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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 30장 결론 (김영희)

강대식 2018. 6. 20. 10:51

30 장   결론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7:28-29)

 

- 이 두 절은 결코 쓸데없고 무익한 결언이 아니다. 이 두 절은 산상 설교를 고찰하는데 매우 중요한 성구이다. 여기서 산상 설교 자체보다도 설교한 분에게 주의를 돌리고 있다. 산상 설교를 고찰하고 나서 우리는 설교하신 분을 바라보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특히 마지막 몇 장에서는 주님이 청중에게 말씀하신 절박한 호소의 말씀을 고찰해오고 있다. 주님은 자기기만에 대해서 엄하게 경고하셨으며, 이 설교를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밖에 있다는 것과, 머지않아 심판 날이 올 때 우리가 의뢰하여 온 것이 돌연 사라져 버릴 것을 경고하셨다.

- 우리들은 어째서 산상 설교를 실천해야 하는가? 어째서 이 무서운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 마지막 두 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산상 설교를 고찰할 때 우리는 도덕적, 윤리적, 영적 가르침에 멈추어서는 안 되며, 이것을 넘어 말씀하신 분에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산상 설교의 권위는 궁극적으로 말씀하신 그 분에게서 온 것이라는 점이다. 교사이신 그분이 그의 가르친 내용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산상 설교의 권위요, 이것이 이 설교 배후에 있는 보증인 것이다. 만일 주님의 신성과 여기서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의심한다면 이 설교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밑에서부터 위험을 받게 된다. 이 교훈 전체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으로 알고 진실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산상 설교의 모든 표현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 보증은 여기서 찾아야 한다. 권위와 보증은 화자로부터, 복되신 주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설교에서 자신에게 주님은 이 주의를 환기하고 계신다. 주님은 우리들의 주의를 주님 자신에게 모으시기 위한 시금석을 반복해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복음으로 통하는 것 가운데 참 복음과 다른 것이 많은 것은 이 점에서이다. 이것이 산상 설교에서 풍부하게 예증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교리를 희생하고, 신학을 희생해서 산상 설교의 교훈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데 있다. 산상 설교를 실제적이며 사회 질서의 기반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교훈과 서신들의 교리와 대립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산상 설교를 바르게 읽은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이다. 산상설교는 이미 거듭 살펴본 대로 일종의 기초적 진술인 것이며, 다른 것은 모두 여기서 나온다. 산상 설교는 교리로 가득차 있다.

 

- 이 두 구절에서 주를 눈앞에 보면서 그 설교에 귀를 기울일 크고 높은 특권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경악 그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 큰 무리가 모여 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 앉아 있던 이 젊은 분은 갈릴리 나사렛이라 하는 작은 동네 출신의 목수로서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고 바리새파 사람도 율법학자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들이 대경실색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무엇이 그들을 놀라게 했는가?

첫째, 주님이 말씀하실 때의 권위이다. 주님의 가르치신 방법은 율법학자와 같지 않았다. 율법학자들은 율법 그 자체의 전문가라기보다 율법의 해설과 해석의 전문가였다. 그들은 한 권위자는 이렇게 말했고 다른 권위자는 저렇게 말했다고 해석이 제시된다. 그들은 끝없는 인용을 하면서 자기의 학식을 크게 자랑했다.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내용은 물론 그 방법도 독창적이었던 것이다. 가장 놀라운 일은 주님이 말씀하실 때의 그 확신과 확실함이었다. 주님은 맨 처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가정이나 가능성만이 아니다. 이 놀라운 확신과 권위는 이처럼 맨 처음부터 나타나 있다.

 

또 그 이상으로 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 내용, 특히 자기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이다. 주님은 자신의 교훈에 그리고 자신의 교훈에 대한 자기의 태도에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신다. 5장에서 주님이 엣 사람들에게 말한 바---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를 얼마나 많이 말씀하셨는가를 보라. 주님은 바리새인과 그들의 권위자들의 교훈을 정정하시는 일을 서슴치 않으셨다. 학교도 가보지 못한 목수가 내가 이르노니란 말을 하다니! 주님은 이렇게 자신과 자기의 교훈에 대한 권위를 주장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율법의 오직 한 분 참된 해석자로서 그들 앞에 계신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율법의 수여자로 보시며, 그렇게 말씀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산상 설교의 끝에 이것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이라고 말씀하시며 중요성을 덧붙이고 계신다. 주님은 이미 심판에 대해서 말씀을 끝내고, 모든 것을 나의 이 말 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하셨다.

 

주님은 자신을 간접적으로만 언급하신 것이 아니다. 이 산상 설교에서 직접 자신을 언급하신 성구를 본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5:11) 이 교훈 때문에’,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로 말미암아 라고 하셨다. 주님은 우리가 주를 위해 고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핍박을 참을 것과 주를 위해 죽을 준비마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같은 엄청난 주장이 시작부터 나온다.

 

다음으로 바로 뒤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말씀으로 같은 일을 하고 계신다. 핍박받는 그들은 이렇게 해서 매우 독특한 백성이 되며, 주에 대한 관계 때문에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중생의 교리이다. 그들은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전하는 사람들만이 아닌 그들은 소금과 빛이 되고 있다. 여기서 주와 주의 백성과의 신비적인 연합의 교리를 본다. 그러므로 주님이 세상의 빛인 것같이 이제 그들이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주님은 메시아이심을 주장하셨던 것이다.

 

우리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5:17) 주님은 나는 왔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영원으로부터, 하늘로부터 오셨다. 주님은 아버지의 품에서 오셨다. 율법과 선지자는 주님이 오실 것을 예언했다. 이것은 성육신을 지적한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더 나아가 주님은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고 지키기 위해서 오셨고, 동시에 주님은 메시야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으나 구약성경의 어느 한 사람도 율법대로 지킨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죄가 없고 절대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율법을 실행함으로써 그것을 성취하셨고, 자신의 생애에서 절대 완전하심으로 율법을 존중하신 분이 있다. 주님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율법을 성취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내가 메시야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이렇게 요약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이분 안에서 성취되었다. 사람들이 산상 설교에는 교리가 없다든가 신학적이 아니기 때문에 좋다고 말하는 이 설교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리스도의 인격, 그의 죽음의 교리가 모두 여기에 있다.

 

또 하나의 성구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7:21) 주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라 부르리라고 말씀하심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가 아니라 에게 말할 것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주님은 성경에서 영원하시고 절대하시고 찬양받으실 하나님께 사용되는 최고의 칭호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신다.

 

더 나가서 산상 설교 마지막에서 머지않아 자신이 세상의 심판주가 되실 것을 선언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라고 하리라 이 말씀이 반복된 것을 주목하라.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산에 앉아서 가르치신 분이야말로 마지막 날에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분이다. 세계 모든 민족이 이 분 앞에 나올 것이며, 이 분이 그들에게 심판을 선포할 것이다. 이보다 더 놀랍고 경악스런 말이 또 있겠는가?

 

- 이 모든 것에 대해 여러분의 반응은 어떠한가?

이 무리들이 그 가르침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러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이 그 이상 나아갔다고는 하지 않고 있다. 산상 설교를 듣고도 놀라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 있는 우리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없기를 기도한다.

우리들의 반응은 놀라는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바로 그 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유한한 세상에 들어오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들은 한낱 철학이나 인생관에는 관심이 없으며, 말씀하시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 주님은 어째서 오셨으며, 어째서 이 설교를 하셨는가?

산상 설교에서 주님은 구원 문제에 있어 인간의 노력이나 생래적 능력을 신뢰하는 것을 모두 단번에 영원히 정죄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눈에 저주받은 죄인들이며 우리들 자신을 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더 나아가 우리들은 모두 새로 태어나야 하며, 새 성품, 새 생명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이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과 맺어짐으로 땅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다. 산상 설교는 성령을 받은 백성의 묘사이다. 생래적 인간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새롭게 하려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팔복은 산상 설교를 실천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가 없다거나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다음에 일치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3:9, 5:18)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고 싶어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스도인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음과 그가 산상 설교에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시며’(8:29) ‘최후의 아담’(고전15:45)이시다. 주님은 하나님의 새 사람이시며 주께 속한 사람은 모두 주와 같은 사람이 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이 분에 속해 있음을 알고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 때문이다.

주님은 지금 우리들을 다루고 계시며 주의 영이 우리들 안에서 역사하시며 우리의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이시며 간절함과 열망을 우리 속에 만들어 주심을 우리는 의식하고 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 시련과 문제와 시험에 가득찬 이생에서, 죽음과 최후의 심판이라는 확실한 사실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바울과 함께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라고 말할 수가 있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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