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요한복음 3장강해`, 6장 그리스도인과 세상 (김영희)
제 6 장 그리스도인과 세상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열두 번째, 새 생명의 결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을 간파하기 시작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거듭나지 못한 자는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거듭나서 영적인 통찰력과 지각을 얻은 자만 성경이 말하는 ‘세상’을 인지한다.
세상이란 하나님 없이 삶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 전체를 가리킨다. 하나님 없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거기에는 선한 것도 포함될 수 있고 독실한 것도 포함될 수 있다. 그들은 철저히 인간의 사고, 인간의 철학, 인간의 지각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이지 않은 것과 영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이처럼 ‘세상’은 매우 포괄적인 말이다. 세상의 정신, 세상의 시각, 세속성은 전적으로 마귀의 영향을 받아 생긴다. 마귀는 그리스도를 떠나게만 할 수 있다면 광명의 천사로까지 가장한다.
단순히 선량하고 도덕적이고 독실한 종교인은 자신이 세상과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거듭난 새사람은 그 모든 사실에 눈을 뜬다. 세상의 실상을 보기 시작하고,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 이 말은 더 이상 겉모습에 현혹되거나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새로운 눈이 생긴 그리스도인은 전에 굉장하게 여기던 모든 것이 허영에 불과함을 본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성경이 말하는 ‘세상’과 세속성을 ‘허영의 시장’으로 묘사했다.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전부 사라져 버릴 허울이요 겉치레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세상의 실상을 보기 시작한다. 그 결과 세상에 흥미를 잃는 것이다. 세상에 흥미를 잃는다는 것은 세상의 유혹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전과 달리 세상에 흥미를 잃는다는 것이다.
거듭난 자는 실제로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 억지로 애쓸 필요가 없다. 새롭게 생긴 원리가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 결국 예외 없이 세상을 미워하게 되고, 그러면서 은혜에서 자라가기 시작한다. 물리적인 세상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표방하는 바를 미워하는 것이며, 죄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세상을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악의 세력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영혼의 유익을 가로막기에 미워한다.
열세 번째, 거듭난 자는 세상의 모든 실상을 보고 느낄 뿐 아니라 자신이 그 세상에서 건짐 받았다는 사실을 안다. 거듭난 자는 여전히 세상 속에 있지만, 더 이상 세상에 속해 있지 않는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2-13)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 그들은 이 사실을 마음 깊은 곳, 존재의 심연에서부터 안다. 전에는 세상에 붙잡혀 지배를 받아 그 자체가 자신의 인생이요 전부였지만 이제는 완전히 벗어났다. 여러분은 이렇게 건짐받은 것을 인식하고 있는가? 이것이 시금석이다.
그리스도인도 죄를 짓고 타락할 수 있다. 단순히 행동의 차원에서만 보면 독실한 세상 사람이 훨씬 더 낫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행동의 관점이 아니라 기본적인 관계의 관점, 기본적으로 성령이 그 안에 계시느냐 하는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 성도는 타락할 때 항상 비참함을 느낀다. 성도는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안다. 성도는 죄를 지을 때 자신이 율법이 아닌 아버지의 사랑을 거스른 것을 안다. 종교인은 잘못을 범할 때 율법을 어긴 것 때문에 근심한다. 항상 법적인 차원에서 생각한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죄는 기계적으로 법을 어기는 문제가 아니라 관계를 깨뜨리는 문제이다. 또한 선량하고 도덕적이고 독실한 종교인은 죄를 짓고 후회하지만 회개는 할 줄 모른다. 회개에는 감정과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수반된다. 성도는 자신이 사랑하는 분,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분께 상처를 입힌 것을 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고 슬프고 무너진다. 이것이 회개이다. 오직 거듭난 성도만 이런 회개가 무엇인지 안다. 거듭나면 기존에 세상과 맺었던 관계가 속에서부터 바뀐다. 물론 행동의 영역에 그 변화가 나타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 있으나, 중요한 점은 자신이 더 이상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음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열네 번째, 거듭난 자는 세상을 미워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의 삶도 미워한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한다는 말은 세상의 인생관, 세상의 삶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생명을 잃어버린다. 반면에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할 것이다. 이것이 자아를 미워하고 세상의 삶을 미워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거듭난 자는 어느 때든 로마서 7장의 경험을 거치게 되어 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라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7-24) 거듭난 자는 자기 실상을 보고 미워한다.
거듭난 자에게는 일종의 거룩한 초조함이 있다. 그러나 독실한 종교인은 항상 자신에게 만족한다. 남들은 교회 가지 않고, 독실치 못한 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자신은 독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나면 그런 태도와 영원히 작별하게 된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15:10)이라는 바울의 말이 참으로 사실임을 알고 그렇게 고백하게 된다. 우리 자신이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거듭난 성도는 자기 감정조차 신뢰할 수 없음을 안다. 오직 예수의 이름에만 기댄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다.
“오 예수 그리스도여, 내 안에서 점점 더 커지사
다른 것은 다 물러가게 하소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자신을 살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