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문화 전쟁’의 십자군 정신이 아니라, 참된 영적 해결책이다/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문화 전쟁’의 십자군 정신이 아니라, 참된 영적 해결책이다/ 마이클 호튼
이 책은 ‘문화전쟁’에서 어느 쪽 편을 들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더 이상 본연의 사명을 추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최대의 이슈들은 어느 한 사람이 정치적으로 우편인가 좌편인가 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진짜 분리는 한편으로 계시와 구원과 인간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의로운 공로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도래시킬 수 있다고 단정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좌파와 우파의 ‘정치적으로 옳은 태도’에 식상한 많은 미국인은 당파적인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좀더 깊은 영적인 해결책들을 찾고 있다. ‘문화 전쟁’의 양편에 있는 많은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실은 사회의 깊은 철학적인 사조들이 결정적으로 반이데올로기적이라는 점이다. 공산주의의 붕괴에 더불어서, 그리고 세계를 문명화시킨다는 미국 민주주의의 능력에 대한 냉소주의와 더불어서, 사람들은 점점 이데올로기적인 수사와 정치적인 만병통치약에 대해 싫증을 내고 있다. 중세 시대에는 세상을 경멸했으며, 근대에는 우리가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어왔었는데, 포스트모던사회는 그 둘 다에 대해 식상해하고 있다. 구원이란 인간과 형제애와 좌파나 우파의 ‘주의들’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기독교 교리를 사람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러시아의 반체제 문학가였던 솔제니친은 하버드 대학교의 청중에게 “우리는 정치와 사회 개혁에 지나치게 소망을 두고 있어서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재산인 우리의 영적 삶에 대해서는 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우리의 영적 삶은 동구권에서는 당에 속한 폭도들에게, 그리고 서구에서는 상업주의적인 폭도들에게 짓밟히고 있다.”
문화가 어느 정도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시발점에서 우리는 보수주의자들이든지 자유주의자들이든지 간에 모두가 다 분개하는 바로 그 십자군적인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소망에 대한 근거를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이 준비되어 있는가”(벧전3:15)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심각한 이 위기에 대한 도덕적이며 정치적인 해결책에만 계속 사로잡혀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실제로는 이 위기를 더욱 가중시키고 말 것인가?
프로테스탄트들은 점점 자신들이 만들어 놓았던 진보와 계몽의 세력들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 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820년 이전에는 미국 대학의 거의 70%가 옛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손안에 있었다(회중주의자들, 장로교인들, 감독교회들). 병원들과 사회봉사 기관들과 출판사들은 대부분 교회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프로테스탄트 헤게모니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계몽주의 안에서 놓임을 받은 세속주의가 점점 성경의 권위와 그 성경의 권위 위에 세워진 제도들(교회)에 대해 의심하도록 문화를 이끌어 갔기 때문이다. 미국의 부흥주의와 그 부흥주의를 통해 자라나게 된 개인주의 정신 때문에 약해진 교회는 근대성에 영합하든지 아니면 근대성에서부터 급진적인 분리를 통해 도피하든지 하는 두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부흥주의는 점점 세계의 유행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세기 부흥들은 앤드루 카네기와 바넘 같은 인물들에게서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문제는 정치적인 노선에서 보수주의적인 측과 자신을 동일시했던 사람들이 점점 ‘근본주의’의 명분에 가담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물론, 두 집단들 모두 ‘미국 계몽주의’라는 한 우물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신학적 성숙을 위한 기회는 거의 갖지 못했었다. 이성과 인간 본성과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근대성에 다소 개방적으로 영합했던 사람들은 마침내 세속주의를 용인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갈등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 미국 장로교회는 정통이었던 그레샴 메이첸을 축출했다. 그 교단 안에서의 내분에 뒤이어서 다른 프로테스탄트 교회들도 마찬가지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대개 양측 모두 큰 슬픔을 안고 분열했다.
이런 주류 프로테스탄트 전쟁 가운데서 자유주의자들이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경적인 신앙을 깨뜨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실천적인 의미에서 ‘복음적’인 한 (즉, 경건하고 선교와 부흥에 관심을 기울이고, 음주에 대해 단호한 반대자들인 이상) 신학적으로 세세한 사항까지 동의할 필요는 없다고 믿었다. 메이첸처럼 기독교가 그 교회와 분리될 수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아메리칸 드림과 기독교 복음을 호동하고 있는 ‘기존의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대해 반대했으며, 금주법에 대해 반대했으며, 시민의 자유를 옹호했다. 사람들은 기이한 모순에 대해 주목했다. 즉, 기독교의 독특한 메시지를 보존하는 데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시민의 자유에도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반면에 교리적인 정통성에 대해 별로 열심을 내지 않았던 사람들은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일로 그들의 에너지들을 소모하는 데 그쳤다는 사실이다.
좀더 부흥주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교리적인 이슈 때문이 아니라 기성 제도들과 사회에 대한 혐오 때문에 분리되었다. 곧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은 소위 근본주의자들과 근대주의자들로 양분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본주의자들 자신들도 세상을 긍정하고 지적 활동을 지향하고, 특정한 고백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사람들(메이첸과 그 동료들)과 본질적으로 세상을 부정하며, 감정 중심이며, 반지성적이며, 미국적 경험과 실용주의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마음에 호소하는’ 순회 부흥사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들로 양분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후자의 근본주의가 승리하여 발전해 온 것이다.
-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pp 2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