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요한복음 3장강해`, 14장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자 (김영희)
14 장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비하다. 불쌍한 니고데모! 그의 문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자 애쓴 데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영역,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영역으로 옮겨간다. 이런 일을 이해하려 드는 자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결코 은혜와 영광과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그리스도는 살아나셨다’라고 인사하는 것이 일상적인 인사말이었다. 초창기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기쁨과 확신으로 그 말을 했다. 그가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회도 없었을 것이고 그리스도인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야말로 모든 소망과 확신의 토대요, 기초였기에 그 말로 인사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살아나셨다’는 그들의 위치 전체를 요약한 말이었다. 우리도 같은 사실에 기대어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살아나셨다! 거듭난 자에게는 이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이 시금석은 위조할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부활을 부인하고 있다. 반복하건데 우리가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은 우리의 소망, 우리의 위치도 이 말에 토대를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당연히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 자체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활은 관념이 아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세상은 니고데모처럼 의심하며 부활을 부인하는 갖가지 이론을 내놓는다. 아, 세상뿐 아니라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이 부활을 부인한다. 부인하는 이유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큰 기적인 부활을 머리로 이해하려 들기 때문이다. 기독 신앙은 전부 기적이며, 초자연적인 영역에 속해 있다. 자기 이해력을 의지하는 자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둘째, 개인적인 삶 속에서 경험을 통해 부활의 결과를 알고 있는지 점검해보라. 부활을 문자 그대로 역사적이 사실로 받아들이지만 경험적으로는 모를 수 있다. 우리가 거듭났는지 아닌지 검증할 수 있는 실제적인 시금석은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을 통해 부활의 결과를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 부활의 결과는 무엇인가? - 이것이 모든 서신서의 주된 주제를 이룬다.
①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못 박힌 것은)---”(롬6:6) 이 일은 과거에 단번에 영원히 일어난 것이다. 주님이 못 박히실 때 우리도 못 박혔다. 사도는 연이어 이렇게 호소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11) 기독신앙의 본질적인 핵심이 여기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 일어난 모든 일은 주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 이것이 사도의 논거이다. 여러분에게 묻겠다. 여러분은 죽었는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거듭났다면, 과거의 여러분은 죽은 것이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죽으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그와 함께 죽었다. 이 말의 의미는 옛 본성이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것이다. 옛 본성의 유물과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롬6:12)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옛 본성이 남아 있음을 인식하지만, 처음 태어났던 자기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은 아님을 확실히 안다. 이것을 아는 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여전히 죄를 짓고, 여전히 실패하고, 완전치는 못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결론은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자신을 보면서 “내 모습이 지금 어떻든, 과거의 그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사람은 죽었다. 세상은 여전히 날 유혹하지만 지배하지는 못한다. 난 더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② 첫 단계의 소극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적극적인 단계로 나아간다.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고 일어나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8-11) 이 말의 의미는 심리학에서 말하듯 자신에게 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의 의미는 여러분이 죄의 지배와 영토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또한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이다.
여러분은 이것을 경험했는가? 여러분은 살아났고 일어났는가? 사도 바울은 지치지도 않고 이 말을 계속하며 반복하고 있다.
“너희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1:18-21)
그 능력은 어떤 것인가?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능력과 동일한 능력이라고 말한다.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을 인식하는가? 이것은 거듭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다. 부활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자, 영적인 생명이 없는 자는 거듭나지 못한 것이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능력”(엡3:20)은 부활의 능력이다. 이 능력이 성령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 거듭난 사람 안에서 역사한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와 이해력과 육신의 힘과 에너지로 살지 않으며, 세상이 그 방면에서 제공하는 도움을 받아 살지 않는다. 부활의 능력으로 산다.
부활의 권능! 사도는 이 권능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달려간다는 것이다. 앞서 자신이 죽었음을 아느냐고 물었다. 이제 여러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라는 것을 아는가? 사도 바울에게 이것은 일상적인 경험이었다. 바울이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다. 바울 안에서 역사했던 능력이 우리 안에서도 똑같이 역사하고 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 자임을 알았기에 박해의 시기에 “그리스도는 살아나셨다”라고 인사했다.
③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음을 알기에 항상 안전하다는 사실 또한 안다. 이것을 모른다면 앞서 말한 모든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엡2:6)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가 계신 곳에 나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두려워하고 –과학이나 철학- 변명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3:3) 그러므로 우리는 안전하다. 우리 주님이 우주의 보좌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권세를 받으셨고, 우리의 모든 원수를 남김없이 다 정복하셨다.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8:39) 부활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어떤 것도 하늘에 앉아 있는 여러분을 끌어내리지 못한다.
④ 거듭난 자, 성령으로 태어난 자는 그가 오실 날, 다시 나타나실 날의 영광을 고대한다. 자신들을 기다리는 영광을 고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난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결정적 증거이다. 종교인은 이 사실을 모른다. 여러분은 바울처럼 죽음을 고대하는 종교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빌1:21-23) 그들은 다른 세상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끈질기게 붙잡고 놓지 않는다. 그들의 영혼에는 그리스도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
여러분은 이 영광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영광이 시련과 불행과 죽음에 직면할 때 여러분을 붙잡아 주고 있는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는 중요치 않다고 사도는 말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다.
부활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있다면, 그 생명의 완성을 바라는 갈망을 희미하게 느낄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여전히 몸 안에 살면서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중이다. 홀연히 변화되어 영화로워질 것이며 완전해질 것이다. 그 때 자연과 피조 세계가 변모하고 변화하는 광경은 참으로 굉장할 것이다. 만물이 새로워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부활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한다.
지금 시련과 곤란과 환난을 겪고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그리스도는 살아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