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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이드 존스, `요한복음 3장강해`, 19 장 나는 없고 당신만 있나이다 (김영희)

강대식 2018. 9. 19. 08:28

19 장    나는 없고 당신만 있나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 우리는 지금 요한복음 1:16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 이 위대한 복음서를 살펴보는 중이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이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그의 충만한 데서받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이다. 영원한 것을 받는 것이고, ‘신성한 성품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애쓰고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일반적으로 우리 경험 속에서 가 차지하는 상대적 위치에 따라 영적인 상태와 사활의 수준이 달라진다.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인격적인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참 위치는 이 살아있는 교통, 그리스도의 생명, 성령의 생명 안에 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선을 행했는지 얼마나 바쁘게 활동했는지 따지지 말라. 그런 일은 육신 안에서도 할 수 있다. 시금석은 의 관계이다.

 

하겠고’, ‘하리라 - 앞의 첫 번째 명제와 이 두 번째 명제는 긴밀히 엮여 있으며 절대 분리될 수 없다. 그가 전면에 드러나시면 내가 사라지고, 내가 전면에 드러나면 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논쟁이나 논박의 여지가 없는 영적 생활의 기본 원칙이자 절대 법칙이다.

세례 요한은 이 말을 통해 자기 일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본문에 담긴 일차적인 의미이다.

더 나아가 영적인 의미는 그의 충만함과 은혜 위에 은혜를 받기 위해서도 그는 흥해야 하고 우리는 쇠하여야 하는 것이다.

영적인 생활에는 필수 원리 및 법칙들이 있다. 첫 번째 원리는, 거듭나야 하겠다”(3:7).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 절대적으로 중요한 원리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타고난 천성 그대로는 믿을 수 없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어리석게 보인다. “거듭나야 하겠다이것은 영적 삶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두 번째 원리는, 주님은 죽기 위해 오셨다. 그의 죽음이 없었다면 구원도 없었을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4-15) 그는 반드시 높이 들리셔야 했다. 그의 충만함과 은혜 위에 은혜를 받고 싶다면 그는 흥하여야 하고 우리는 쇠해야 한다. 이것은 절대 법칙이다.

 

이 일은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의 충만함과 은혜 위에 은혜를 받을수록, 여러분의 삶과 경험에서 그는 점점 더 흥하시고 여러분은 점점 더 쇠하게 된다.

 

-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우리 삶의 가장 큰 원수는 자아이다. 마귀는 무엇보다 자아를 통해 일한다. 뱀은 자아에 호소했다. 그것이 원죄로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틀어 가장 큰 장애물이자 방해물 역할을 해왔다. 자아가 쇠하지 않고 처리되지 않으면 그의 충만함을 받을 수 없다. 그릇부터 비워야 한다. 내가 쇠하지 않으면 그가 흥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을 검증하는 가장 좋은 시금석은 첫 번째, 자신의 실상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과대평가한다.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6:3) 자신을 정확히 바로 보는 좋은 방법은 옛 청교도들이 율법의 일이라고 불렀던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율법이 온 것은 죄를 지목하고 유죄를 선고하며, 우리 실상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려면 이 모든 율법의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회개가 첫 자리에 오는 것이다. 자신을 바로 보아야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절실히 필요함을 알게 된다.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고, 전부 은혜로 받은 것이다. 이것을 알수록 자신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율법보다 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율법의 일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실상과 마음의 어둠과 무가치함을 점점 더 많이 발견하면서 계속 쇠해야 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안다고 고백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로 보는 자는 쇠하게 되어 있다.

 

자아가 쇠하고 있는지 검증하는 두 번째 시금석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기중심성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해치는 독약이요 저주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남아 있는 죄와 타락의 주된 잔재이다. 회심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아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전에는 자아의 실상을 몰랐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자아중심성이 나타나는 방식늘 자기 자신과 자기 문제만 이야기한다. 자기가 겪은 일, 자기 문제만 늘어놓는다. 이것은 자아가 전면에 있고 예수는 저 뒤 어딘가 가려져 있다는 표시이다. 자아가 쇠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기에 자신에 대한 관심이 그토록 큰 것이다. 그것은 병적인 자기 염려요, 불건전한 자기 관심이다. 내가 쇠해야 그 관심이 줄어든다.

 

나타나는 또 다른 방식은 구원조차 자신이 얻을 혜택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유년기에는 자기중심적인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계속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면 안 된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중심성을 버려야 한다. 누르고 없애야 한다. 그들은 주님 안에 있는 큰 구원을 거의 자동적으로 축복을 공급하는 일종의 매개체로 생각한다. 자신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흥하시고 우리는 쇠하느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시금석은, 나 자신과 내가 가진 것, 내가 받은 것, 내가 얻을 것, 내가 될 모습이라는 관점에서 하는 말은 점점 줄어들고 객관적 관점에서 하는 말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의 마음에 있던 것 구원의 계획, 그의 영광- 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보다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구원, 그 자체에 감격하는 것이다. 결혼할 남자를 사랑하는 신부는 오직 그 남자만을 바라본다. 그 남자만을 묘사하고 칭찬하면서 그 남자의 훌륭한 점을 이야기한다. 여러분은 이 큰 구원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자아가 쇠하고 있는 시금석은, 청원하고 요청하는 기도는 줄어들고 찬양하고 감사하며 흠모하는 기도는 늘어난다. 요구하고 청원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요구하는 바를 아뢰어야 한다. 단지 상대적인 비중을 따져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가 쇠하고 그가 흥하시면 감사하고 찬양하는 마음, 고마워하고 놀라워하며 흠모하는 마음을 더 많이 표현하게 된다. 그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이 기도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그 중심에 자아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자아가 쇠하고 있다는 가장 좋은 표시는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는 태도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자아는 항상 예민하다. 누가 자신을 모욕하거나 상처를 주거나 공격하지 않는지, 숨은 의도를 가지고 대하지는 않는지 늘 살핀다. 그렇게 평생 자신을 방어하면서 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다른 사람과 하나님을 원망한다. “왜 나는 이렇게 꼬여야 해?”라고 한다. 이것은 자아가 여전히 중심에 있다는 표시이며, 자아가 맨 앞에 있고 예수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표시이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 보라. 고린도 교인들이 아볼로나 베드로를 앞세우면서 그를 모욕했을 때 사도의 반응이 나온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1-4) 사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2:20) 때문이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토록 자아가 고집스럽게 남아 있는 것이고, 그토록 예민하게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다.

 

엎드렸기에 넘어질까 겁낼 필요 없고

낮아졌기에 교만치 않으며

비천하기에 언제나

하나님이 인도자 되어 주시도다. - 존 번연 -

 

자아가 쇠하면 자기 의존성이 점점 줄어든다. 자아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기에 자기 능력을 의지하기 쉽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라는 말씀을 잊어버린다. 자기가 계획을 세우고 프로그램을 짠다. 그리고 기도의 뒷받침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제 평생 들은 말 중에 가장 무서운 말이 이것이다. 이것은 자아가 앞에 있는 태도이다. 예수는 저 뒤편 어딘가에서 약간의 도움과 원조만 주시면 된다는 것이다.

 

교회의 과업이 무엇인가? 단순히 회심자를 많이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세상은 마귀 사탄의 통치와 지배를 받고 있다. 오직 한 분 외에는 이 권세에 맞설 이가 없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니”(고후10:4-5) 이것이 사탄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1:28-29) 여기서 자기 의존성은 찾아볼 수 없다. 사도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요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다.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라고 할 수 있었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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