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로이드 존스, `요한목음 3장 강해`, 3장 새 출생의 특징 (김영희)

강대식 2018. 6. 20. 11:01

3 장   새 출생의 특징

 

 

바람이 임의로 불매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3:8)

 

거듭남은 생명이 다시 생기는 발생이며, 생명이 생기는 것이다. 새 창조이다.(고후5:17) 또한 새로운 마음, 깨끗한 마음이 생기는 일로도 표현한다.(벧후1:4, 1:8) 우리 본성과 마음에 뿌려진 씨, 새롭고 신성한 생명의 씨가 우리 속에 거하고 머문다고 말한다.(요일3:9) 바울은 이 일을 부활에 비견하여 묘사하기도 한다.(2:1, 6:5)

 

우리는 오직 새 출생으로만 그리스도인이 된다. 이미 독실했고, 이미 도덕적이었으며, 이미 유능했고, 이미 성경에 정통했던 니고데모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다. “더 높은 경지의 체험을 하고 싶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싶다라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이 질문부터 던져야 한다. 거듭났는가?

 

-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자연스러운 출생과정은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중생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 범위 밖에 있다. 바람 지체는 보이지 않지만 바람의 작용은 보이는 것이다. 새 출생도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생명이 나타나느냐 하는 것이다. 새 출생은 빨리 이루어질 수도 있고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고통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생명의 일반적인 특징이 중요하다.

첫 번째 특징은 한 가족으로서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 부모 밑에 태어난 가족은 많은 면에서 크게 다르면서도 일반적으로 유사성이 있다는 것, 남이 알아볼 만한 공통요소를 지녔다. 그리스도의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들 속에는 신성한 생명의 씨가 있기에 반드시 그 생명이 주요한 특징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바울은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차이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주장한다. 한 가족의 유사성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것으로 거의 모든 행동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

 

설교나 교회 일이나 성경에 관심을 갖는다고 곧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다.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말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성경 강해자나 교사라고 할 수 있지만, 행동을 보면 영적인 특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자들이 있다. 문자는 전달되는데 성령이 전달되지 않고 그 속에 메시지가 없다. 아주 매력적이기는 한데 그가 말하는 내용보다 말하는 태도와 행동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통 신앙을 옹호하지만 정신은 세속적인 경우가 있다.

 

두 번째, 새 출생을 검증하는 아주 귀한 철저한 시금석은 성령의 다루심을 스스로 인식하느냐 하는 것이다. 거듭난 자는 누군가 자신의 삶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개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0-12) 그는 지금 소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나를 붙잡아 주셨다 그래서 나도 그를 붙잡고자 그가 내게 주신 것과 내게 해주신 일을 붙잡고자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답해야 할 문제이다. 스스로 책임지고 살아가든지, 계속 간섭받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다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식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그 다루심에 맞서 싸울 수도 있고, 그 다루심을 싫어할 수도 있다. 요점은 오 사랑이 날 내버려 두질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일어나는 일로서 절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찌 된 일인지 복음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이들조차 이 점을 잊은 채, 인간과 인간의 결단을 강조하고 있다.

 

세 번째, 더 중요한 시금석으로 겸손해지지 않으면 거듭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니고데모를 겸손히 낮추셨다. 니고데모는 겸손해졌다. 새로워지고 거듭나는 것 외에 아무 대책이 없는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지금 죽어 있기에 중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독실한 종교인이 무엇보다 싫어하는 두 가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중생이다. 그들은 말한다. “하나님이 값 주고 사야 할 만큼 내가 비참하고 소망 없고 악한 존재라고? 이건 모욕이야!” 이처럼 중생의 교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자신이 기독교를 붙잡았다고 생각하는 자와 기독교에 붙잡힌 자의 가장 큰 차이점이 이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붙잡힌 자는 항상 겸손하다.

 

겸손해진다는 것은 어떤 일이 있을 때 가끔 느끼는 두려움이 아니다. 거듭난 자는 어떤 의미에서든 자신이 완전히 쓰러져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은 그대로 땅에 쓰러져 엎어졌다. 누구나 영적으로 죽어야 하고, 자아의 죽음을 겪어야 한다. 완전히 쓰러져 끝장이 나야 한다.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듭날 수 없다.

 

거듭난 자는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항상 겸손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다 잃고 말았다. 구약성경은 경외감으로 가득 차 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보라.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는 것이었다.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을 때 화로다 나여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에 신성한 생명을 심어 주실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과거 성도들의 생애를 읽어 보아도 겸손이 항상 그들의 특징이었다. 이처럼 겸손은 거듭난 자에게 항상 나타나는 특징이다.

 

네 번째, 거듭난 자는 항상 진짜 회개를 한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7: ) 이것이 진짜 회개이다. 거듭난 자는 단순히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근심하는 것이 아닌 이 경건한 근심때문에 참으로 회개하게 되어 있다. 거듭난 자의 근심은 자기의 마음의 악과 죄를 발견한데서 비롯된 근심이다. 그들은 사도 바울처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안다고 고백한다.(7:18)

 

분명히 할 점은 강렬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의 강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다만 자기 마음의 악함을 발견치 못한 사람은 여전히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새롭고 깨끗한 마음이 없는 것이라는 점, 거듭나지 못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싶다. 거듭난 자들은 다윗처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라고 간구한다. 이것이 진짜 회개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중생해야 하는 이유, 중생 외에 다른 대책이 없는, 중생이 참으로 귀중한 이유를 아는 사람들이다.

 

좀 더 일반적인 특징으로 다섯 번째, 거듭난 자에게는 항상 기본적으로 진지한 태도가 있다. 거듭난 자는 절대 경솔하거나 경박하거나 피상적이지 않다. 참 그리스도인에게는 신앙적인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풍겨난다. 그렇다고 젠체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행복하다. 유머가 있다. 그러나 지나치지 않는다. 그들의 유머는 그 속에 있는 생명의 표출이요 새 출생으로 얻는 속성의 표현이다. 그들에게는 항상 통제력이 있고 진지함이 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답다는 것이다.

 

복되신 주님은 분명히 기쁨을 발산하셨고, 유머의 흔적도 여기저기 확실히 나타난다. 주님께는 엄숙하거나 젠체하거나 칙칙하거나 따분한 데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간고를 많아 겪었으며 질고를 아셨다. 이 세상처럼 죄와 악이 가득한 곳에서 온전히 거룩하게 사셨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필히 이런 요소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매력적인 인물을 떠올릴 수 있는가? 그가 따분하고 젠체했던 사람으로 보이는가? 그에게는 따뜻함과 사랑스러움과 다정함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기본적으로 진지했다. 거듭난 자는 그럴 수밖에 없다. 죄와 악을 알기에 거듭나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세상과 세상의 모든 문제를 알기에 장차 임할 일을 알기에 기본적으로 진지하지 않을 수 없다. 기쁨과 진지함은 모순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 또한 거룩하며 순결하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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