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존 오웬, "영의 생각, 육신의 생각", 11장 ‘영의 생각’과 정서, 12장, 정서의 본질
11장 ‘영의 생각’과 정서
‘신령한 영적 정서’(spiritual affections)가 있어야 영혼이 영적인 것들을 붙잡습니다. 그래야 사람이 안식과 만족을 주는 영적인 것들 속에서 풍미와 향취를 맛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정서’가 우리에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의 특별한 샘과 실질(peculiar spring and substance)’입니다.
세상은 있는 힘을 다하여 사람의 정서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잠23:26).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의 정서입니다. 살진 고기와 값진 제물을 드린다고 해도 거기에 우리 마음이 없다면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정서가 당신 자신을 향하게 회복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10:12).
사실상 우리의 정서가 우리 전부를 대변한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드리려 할 때 바로 그 정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정서를 통해서만 ‘우리 존재 자체와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님의 요구대로 드리게 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다른 모든 것을 주었다 할지라도 정서를 드리지 않았으면 사실상 아무 것도 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을 따르고, 모든 영적인 의무를 부지런히 감당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어떠한 고난을 감수한다 합시다. 그런데도 그 모든 일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한 모든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멸시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8:7).
정말 사랑은 물질의 풍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자기 가산 전부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같은 방식으로 멸시받을 일입니다.
진심과 행습의 보석(寶石)이요 선하고 칭찬받을 만한 모든 것의 생명과 혼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진심이 앉을 자리’(the seat off all sincerity)가 바로 우리의 정서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다른 사람으로 보이려고 아무리 꾸민다 하여도, 그 마음의 정서가 어떠냐가 그 사람의 됨됨이을 드러냅니다. ‘진심’(sincerity)은 마음의 정서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진심’이 사람의 마음의 정서를 선하고 쓸모 있게 만듭니다.
사람이 가진 정서는 영혼의 조타기(操舵機)와도 같습니다. 그 조타기의 향방대로 영혼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영혼이라는 배 전체가 정서라는 조타기의 조정대로 움직여 나갑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서를 당신의 은혜의 강력한 손길로 잡아 주신다면 우리 영혼은 하나님께로 계속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키를 세상에게 빼앗긴다면, 우리 영혼 전체는 세상적인 이해와 관심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정서는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나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세상은 사람에게 있어서 아주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세상은 저주 아래 떨어졌고, 모든 것은 사탄의 세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세상에 있는 것들은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를 하나님에게서 분리시켜 내는 효과적인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도가 요일 2:15-16절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마음의 정서를 빼앗아 독점하여 항상 자기를 사모하게 하려고 기를 쓰고 있습니다. 죄와 사탄이 세상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마음의 정서를 떼어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모든 소원을 다 만족시켜줄 것처럼 약속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탄의 교활함과 사람들의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세상의 것들이 하늘의 영원한 것들과 비교하여 얼마나 보잘 것 없고 허무한 것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세상에 오시어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 얻고 발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만약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어떤 것(세상의 권력, 지혜, 재물 등)을 발견하셨다면 그것을 즐거워하시고 귀히 여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일용할 양식만을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일용할 양식만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6:11).
여러분,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쁜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토록 부지런하게 뛰어다니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편과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로 여러분의 정서와 이 세상 사이를 갈라놓으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신자라면, 여러분의 소망은 하루라도 빨리 영원히 예수님과 함께 거하고 싶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분에게 자신의 삶이 낱낱이 적힌 결산서(決算書)를 제출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에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행한 모든 일을 하나하나 보고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쌓았던 것들과 누렸던 것들과 이 세상에서 그토록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그분께서 받으실 만한 것들입니까? 그분이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남기신 본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본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모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옛 거룩한 순교자는 ‘나의 사랑하던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정서는 어떠합니까?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너무 강력히 얽혀 있는 나머지 지나치게 연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것들을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소원, 그러한 것들을 지키고 싶은 소망, 그것들을 상실할까봐 어쩔 줄 몰라 하는 여러분의 두려움이 여러분의 삶을 장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생애와 죽으심을 보십시오. 그분의 생애와 죽으심이 복된 거울이 되어 여러분이 사랑하는 세상의 것들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들인지 보게 할 것입니다. 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서 진정한 영적인 관점을 가졌다는 우리가 이 세상의 권세와 부와 재산을 사랑하고 자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주께서 그러하셨으니 우리도 가난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삼가시고 무시하신 세상의 것들을 우리가 사모하는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세상에서 누리는 것들로부터 견고한 만족을 얻기에는 너무나 짧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 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 뿐이니이다”(시39:5).
그러면서 시편 기자는 두 가지의 결론을 내립니다(시39:6).
1.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소란하며”
2.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거룩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것들에 가치를 두고 온전히 누릴 만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그 짧은 인생의 시간 동안 영원한 복락과 영원한 비참이 결정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복락을 위한 은혜로운 기회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위하여 지은 바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일은 전적으로 주어진 그 시간 안에 위에 있는 것들에 얼마나 큰 관심을 두고 사모하며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요일2: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목적에 있어서 잘못 사용되기 십상입니다. 세상의 것들과 마음의 정욕과 욕심은 아주 잘 부합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정서가 세상에 속한 것들에 애착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것들을 사용하든 모두 시험과 함정과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영혼들을 파멸에 빠지게 한 요인과 방편에 집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을 과소평가하여 적당하게 취급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의 방편들을 바르게 활용하는 것과 남용하는 것, 또는 그것들을 합당하게 관리하는 것과 무절제한 애착심을 가지는 것 사이를 구분해야 합니다. 이것을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거룩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섭리의 경륜을 따르는 신령한 지혜가 요구됩니다.
자기 사랑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하여 강한 소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것들을 언제까지나 소유할 수 있는 절대적인 소유자가 아닙니다. 그것들을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세상의 관점에서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의 정당한 소유주가 될 수 있지만, 하늘과 땅과 온 우주의 유일한 소유자가 계시는 한 여러분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의 청지기직에 대한 회계(會計)보고를 하나님께 드리게 될 것입니다(눅16:1-2). 자기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맡은 모든 것을 회계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자신을 바르게 잘 점검하고 그러한 것들에 대한 우리 마음의 상태와 행동들을 유념하여 보십시오. 만약 부패한 본성이 발견된다면 그것을 제거하려고 애를 쓰십시오. 자기 사랑은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바르게 판단하셔서 여러분이 애착할 대상을 새롭게 설정하십시오. 그 대상이 여러분 마음의 가장 주도적인 관심거리가 되게 하시고 범사에 그 증거를 나타내게 하십시오.
12장 정서의 본질
우리의 정서가 생각을 영적으로 하는 마음의 구조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 보려면 세 가지의 사항을 유념하여야 합니다.
첫째, ‘우리의 정서가 영적이 되기 위하여 무엇이 요청되는가?’ 모든 도리를 영적으로 이행하여 나갈 때 그 기반에 영적인 정서가 수반되기 때문에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정서가 영적으로 되면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
셋째, 영적으로 생각하는 구조 속에서 그 정서를 계속 유지하고 보전하는 ‘방편’은 무엇인가?
정서가 영적으로 새롭게 되면 ‘영적으로 생각’하는 구조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또 영적인 생각 속에 정서가 빠져 있을 수 없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실로 영적인 정서가 없이 생각이 영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정서가 영적이 되려면 원리에 있어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정서가 영적이 되어 영적으로 생각하는데 샘과 같은 역할을 하려면 우리 정서를 움직이는 원리가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은혜로 변화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 요점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본질상 우리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우리 본성(nature)이 부패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이성이나 본성의 지각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또한 우리의 정서는 본질상 부패하고 뒤틀려 있습니다.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무질서하고 부패한 정서로 말미암아 마음이 하나님께 등을 돌려 돌아서 버렸습니다(딛3:3). 그리고 부패한 우리의 정서는 육체와 영의 모든 욕심들이 거하는 처소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악한 탐욕은 부패하고 더러워진 우리 정서 활동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롬7:8). 그러니 어떤 죄도 정서의 변화 없이는 결코 제압할 수 없습니다.
타락한 정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죄행의 샘이며 뿌리입니다(마15:19). 성경에서 말하는 ‘악한 마음’이란 결국 헛된 상상들과 함께 나타나는 마음의 부패한 정서입니다. 온갖 더러운 상상이 정서를 흥분시키고 활동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창6:5). 부패한 정서는 온 세상을 악과 어둠과 혼돈과 공포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정서의 힘과 효력인 것입니다.
부패한 정서는 이지(mind, 지성)의 통제를 받지 않습니다. 이지의 빛에 반항하여 거스르려고 하는 것이 부패한 정서의 전형적인 기질이기 때문입니다(요24:13). 설령 지성으로 선과 악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타락한 정서는 그러한 지성의 개념들을 거부하고 무시하며 자신의 성향에 따라 영혼을 이끌어 갑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진 지성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행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본질상 우리 정서의 부패를 두 가지의 항목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부패한 정서는 ‘하나님과 영적인 모든 것들’을 전적으로 거부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모든 방식들을 다 싫어하는 혐오감이 가득한데, 그 모든 것을 솟구쳐내는 샘이 바로 그 부패한 정서 속에 있습니다. 그 샘 근원은 하나님에 대한 반감을 훨씬 뛰어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까지도 먹게 만듭니다.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 하나이다”(요21:14-15).
둘째로, 타락한 정서는 영혼으로 하여금 ‘헛되고 세상적이고 육감적인 것들을 무절제하게 집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서가 영혼을 마치 적진(敵陣)으로 돌진하는 말(馬)같이 그것들을 추구하게 합니다.
타락한 정서도 때로는 ‘잠시 어떠한 인상’을 받기도 합니다. 말씀 설교를 통해 받은 인상으로 기뻐하며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도 합니다. 위험과 질병과 죽음을 생각하며 순간적인 각성을 받기도 합니다(시78:35-37). 이렇게 여러 가지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정서가 순간적인 변화를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정서가 잠시 순간적으로 흐름을 바꿨을 뿐, 결국은 다시 그전의 상태로 돌아가 버리는 일이 허다합니다.
일시적으로 받은 정서의 인상이 잠시만 영혼으로 진정한 원리들에 따라 행동하도록 작용할 수 있습니다. 선과 악, 영원한 것과 순간적인 것,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마땅한 도리들을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 사람들은 그런 진지한 생각을 하는 자신의 마음과 정서가 바르게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집니다. 사실 본질적인 변화가 전혀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잠시 열이 내린 것을 보면서 자신이 말라리아에서 완전히 치료되었다고 믿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정서에는 이러한 인상이 영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부패한 정서는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도록 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들에 비상한 집착을 보이도록 만듭니다. 그들이 말하는 변화란 바로 자신들이 비상하게 집착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약간 절제하는 것일 뿐, 요동하여 더러운 것을 솟구쳐 내는 바다의 물결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약간의 절제만으로는 육감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영혼의 발걸음을 완전히 되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호랑이나 사자 새끼도 사람과 가축에게 해를 끼치게 못하도록 길들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길들여진 맹수들은 마치 원래 온순한 동물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맹수의 본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든 그 성향을 드러낼 것입니다. 다른 짐승의 피 맛을 보는 순간부터 그 맹수들은 다시 길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정서의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정서의 흐름을 바꾸어 놓거나 새로운 경로로 나아가는 습관을 가지게 길들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이 문제입니다. 그 본질이 하늘에 속한 성질로 바뀌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우리의 정서는 내면적인 갱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본질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6-9).
이것이 정서가 본질적으로 변화될 모습입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엡4:23).
우리의 ‘심령’은 영적인 구원의 빛과 총명으로 새로움을 입어야 합니다. ‘심령’은 본래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이었습니다(엡4:22). 여기서 ‘심령’은 곧 부패한 정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구원하시는 은혜만이 정서의 본질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냥 본래대로 내버려 두면 그저 본성적인 정서에 불과할 것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그 본래의 정서들은 본질에 있어서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본성이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정서의 품격과 성향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서는 본질상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서에 은혜가 임하면 그 품격과 성향 모두가 정결해지고 새로워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