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제임스 패커, `청교도 사상`, 14장 청교도와 주님의 날
제14장 청교도와 주님의 날
3. 청교도 교육
1) 제4계명의 의미(출20:8-11)
이 점에 있어 청교도들은 개혁자들보다 앞선다. 개혁자들은 주일이 어떤 의미에 있어 안식일이라는 것을 거부한 어거스틴과 중세기의 가르침을 대체적으로 따랐다. 그들은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규정하는 안식일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은혜와 믿음의 교제 가운데의 ‘안식’을 예시한 유대의 상징적 의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 모형은 폐해졌다. 따라서 레위기의 희생제를 드림을 계속하는 것처럼 안식일을 영존시키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여기에서 칼빈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골2;16)는 말씀에 호소한다. 칼빈은 이 구절을 한 주간의 휴식일을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는 상징적 의미에 덧붙여 하나의 원리를 가르치기도 한다고 인정한다. 즉 그 원리란 공적이며 사적인 예배가 있어야 하며 종과 고용인들을 위한 휴식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십계명의 분명히 도덕적이며 영원히 구속력이 있는 아홉 개의 계명들과 함께 제4계명이 존재한다면 단지 상징적이고 일시적인 성질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실제로 청교도는 체계적으로 예배를 다루는 율법의 첫째 목록에 있어 제4계명이 절대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제1계명은 대상을 확정하고, 제2계명은 방법을, 제3계명은 태도를, 제4계명은 시기를 확정한다.”
청교도는 제7일의 안식이 유대인의 상징 이상임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물이며 도덕률(창조주에 대한 바른 예배를 규정한 첫 번째 석단)의 한 부분이므로 모든 인간에게 영구히 의무지워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그리스도인들이 주간의 첫째 날에 예배를 위해 만났고(행20:7,고전16:2) 그 날을 ‘주의 날’로 지켰다고(계1:10) 말씀하는 것을 우리가 볼 때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만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도의 교훈에 의해, 그리고 아마도 주님의 승천 전 40일 동안의 주님의 명령에 의해 그 후부터 이 날을 제4계명이 규정한 안식일로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날이 된 것이다. 청교도는 옛 창조의 종결을 나타내는 주간의 일곱째 날에서 새창조의 시작을 나타내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첫째 날로의 변경은 제4계명의 말씀에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제4계명의 말씀은 ‘단지 우리가 제7일에 쉬고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정했을 뿐이지 절대로 여섯 날들이 언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를 정하고 있지는 않다.’
2) 제4계명의 특성
매튜 헨리는 막 2:27을 주석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안식일은 거룩하고 신성한 제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식일을 힘드는 고역이 아니라 특권과 유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안식일을 우리에 대한 부과물이 되도록 계획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우리는 안식일을 우리 자신에 대한 부과물이 되게 하지 않아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안식일을 우리에게 유익이 뒤도록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이 유익이 되게 사용해야 한다. 안식일 제도에 있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를 어느 정도 고려하시고 쉴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는 훨씬 더 많은 고려를 하셨다. 안식일은 휴식하는 날이 되었으니 거룩한 일을 하는 날이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이요, 찬양과 감사의 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에 전념하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이 일에 모든 시간을 사용하기 위해 세상일로부터의 안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분의 모든 제도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① 안식일은 지키는 것은 무활동이 아니라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날은 게으름을 위한 날이 아니다. “게으름은 어느 날이나 죄이다. 그러나 주님의 날에는 훨씬 더 죄가 된다.” 우리는 하늘의 소명받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땅의 소명받은 일을 쉬어야 한다.
②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지겨운 부담이 아니라 즐거운 특권이다. 안식일은 금식일이 아니라 축제일이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역사들을 향유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기쁨이 온종일 이 날의 기분이 되어야 한다. 이그나티우스,“주님의 날에 금식하는 것은 그리스를 죽이는 것이다.” 기쁨은 공적 예배의 요지가 되어야 한다. 박스터는 특별히 음울하고 슬픔에 잠긴 예배를 개탄했다.
③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무익한 노동이 아니라 은혜의 수단이다. 에드워즈, “하나님께서는 이 날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특별히 구하기 위해 구별하는 것을 자신의 법령에 의해 우리의 의무로 만드셨다.” 스위노크는 기독교 주일의 은혜를 서정시적으로 수식했다. “오, 정신의 안식처이며 마음의 황홀한 행복이며, 영혼의 위로인 그대에게서 인간들은 복된 구주를 향유한다네!”
④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특권과 은혜의 수단을 남용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을 지킴에도 징벌이 온다. 안식일을 범한 죄로 인하여 개인들과 공동체 모두에 영적 퇴보와 물질적 손실이 온다. 하나님의 선한 은사들을 멸시하고 무시할 수 없다. 토마스 풀러는 찰스 1세와 국회 간의 내란이, 부룩스는 런던의 대화재가 안식일 범함으로 인해 이 국가에 심판으로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3) 주님의 날을 지킴에 대한 실제적 원리들
① 주님의 날을 위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안식일은 “영혼을 위한 장날”이다.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모든 방해물들을 제거해야 한다. 심령을 준비하는 것은 모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주일을 위한 전투의 승패는 토요일 밤에 대개 결정된다. 박스터의 청년 집회는 매주 토요일 저녁 세 시간 동안 함께 안식일을 준비하며 보냈다. 스위노크는 “만일 그대가 토요일 밤에 그대의 심령을 하나님께 맡긴다면 그대는 주일 아침에 그대의 심령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라고 보장한다. 박스터, “주일날 졸지 않도록 제 때에 자라.”
② 공적 예배는 주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주일은 아침과 오후, 또는 저녁의 공적 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안식일의 공적 활동은 적어도 2회 실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찬양하고 기도하고 설교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주일 아침에 제 때에 일어나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준비해야 한다. 청교도 예배는 세 시간 이상이 걸리기도 했다. 박스터의 논평은 교회의 예배는 지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술집이나 연회에서는 지루함이 없이 더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들이 매우 악한 심령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들에게 조언을 한다. “생기와 각성을 주는 진지함을 가지고 쉬운 조리와 다양하고 유익한 문제들로 설교함으로 사람들이 당신에게 전혀 지루함을 갖지 않도록 하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이야기를 쉴새 없이 말하라. 믿음의 특권들과 소망의 기쁨을 그들에게 설명해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전혀 초조하지 않도록 하라.”
③ 주일날 가족은 하나의 신앙 구성 단위로 역할을 해야 한다. 가장은 가정 기도회를 2회 이상 수행해야 하며 가족을 교회에 데리고 가야 하며 나중에 자녀와 종들을 시문하고 문답하여 그들이 설교를 철저하게 터득하였는지 확인해야 한다.
④ 주일에 대한 율법주의와 바래새주의를 피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60번, “안식일은 온종일 거룩한 휴식으로 성별되어야 한다. 이 날은 다른 날에 있어서는 적법한 세상의 일과 오락으로부터도 휴식해야 한다. 그리고 불가피한 일과 자비의 일에 종사하는 정도의 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활동과 사적 활동으로 보내야 한다.”
4. 축복의 날
이 간증은 수석 재판관 매튜 헤일의 “주인이신 주님”중에 있는 것이다.
나는 엄밀하고 근면한 관찰에 의해 주일 의무들을 바르게 지킨 것이 내 나머지 생애의 축복과 언제나 연결되어 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시작한 주간은 나에게 축복과 번영이 되었다. 반대로 내가 주일 의무들을 등한히 하였을 때 그 주간의 나머지 날들은 나의 세상 일에서 실패와 불행이 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경솔하게 또는 분별없이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의 확실한 관찰과 경험 위에서 기록하는 것이다.
토마스 브룩스의 훈계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즉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 중에 경건의 능력과 높은 은혜와 거룩함과 하나님의 교제에 있어 주일을 성별하는 데 엄격하고 진지하고 세심하고 성실한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 나라가 또한 다른 나라에서 경건의 능력이 그처럼 쇠퇴하고 있는 진정한 이유는 안식일이 엄격하고 성실하게 지켜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이 짧은 암시의 말이 하늘의 축복을 받아 우리 모두로 하여금 주님의 날을 보다 더 엄격하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성별하는 데 힘쓰도록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