라는 과제를 향한 청교도의 접근법은 타락된 인간들 스스로의 힘에 의해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없고, 또한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 복음 전도자들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청교도의 견해는 확실히 성경적이다. 오늘날 복음 전도에 물려받은 관습들을 개혁함에 있어 큰 중요성을 갖고 있다. 첫째로 청교도의 견해는 ‘결단’을 촉진시키기 위해 심리적 압박을 사용하는 모든 책략들은 사실상 성령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주제넘는 시도이므로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한 책략의 사용은 결국 복음 전도의 가치를 떨어뜨릴 것이다. 솜씨있게 사용된 심리적 압박은 외적 형태의 ‘결단’을 일으킬 수 있을지 모르나 중생과 심령의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단들’이 점차 희미하게 될 때 그 결단을 한 자들은 복음에 냉담하여지고 적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강제적 전술들은 사람들의 영혼에 손상, 아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손상을 줄 뿐이다. 그러므로 고속도의 복음 전도는 건전한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이 성립된다. 복음 전도는 오히려 끈기있는 교육과 교훈의 장기간에 걸친 사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 메시지를 삶에 적용함에 있어 신실하기 위해서만 애쓰고, 이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방법으로 또한 자신의 속도로 인간들을 믿음으로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께 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더 나아간 질문을 제기한다. 즉 그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두 가지 요인이 이 질문에 직면케 해준다.
첫째 요인은 기독교 진리를 교육하는 과제에 대해 극소화된 접근법이다. 신교 성직자들에게 매우 넓게 영향을 주어온 요인이다. 현대의 목회자는 대개 얼마나 많이 내가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얼마나 적게 가르쳐야 하는가? 가르쳐야 할 최소한의 교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가르쳐야 할 최소한의 교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그 이유는 신도들의 배우기 싫어함 때문이다. 3세기 전에 박스터는 키더민스터의 노동자 계급의 회중 가운데에서 이 사실을 직면하여 다음과 같이 사정없이 몰아세웠다.
만일 당신들이 하나님의 지식과 하늘의 일들을 직장에서 일하는 법을 알려고 하는 것처럼만 자발적으로 얻고자 한다면 당신들은 오늘이 가기 전에 그 일에 스스로 착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자신의 직업을 배우는 데는 칠 년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일들을 부지런히 배우는 데에는 칠일 중의 하루도 드리지 않는다
박스터는 이 불경한 게으름에 비위를 맞춰주지 않았다. 그런데 현대의 목회자는 자주 비위를 맞춰준다. 그리고 성경 진리의 어떤 면이 자기 신도들의 즉각적인 흥미나 찬동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할 때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버려 버린다. 오늘날의 경향이 그것을 격려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확신을 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곧 현대의 청중들에게 율법과 죄를 설교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현대의 청중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그들이 이미 느끼고 있는 필요성들에 의지해서 호소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단순하게 노이로제를 갖고 있는 자들과 좌절된 자들에게 평안과 능력과 목적을 주시는 분- 사실상 특등 정신과 의사로 제시해야 한다고 제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제의가 극소화된 접근법의 위험을 훌륭하게 예증해준다. 만일 우리가 죄와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죄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해 주시는 구주로 제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실제에 있어 거짓 증거를 하고, 거짓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도는 어떤 사람들의 허영심을 만족시켜줄지 모르나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극소화된 접근법은 우리로 구원에 대한 반쪽 진리들을 취급하게 한다. 그리고 전체의 진리처럼 제시된 반쪽 진리는 완전한 비진리이다. 극소화된 접근법은 복음의 본질인 교리적 요소들을 빼버림으로 복음을 위조할 위험이 있다.
둘째 요인은 개혁 신앙의 복음 전도적 함축 의미들에 대한 만연된 의심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소위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강조점들”에 제시된 은혜 교리가 성경의 취지에 입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근거하여 어떻게 복음적으로 전도해야 하는가는 알지 못한다. 만일 완전 부패, 무조건 선택 그리고 효과적인 부르심이 정확하다면 - 즉 죄인들이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없고 믿음과 회개가 오직 택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은혜들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회개하고 믿으라고 명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나타내는 것일까? 만일 특별 대속의 교리가 정확하다면- 즉 만일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한 자들만을 위한 구원을 얻기 위해 죽으셨다면- 우리는 희심하지 않은 자에게 절대로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하여 그에게 구주를 의지하라고 전할 수 있는가? 이 의문들에 의해 당황한 사람들은 알미니안주의자들 같이 전도를 하거나- 즉 개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마치 그들 자신의 능력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하기를 단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하거나- 아니면 전혀 복음적으로 전도하지 않거나 하는 선택에 몰렸다고 느낀다. 만일 현재의 개혁 신학으로의 복귀가 마땅히 복음 전도에 활기를 주는 대신 복음을 질식시키는 결과가 된다면 비통할 일이다. 지도를 받기 위해 청교도들께로 돌아가야 한다.
2. 복음의 포괄성
첫째, 복음의 포괄성을 청교도들이 이해했다는 것을 주목하라. ‘복음’은 은혜의 언약 교리 전체를 의미했다. 구속의 섭리 전체, 삼위일체의 삼위 모두의 구원의 역사나 다름이 없었다.
토마스 맨턴의 말이다.
복음의 요약은 이것이다. 즉 참된 회개와 믿음에 의해 육체와 세상과 마귀를 버리고 자신의 창조자, 대속자, 성화자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모든 사람은 그들을 자신의 화목된 자녀로 생각하시고 그리스도를 위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신의 성령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은혜를 주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이 과정을 인내하면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그들을 영화롭게 하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실 것이나 회개하지 않은 불경건한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벌로 정죄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요약이라는 것은 마가복음 16:15-16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는 말씀에 의해 나타났다.
청교도들은 만일 우리의 전도가 이보다 적은 내용을 담고 있다면 우리가 복음 전도가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박스터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확실한 회심에 있어 근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지식이 복음의 전도에서도 본유의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 지식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복음의 설교들’을 하는 것이 단지 신학적 공백에 끼워 넣어진 몇 가지 큰 진리들- 범죄와 속죄와 용서- 을 되풀이하여 귀찮게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하는 우리 현대적 사상에 이 지식이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청교도의 ‘복음의 설교’를 하는 것에 대한 견해는 기독교 체계 전체- 하나님의 특성, 삼위일체, 구원의 계획, 은혜사역 전체- 를 교육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평소에는 다른 것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전도를 하는 경우에만 한정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성경을 성경적으로 전한다면 언제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볼턴이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설교는 함축적으로 복음 전도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 사실들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계시된 진리는 하나의 구조를 갖고 있으며 이 구조가 이 출발의 기초이다. 바울은 이교도 아덴인들에게 설교할 때 발전시켜 나아가기에 앞서 이 기초를 제시했다. 죄와 구원에 대한 지식은 창조주에 대한 어떤 지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박스터가 구원을 찾는 영혼에게 맨 첫째로 하나님의 본성과 위엄에 마음을 집중시키라고 명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3. 복음의 강조점
1) 청교도들은 인간의 참상을 단지 죄에 대한 의식일 뿐만 아니라 죄의 오염과 죄에 대한 속박으로까지 진단했다. 그들은 죄악들의 아래에 있는 죄악성을 드러내어 인간들에게 자신의 철저한 부패와 무능을 납득시켜 하나님 앞에서 그들 자신을 개선하고자 추구했다. 그들은 이것이 복음 전도자의 사역에 있어 극히 중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2) 그들은 죄의 결과를 하나님의 미래 심판 뿐만 아니라 현재의 적개심에 의해 의해 분석했다.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 있는 지금 당장이 견딜 수 없는 것임을 느끼게 하였다.
3) 그들은 은혜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이며 우리의 구원은 이 목적의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4) 그들은 그리스도의 충분성을 강조했다. 살아계신 구속자를 신뢰하라고 가르쳤다.
5) 그들은 그리스도의 겸손을 강조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버리신 그 큰 영광을 강조함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찬미했다.
4. 복음의 요구
그들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말했다. 믿음은 복음을 신령한 진리로 동의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신령한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동의를 의미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중보적 직분 전체 곧 구주와 주님으로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으로 영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죄를 덜어주시는 구주로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영원히 섬기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남편과 주인으로 그리고 자신의 죄를 씻기시는 제사장으로만이 아니라 자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를 다스리실 왕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전혀 그리스도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토마스 쉐퍼드).
5. 은혜의 복음
청교도들은 값없이 주시는 주권적 은혜의 복음을 전파했다. ‘인간들의 회심과 구원에 대한 갈망’에 의해 동기를 부여 받았다. 그러나 이 동기보다 훨씬 더 큰 두 가지 다른 동기들이 또한 그들을 압박하였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를 찬양하고자 하는 이중의 열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