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존 로빈슨, `신에게 솔직히`, 4장 남을 위한 인간, 5장 세속적인 거룩함

강대식 2018. 7. 25. 06:50

4. 남을 위한 인간

 

예수는 남을 위한 인간’,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 자기 존재의 기반과 완전히 통하여 하나가 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신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생기는 남을 위한 삶이 곧 초월인 것이다. 왜냐하면 죽기까지 사랑하는사랑이라는 이 점에서 우리는 신, 즉 우리 존재의 궁극적 깊이’, 상대적인 것 안에 있는 절대적인 것을 만나기 때문이다.

 

이탈되어 있으면서도 우리 존재의 기반과 하나가 되어 있는 것, 우리는 이것을 지옥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랑 안에서 자기 존재의 기반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곧 천당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서가 말하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실존의 이탈성과 소원성을 그 모든 신적 깊이에서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현실은 초월적인 것이요, 신약에서는 다만 은총이라고만 한다.

 

새로운 피조물은 유별나게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남을 위한 인간의 삶, 우리를 우리 존재의 기반과 완전히 하나로 만드는 사람, 화해되지 않은 우리 실존의 여러 가지 관계 속에 나타나는 사랑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가장 훌륭하게 나타났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어떤 새로운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 새로운 존재를 사랑으로 나타내는 구현체가 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본회퍼의 말을 다시 빌린다면 이 세상에서 신의 무력함에 참여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신과 함께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이교도들과 다른 점이다. 인간은 신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신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을 잃어버린 이 세상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어 가야 한다. 그는 세속적인삶을 살아야 하며, 따라서 신의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유별나게 종교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무슨 종교적 행위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의 생활 속에서 신의 고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이 남을 위한 사랑을 할 수 있는가? 그렇게 인간의 본성과 행함이 착한가? 말과 사상은 얼마든지 아름답게 할 수 있다. 사상과 삶의 괴리를 아는가? 그 가운데 합할 수 없는 심연이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아는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와 지옥의 부자 사이에 가로놓인 큰 구렁텅이를 아는가? 성경의 교리를 믿지 않고 성경의 윤리와 도덕을 살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 없이 인간이 과연 죄를 이기고 선을 행할 수 있는가?

남을 위한 사랑?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남은 제쳐놓고라도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형제간 사이의 사랑도 잘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성령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가? 인간은 바리새인은 될 수 있다. 입으로 진리를 말할 수 있지만, 속에는 탐욕과 방탕, 죄악과 위선이 자리하고 있다.)

 

 

5. 세속적인 거룩함

 

세속적인것이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참된 깊이로부터 분리되고 이탈된 세계를 의미한다. 거룩한 것은 세속적인 것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다. 예배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도피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며, 세속적인 영역에서 종교적인 영역으로 은퇴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것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세속적인 것의 피상성을 꿰뜷고 그것을 그 이탈 상태에서 구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 자기 자신을 열어 놓자는 것이다. 예배의 기능은 이와 같은 깊이에 대해서 우리를 민감하게 하는 것, 이 세상과 다른 여러 사회에 대한 우리의 반응으로 하여금 근치적 관심사로부터 궁극적 관심사로 초점을 두게 하고, 이것을 날카롭게 하고 깊이 있게 하는 것,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추어 우리의 사랑을 순결하게 하고 바로잡게 하는 것, 그리고 이미 화해했고 현재도 화해하고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은총과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는 것 또는 수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은 무엇이나 다 그리스도교의 예배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그것이 종교적일지라도 다 그리스도교의 예배가 아닌 것이다.

 

성만찬이라는 것은 교회와 이 세상을 향해서 그리스도가 그 백성과 함께 임재한다는 사실 곧 세속적인 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는 일, 또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일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공포하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예배와 성만찬을 인간이 과연 인간의 힘으로 드릴 수 있는가? 세속적인 인간을 그 깊이에로 궁극적인 것에로 이웃과 올바른 관계로 인도하는 예배가 가능한가? 철학과 불교와 기타 오래된 종교들은 깊이가 있다. 깊이를 추구한다. 그러면 철학이 성한 곳에서, 불교와 기타 종교가 성한 곳에서 인간은 살만한 천국을 이루었는가? 칼 맑스의 아름다운 공산주의 사상으로 뚤뚤 뭉친 사람들이 세운 구쏘련과 중국과 북한의 실정은 어떠한가? 폴 틸리히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깊이로 추구하다가 기독교 천국을 이룬 것이 아니라 일본 신도에 귀의했으며, 쇼펜하우워도 철학적 깊이를 추구하다 불교로 귀의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에 타락했음에도 지혜가 남아 있어서 아름다운 사상을 전개할 수는 있으나 제 영혼 하나 구원 못하고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사탄의 종노릇하다 영벌의 세계로 간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미혹의 영에 속지 말아야 한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나의 전부를 가지고 남을 만나야 하는 책임, 조건적인 것 안에서 무조건적인 것을 만나며, 이 길을 떠나서가 아니라 바로 이 길 안에서 신을 만날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 신을 만나기 위해서 아라비아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라비아에서 돌아온 그의 심령에는 그만치 깊이가 생겼다. 여기에 참여와 은퇴의 변증법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가장 거룩한 것이 성단에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신을 만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도피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에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며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때문이다.

 

(신을 만나기 위해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신을 만나야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사울이 신을 만나기 위해 아라비아로 갔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사울이 신을 만났기에 그가 변화되고 깊어진 것이지 신을 만나고서 아라비아로 갔기 때문에 깊어진 것이 아니다. 사울의 아라비아는 그동안 하나님을 대적했던 삶을 회개하고 씻어내는 시간이요 로빈슨의 사상과 같은 학문을 배설물처럼 버리는 시간들이었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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