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로이드 존스, `요한목음 3장 강해`, 18장 성령 세례 (김영희)

강대식 2018. 9. 12. 07:15

18 장    성령 세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1996년 성령강림절 설교

 

- 우리 믿음의 토대가 되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계속 상기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오순절 날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에게 홀연히 성령이 임하셨다. 그 일을 믿지 않고 그 일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결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든 성령 세례라는 중대하고 기본적인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사도들과 함께 모이셨을 때,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일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세례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대조해 보는 것이 이 주제를 살펴보는 좋은 방법이다.

요한은 나사렛 예수가 신랑이시며 자신은 친구에 불과하다고 했다. 신부는 교회이다. 요한은 신랑의 친구로 자기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앞서 온 자, 전령에 불과했다.

그는 흥하여야 한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31)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낱 인간이요, 종에 불과하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나와 완전히 다른 위로부터 와서 만물 위에 계신 분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34) 한다고 말한다. 요한도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특별한 때 특별한 감동이 있을 때만 전했다. 그의 말은 불완전했다. 여기에 대조점이 있다.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34) 하나님은 아들에게 성령을 주어 다시 교회에 주게 하셨다. 그래서 오순절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성령세례는 주님이 친히 베푸시는 세례이다. 요한의 요지는 이것이다. “내가 베푸는 세례는 예비 단계에 불과하다. 진정한 세례는 그가 주실 것이다물 세례는 예비 단계에 불과했다.(3:15-17, 11:3)

 

주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요한을 칭찬하시면서도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7:11)라고 하셨다. 세례 요한은 성령을 받지 못했다. 물 세례라는 예비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주님은 연이어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2)라고 하셨다. 요한은 물론 하나님의 자녀이다. 구약의 성도들도 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다.

 

- 세례 요한과 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은 어떻게 다른가?

성숙의 정도,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이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어린아이에 불과할 수 있다. 성령 세례는 이런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어른의 상태로 우리를 끌어올려 준다. 요한은 이것을 알았다.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성부는 성자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오직 그의 능력으로만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중대한 메시지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는가?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안에 계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성령 세례를 모르는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각의 정도 이해하고 파악하는 면에서 차이가 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어른이 되면 지각이 크게 자란다. 어린아이의 상태는 무언가 보기는 하는데 흐릿하고 분명치 않다. 다 이해하지 못한다. 기쁨과 행복감을 느낄 만큼은 알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파악하지는 못한다. 선지서를 읽어 보면 그들도 이 일을 얼핏 보고 핵심을 알았지만 아주 희미하고 흐릿하게 알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구약의 성도들이 이 일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종의 초등교사 역할을 했다고 분명히 밝힌다.(4:3)

 

사도들의 복음서의 모습과 오순절 날의 모습, 그 이후의 모습을 비교해 보라. 그들은 이미 중생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런데도 정신과 지각과 이해의 측면에서 얼마나 혼동을 겪었는지 보라. 오순절 날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야 사실상 온전히 알게 되었다. 주님은 이미 다락방에서 그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고(20:22), 그들로 교회를 구성하셨으며,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다. 그러면서도 위로부터 권능이 임할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명하셨다.

이런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얕은 물에 갇혀 비참하게 산다. 마땅히 누려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리지 못한다.

 

자신과 확신의 정도 세례 요한은 요단에서 예수에 대해 증언했다.(1:32-34) 또 어느날 자기 제자 중 한 사람과 함께 있다가 예수가 지나가시는 모습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36)라고도 했다. 그런데 그는 중심적인 진리는 알았지만 여전히 유대인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은 메시아를 로마를 비롯한 모든 원수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에 나라를 세울 군사적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평범한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시간을 소모하는 것 같았다. 요한은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두 제자를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1:3)라고 물은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정말 메시아입니까라는 질문이었다. 자신과 확신을 갖지 못했고, 믿음은 있었지만 불안한 믿음이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분명한 위치였고, 오순절 이전 사도들의 위치였다.

 

성령 세례는 무엇인가? 절대적인 자신과 충만한 구원의 확신을 주시는 것이다. 제 목숨을 위해 주님을 부인하던 베드로가 오순절 날 얼마나 담대하게 변했는지 보라. 성령 세례의 최대 목적이 여기 있다. 8:15-17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말을 보라. 그리고 28, 38-39절의 강력한 단언과 불가능한 확언은 8장의 백미를 이룬다. 어른이 되는 일에는 이 확신의 요소가 포함된다. 교회 역사에서 그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부흥의 때에는 항상 이 일이 일어난다. 세례요한은 그런 세례를 줄 수 없었다. 본인은 그 사실을 알았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성령 세례는 크고 영광스러운 만족감을 준다. -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기독교를 거의 과업처럼 느낄 수 있다. 저 또한 그런 것을 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신다. 율법주의가 상당 부분 남아 있다. 그런 상태에서 죄를 지을 때 마귀가 흔들어 구원을 의심케 할 수 있다. 이처럼 기독교를 부담이자 짐이자 과업으로 느끼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바울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 영혼에는 안식과 평온과 만족이 없다. 그런데 성령 세례를 받으면 온전한 만족감이 찾아온다. 성령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보냄을 받으신 분이다. 성령은 항상 이 일을 하신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는지 아닌지 검증하는 시금석은 주 예수를 알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그 안에서 온전히 만족하느냐 하는 것이다.

옥에 갇힌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0-13) 바로 이것이 온전히 만족하는 자의 모습이다.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7:37-38) 주님은 성령 세례를 통해 온전한 만족을 주신다. 성령이 주님의 거룩한 구주되심을 충만히 계시하심으로 온전한 만족을 주신다. 성령 세례가 신약의 인물들을 온전히 만족하는 자들로 만들었다.

 

성령 세례는 항상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야기를 보라. 베드로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말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이런 즐거움을 모를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 최종적인 영광을 미리 맛보는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된다. 사도행전이 세상에서 가장 서정적인 책이 된 것은 이렇게 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을 묘사하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는 만족과 기쁨과 즐거움을 줄 뿐 아니라 주님이 명절 큰 날 약속하신 것처럼 많은 열매를 맺게 해준다. -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즘 같은 때 이보다 더 중요한 요점을 저는 알지 못한다. 기독교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고대 세계를 정복했다. 무리들은 오순절 날에도 그들이 취했다고 생각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무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마다 계속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들을 보며 자기 영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들은 원형 경기장에 사자 밥으로 던져지면서도 예수의 이름을 위해 고난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될 수 있지?“라고 물었다. 이처럼 성령 세례를 받으면 완전히 변해서 일종의 자석 같은 존재가 된다.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구원의 길을 보여줄 수 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산 증인이 된다.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혹시 자기 신앙을 자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선한 삶과 생활을 자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그 모든 자랑이 다 없어지고 쇠하고 사라질 것이다. 성령 세례는 세례 요한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 기뻐하는 그리스도인,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 주변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되는 그리스도인, 그 속에서 생수가 흘러나와 메마르고 갈라지고 목마르고 건조한 주변 땅을 적시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 주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례를 알고 있는가? 그로 흥하시게 하라. 나는 주님과 주님의 영광과 주님이 주시는 모든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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