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존 로빈슨, `신에게 솔직히`, 머리말, 1장 원치 않는 혁명, 신은 존재가 아닌 깊이, 존재 자체

강대식 2018. 7. 4. 17:03

머리말

 

기독교의 전통적 정통사상을 현대어로 바꾸어 놓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만 우리 신앙을 변호한다면 극히 적은 수의 종교적인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더 근본적인 새로운 형식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의 범주- , 초자연적인 것, 종교 자체에 관한 것-를 먼저 녹여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구성하고 있는 전통적인 정통적 초자연주의와 오늘날의 일반 세상이 말하는 것과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그리스도인들 중에도 하늘나라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 자신은 복음을 거부한다고 상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경우, 믿을 수 없는 어떤 특수한 이해 방법을 단지 거부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

 

(형식적으로는 비그리스도인지만 내용적으로는 훨씬 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를 교리 없이 삶을 위한 윤리로만 파악하면 아마도 깐디나 슈바이쳐 같은 이들이 훨씬 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성경은 교리 없는 삶을 말한 적이 없다.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성경의 교리를 이해할 수도 살 수도 없다.)

 

알렉 비들러, “교회 안에서 참되고 깊이 있는 사색과 지적 민감성과 정직을 너무도 억눌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굉장히 크게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옮긴이(현영학)의 말

 

오랜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아직도 불완전하나마 어른이 된 오늘의 인간, 과학과 기술로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실들을 다루게 된 20세기의 인간저 하늘 위에 있는 신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는 신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특히 불트만과 틸리히와 20세기 독일의 순교자이며 신학자인 본회퍼의 사상을 일반에 소개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하늘 위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가 아니라 삶의 깊이와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성서의 신을 다시 찾으려고 한다. 그의 솔직하고도 과감한 태도는 전통적 신학에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 불만을 터뜨릴 방법을 찾지 못해 애쓰며 새로운 모양의 신앙을 모색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이 책은 영문판으로도 전례없이 1963년에 출판되자마자 수십만 권이 팔렸을 뿐 아니라 일본을 포함한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나왔다. 저자 로빈슨 박사는 신약학자로서 여러 권의 저서를 낸 바 있고 캠브리지 대학 강사, 하버드 대학과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초빙교수 등을 거쳐 현재는 런던 남쪽에 있는 울위치 교구의 감독 일을 보고 있다.

 

(교회 안에 있거나 밖에 있으면서 전통적 정통 신앙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끙끙 앓고 있었던 이들에게 구원의 생수 같은 복음일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광명의 천사로 옷을 입은 사탄의 복음이 영으로 거듭나지 못한 이들에겐 훨씬 현실감이 있고 20세기라는 시대 사상에 딱 맞는 해석으로 들릴 것이다. 전통적 기독교 신앙을 버릴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이들에게 이 복음은 너야말로 진짜 그리스도인이야라고 말해준다. 과학과 기술로 무장하여 성숙한 20세기 현대인에게 하늘 위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가 아니라 삶의 깊이와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성서의 신을 다시 찾는다는 말이 얼마나 지적이고 종교적인 만족감을 주겠는가?)

 

 

 

1. 원치 않는 혁명

 

저 위에또는 저 밖에

 

성서는 저 위에있는 어떤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늘이 위에 있고, 지구는 그 밑에 있고, 물은 지구 밑에 있는세 층으로 된 우주를 그려보고 그것을 글자 그대로 믿던 시대도 있었다. 우리는 오래 전에 이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놀랄 만한 (사고방식의) 전위(transposition)를 해 버렸다. 글자 그대로 또는 물리적으로 저 위에있는 어떤 신 대신 영적으로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저 밖에있는 어떤 신으로 우리 마음속의 비품들을 바꾸었다. 물론 글자 그대로 저 밖에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과학에서 일어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소화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최근까지도 신이 외계의 피안어디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우주시대에는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고 본능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진 것을 볼 때, 신이 저 밖에있다고 하는 따위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소박하고도 물질적인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마음 속과 같은) 여인숙이나 우주 전체에 그가 있을 자리라고는 없다. 즉 빈 장소라고는 남은 곳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주시대가 옴으로써 이와 같이 소박한 신의 투영은 이미 파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이 만일 피안에 있다면 실제로는 어떤 것의 피안에도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학의 삼위일체론은 우리 밖에 또 우리와 떨어져 있는 이 신적 존재가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창조의 교리는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이 신이 자기 외에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성서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자기가 창조한 사람들과 만나려 하고, 그들과 계약을 맺고, 그들에게 예언자를 보내, 그리고 때가 찼을 때 그 아들을 통해서 그들을 찾아온다고 하고, 또 충실한 자들을 모으기 위해서 언젠가는 다시 온다고 한다.

 

(로빈슨은 20쪽에서 신약성서 기자들이 저 위에있는 신을 글자 그대로 믿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신약성서 기자들이 벌써 코페르니쿠스 전환을 이룬 사람들이란 말인가? 성서는 그 시대 사람에게 그 시대의 세계관에 입각해서 말씀하신다. 이 시대에 그래서 사고의 전위가 필요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역사적 사실과 개념에 대해서 현대의 과학적 잣대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해서 평가하는 것은 과학과 현대에 대한 과신이고 미신이다. 과학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발전하고 있다. 온 우주를 샅샅이 뒤져도 영적인 것이 보이겠는가? 그리고 모르는 것은 말하지 않고 겨우 아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과학이다. 과학이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고 과학적 지식 가운데 검증되지 않은 가설 위에 세워진 것이 많은지 모른다. 그리고 과학자들 중에 왜 성경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많은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로빈슨은 위험한 가설 위에 서 있다.)

 

지금의 정세에 비추어볼 때, 세 층으로 된 우주관이 붕괴된 이후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도움이 되어온 저 밖에있는 신이라는 개념의 내용 전체가 도움보다도 도리어 방해물이 되고 있는 시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징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옥에 관한 교리도 그 한 예다. 옛날의 체계에서 보면 지옥은 저 밑에있었다. 그러나 한 장소에 국한되어 있는 지옥은 점차로 사람들의 상상력에 호소할 수 없게 되었고, 지옥의 불길을 돋우려고 한 부흥사의 노력도 그 힘을 회복시키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 경우의 비극은 마귀와 그 수종자들, 구렁텅이와 불길의 호수를 저 밖에있는 신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효과적으로 바꿔놓지 못한 데 있다. 그래서 이 (지옥) 요소는 통속적 그리스도교에 점점 빠져나가게 되고 복음의 깊이에 많은 손해를 끼치게 되었다.

 

(저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 하나님이 말씀한 진리들을 믿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영이 없으면 그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자기들이야말로 성경보다도 과학과 현대에 입각해서 더 많이 더 깊이 알고 있다고 하면서 성경의 진리들을 깨부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천국과 지옥을 떠나서는 우리의 믿음은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과학이, 현대가, 없다고 하면 없어지는 것인가?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도 천국도 지옥도 다른 모든 사실도? 성경의 진리들이 방해물이 되고, 복음의 깊이에 많은 손해를 끼치고 있는가? 그들이 만드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정체를 가지게 될까? 아마 천사로 둔갑한 괴물일 것이다. )

 

저 밖에있는 신을 포기한다는 것은 저 위에있는 어떤 신이라는 개념으로부터의 변천 과정보다도 더 과격하고 근본적인 비약을 의미한다. 저 밖에 있는 존재라는 개념을 통째로 다 버리라는 것은 신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의미한 듯이 보일 것이다.

 

폴 틸리히의 설교집흔들리는 터전실존의 깊이라는 설교가 있다. 전통적인 종교적 상징기법이 높이의 표현에서 깊이의 표현으로 바뀔 때에 어떤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보여 준다. 틸리히는 말하기를 신은 그 존재성을 파악하려고 우리가 애써야 하는 따위의 저 밖에있는 어떤 투영이나 하늘 저쪽에 있는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의 기반이라고 한다.

 

모든 존재의 이 무궁무진한 깊이와 기반에 대한 이름이 곧 신이다. 신이라 말은 바로 그 깊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삶의 깊이나 존재의 근원이나 궁극적인 관심사나 무조건 중대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말해 보라. 그렇게 하려면 신에 관해서 배운 전통적인 것을 모조리 잊어버려야 하며 심지어는 신이라는 말 자체까지도 잊어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신이란 깊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것은 이미 여러분이 그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무신론자나 불신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삶에는 깊이가 없다든지 삶은 천박하다든지 존재 자체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아주 진지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무신론자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무신론자가 아니다. 깊이를 아는 사람은 신을 아는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의 옥중서간에서 종교 없는 그리스도교를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본회퍼가 독일 비밀 경찰에 의해서 사형당하기 전에 쓴 편지들이다. 본회퍼에 따르면 교회는 이때까지 종교적인 경험, 즉 사람은 누구나 다 마음속으로는 어떤 모양의 종교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 이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호소함으로써 복음을 전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종교라는 것도 없이, 개인의 구원에 대한 염원도 없이, 죄의식도 없이, ‘그 따위 가설의 도움도 없이 버젓이 살아갈 수 있다고 느끼게 된다면? 그리스도교란 이러한 부족감이나 신이라는 공백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혹은 앞으로 그런 필요성을 느낄 사람들에게만 국한될 것인가? 본회퍼의 대답은 이렇다. 즉 성 바울이 1세기 사람들에게 할례라는 조건이 없는 그리스도교를 요구한 것과 같이, 신도 20세기 사람들에게 종교라는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그리스도교를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루돌프 불트만은 1941년에 출판된신약성서와 신화로 유명하다. 그는 신약성서의 신화적요소를 지적한다. 그는 신약성서가 그 당시의 세계관과 신화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겨내야 현대인들은 복음을 알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요소의 전부가 현대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말들이라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의 초역사적성격을 표현하기 위해서 신약 성서 기자들은 선재성, 성육신,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 기적적인 개입, 우주적인 재난 등의 신화적용어- 불트만에 따르면 이와 같은 용어들은 이제는 완전히 낡아빠진 세계관으로만 이해가 가능하다-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진짜 거리낌의 바위(십자가의 불명예)에 걸리는 대신에 역사적인 사건을, 인간을 위한 신의 행위로 번역하는 역할을 해야 할 용어 자체, 도리어 이 사실을 믿을 수 없게 만들어놓는 용어 자체 때문에 뒤로 물러서게 되는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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