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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존 오웬, "그리스도의 영광",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을 위하여

강대식 2018. 9. 13. 07:50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을 위하여

 

본 강론의 목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데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일들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기쁨과 찬송의 제일되는 대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관점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얻게 되는 그리스도와 그 영광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연약하고 희미할지라도, 그것마저도 다른 모든 이해나 지식보다 말할 수 없이 더 우월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에 대해 능한 판단자로 인정받은 사람이 그렇게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3:8).

 

이 말씀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어떤 분깃도 가질 수 없다. 복음을 통해서 주어진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는, 전체 피조물이 제공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탁월하며 영광스럽고, 신적 지혜와 선하심의 광채로 충만하다. 그러므로 이 지식은 우리가 묵상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요구할 만하며, 최고의 부지런함을 드릴만하다.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우리도 함께 있어 그 영광을 보는 복을 누리기를 소망한다면, 복음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영광을 먼저 부단히 숙고하는 일보다 더 좋은 준비는 있을 수 없다. 장차 우리가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함께 있으면서 그 영광을 보는 복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김으로써 우리도 점차 변하여 영광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 왜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해야 하는가

 

우리의 본성이 처음 만들어질 때, 우리의 본성은 존귀와 영예로 관 씌워졌다. 그런데 그 본성이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벌거벗겨지고, 진흙 구덩이에 내동댕이쳐졌다. 인간 본성의 모든 내적인 기능들 속에 더러운 정욕이 침입함으로 말미암아 인간 본성 전체가 하나님을 닮지 못하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하여 끝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그 이후 인간의 본성은 모든 피조물들의 원수인 사탄은 저급해진 인간의 본성 속에서 왕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광이 온전히 떠나 버렸고, 하나님과의 특별한 친밀감도 상실해 버렸다. 사실 하나님과의 특별한 친밀함이 바로 인간 본성의 영광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한하신 은혜와 지혜로 다시금 우리의 생명을 회복시키겠노라고 뜻을 세우셨다. 우리의 본성이 다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계획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과 우리가 다시는 분리되지 않도록 그 일을 해내셨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이 무너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인격 안에서 우리의 인성을 자기 자신과 본질적으로 연합시키심으로써 그 뜻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가 영원히 보장받게 되었다.

 

전능하신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이 어떻게 이러한 효과를 낼 수 있는지 그 어떤 피조물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외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연합을 이룰 수 있는 다른 어떠한 경로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영광스러운 보증과,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증거를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그 자비가 우리 각 사람에게 미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영광을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피조물의 장자가 되셨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분량만큼 그리스도를 본받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들로서 이 영광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함으로써 얻게 되는 특별한 유익은, 바로 우리를 삶에서든 죽음 앞에서든 기쁨과 안위에 차도록 이끌어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뜻을 이루고자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6-18).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이고도 영원한 것들을 본다면, 우리의 모든 고통이 경감되고 우리의 짐이 가벼워지고 우리 영혼이 낙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모든 것들을 합당하게 포괄하고 있는 주제가 곧 그리스도의 영광이요, 그 영광이 그것들을 주도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때문이다.

 

항상 그 영광을 묵상하는 사람은 악한 일들을 만나 괴롭힘을 당할지라도, 그 모든 악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할지라도 능히 이겨 낼 것이다. “그 생각이 하늘에 속한 것들을 향하고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1)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할 때 우리가 하찮은 것들 때문에 고통당하며 마음 아파하는 것이 얼마나 합당하지 못한 일인지를 알게 된다.

2)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할 때 마음이 회복되고 평정을 찾게 된다.

3)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4) 그리스도의 영광을 진실하게 숙고할 때 기쁨과 위안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여 그 관문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기회에 죽음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을 전해 주고, 그 죽음에 대처하여 용기를 얻는 몇 가지 방안을 가르쳐 주고자 한다. 일관된 기쁨과 승리감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1) 육체를 떠나게 되는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손, 곧 우리의 영혼을 능히 받아 주고 지켜 주고 보호해 줄 수 있으며, 우리의 영혼을 안식과 복락의 상태에 두실 수 있는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는 믿음의 특별한 행위가 우리에게 요구된다.

 

영혼은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과 분리되어 영원한 상태로 들어간다. 이 땅에서 누렸던 모든 것들 중 어느 하나도 영혼과 한 발짝도 함께 갈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혼 세계를 전혀 알 수 없도록 그것을 숨기고 계신 것 같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믿음으로만 받도록 하셨을 뿐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잠시 살면서도 죽음의 공포가 주는 고통을 떨치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끝에 오는 상황에 대하여 자기들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상상한다. 하지만 영혼은 이제 더 큰 다른 존재의 주장에 절대적으로 순응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사후의 상태를 향하여 모험심을 가지고 나갈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는 믿음을 행사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사람만이 내세의 상태를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상태가 안식과 복락을 가진 상태임을 알고 처신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사도는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한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다른 모든 은혜와 마찬가지로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위대한 표본이시다. 그는 몸을 떠나는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셨다. 몸을 떠나게 될 영혼을 아버지께서 간수하고 보존해 달라고 맡기신 것이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 자신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손에 맡겼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7:59). 이는 믿음의 궁극적인 승리이다. 궁극적인 승리는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이기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구속주로 믿는 사람들의 영혼을 즉시 받으신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인격, 능력과 높아지심, 그리고 그의 직무와 은혜를 매일 묵상하는 것, 이보다 사람의 영혼을 그리스도의 손에 맡기도록 더 강하게 격려하는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이제 몸을 떠나는 자기 영혼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과 돌보심에 부탁하기를 무서워하며 주저할 수 있겠는가? 우리도 죽어 가는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받으시고자 준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보게 될 것이다.

 

(2) 동일한 목적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또다른 의무는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육체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우리에게 필요하고 바람직한 모든 것들과 언제라도 기꺼이 결별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몸 사이에 존재하는 동맹과 관계는 피조물 사이에 가장 강력하며 가장 친밀하다. 피조물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연합을 지닌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런데 몸과 영혼이 특이하고도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기에 그 둘이 나누어지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고정관념이 전체 인성 속에 도사리고 있다. 그 둘이 연합해 존재하는 인성 전체가 그 둘이 서로 떨어지는 것을 한결같이 싫어하는 성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성향을 극복할 수 없다면, 우리는 평안하고도 기쁘게 죽을 수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인성 전체에, 곧 영과 몸이 분리되지 않은 채 다 함께 영광으로 옷 입기 위해서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기를’(고후5:4 참고) 작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결심이 없다면 신자들은 믿음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 성향을 극복하여 몸과 영혼이 나누어지는 것을 소원해야 할 것이다.

 

사도는 자기가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잇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1:23).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소원은 가끔씩 마음에 깃들어 있다가 사라지는 그런 소원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우리 안에 상주하는 어떤 성향으로서 열렬한 행동들이나 소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을 바라보는 믿음 안에 있는 영혼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지금 현재의 상태에 비할 수 없이 더 나은 것임을 알고 만족해한다.

 

(3)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 세상에서 떠나게 하실 때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해야 한다.

 

때가 되면 자신이 기꺼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그때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 거의 대부분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 영광스러운 일을 더 보기 위해 오래 살고 싶어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그 영광스러운 일을 이루실 것을 믿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고 스스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위해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연장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의 문제, 예컨대 가족들이나 친척들, 세상의 재물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런 모든 소원의 바탕에는 이생에 대한 애착이 깔려 있다. 이런저런 이유들을 버리지 않는 한, 이생에 대한 애착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죽음의 때와 기한에 대한 문제를 하나님의 뜻에 부단히 맡기지 않는 사람 중에는 위안 가운데서 기쁨으로 죽을 사람이 아마도 없을 것이다.

 

(4) 죽음의 방식과 방편에 대해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죽음의 시기와 시간뿐만 아니라 죽음이 다가오는 방법과 방식도 우리에게 특별한 시련이 된다. 이 시련에 대해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죽음의 노예로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는 우리의 힘을 소진시키고 곤비하게 하는 것과, 태워 죽이는 열기와 강한 고통, 칼과 불과 고문과 외부적인 수치와 채찍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죽는지혜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거기에 필요한 은혜들과 마땅한 도리들을 항상 기꺼운 자세로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은혜와 도리란 바로 모든 일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기뻐하시는 뜻에 부단히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무서워하는 어떤 일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실 때는 능히 그런 일을 감당할 만한 신령한 능력과 인내심도 함께 주실 것이다. 물론 그 일들이 기뻐하면서 손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평화롭고도 고요한 심정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런 믿음을 행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만나는 것들과 영원한 것들을 끊임없이 서로 대조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 영원한 복락을 얻지 못했을 경우에 처할 수밖에 없는 비참함과, 우리를 위해 준비된 그 복락을 부단히 비교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 중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부여해 줄 그 영광을 기대하지 않고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현재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는 한 우리는 앞에서 말한 그런 자세를 절대 가질 수 없다. 만일 이 세상에 있을 때 그리스도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그 영광을 조금이라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장차 나타날 것에 대해 이해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직 그 영광이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쉽고도 즐겁게 여기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심지어 죽음 자체까지도 말이다. 왜냐하면 죽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충만한 영광을 누리도록 인도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권고하는 것 말고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영광을 부지런히 묵상함으로써 얻게 되는 크고도 영광스러운 다른 유익들이 많이 있겠지만, 여기서 강론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영광스럽고도 위대한 유익들의 원천과 동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유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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