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존 오웬, "그리스도의 영광", 2장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자이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영광
2장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자이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영광
그리스도의 인격은 두 가지 측면에서 숙고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인격 자체를 절대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직무의 차원에서 그 인격을 숙고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차원에서의 영광은 구별되면서도 독특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그 영광을 볼 수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주신 바 그리스도의 인격, 곧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첫 번째 요점은, 그분이 자신 안에서 교회에게 하나님의 성품과 아버지의 신격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자신의 신적 성품의 거룩한 속성들과 자신의 뜻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또는 인격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여러 성품들과 뜻을 아는 지식의 빛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고후4:4)이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히1:3)이시며,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골1:15)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에 영호로우시다.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성품과 뜻이 우리에게 영원토록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나 내세의 그 어느 시점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을 절대적인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본체이시다. 그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그의 안에 계신, 동일한 하나의 신적 본체이시다(요14:10 참고). 그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되 그 인격이 구별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써 교회에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시는 분이 되셨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신적 탁월성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그리스도 본래의 영광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영광을 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체적인 영광을 선언하고 알게 하신다.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모든 피조세계에는 여전히 어둠이 덮여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요, 교회가 서야 하는 반석이며, 우리 모든 구원의 소망의 터요, 생명과 불멸의 보장이시다. 바로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직무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뜻 가운데 녹아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 영광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은 그분을 알 수 없다.
그렇다. 불신앙은 한결같이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그분을 아는 일에 게으르다. 이러한 불신앙은 사람들의 영혼에 파멸을 가져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인격 안에서 자신의 영광을 사람들의 영혼에 나타내신다는 것을 분변하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불신자이다. 믿지 않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상태가 그러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했고, 보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볼 수도 없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어떻게 나타내시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사도가 선언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그들의 불신앙의 원인이요 내용이었다.
하나님께서 영화로우신 것은 그분의 신적 탁월성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신적 탁월성을 우리에게 나타내시지 않으면 우리는 믿음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신적 탁월성을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타내셨다. 그리고는 우리가 구원을 얻는 합당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셨다.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과,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이 하신 일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과 사랑과 은혜의 영광을 분변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신자이다. 복음이 처음 전해질 때 마귀는 여러 가지 선입관으로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큰 간계를 부렸다. 사도는 사탄의 그런 꾀가 맞아들어간 경우를 지적하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
사탄은 자기가 ‘이 세상의 신’이라는 명성을 얻기 위해 초자연적인 능력과 지혜를 나타내고 여러 가지 속임수를 써서 선입관으로 사람들의 판단을 어둡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복음의 영광스러운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애를 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는 사람들에게는 눈멂과 어둠이 해소되었다. 왜냐하면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 마음을 밝혀 주셨기 때문이다(고후4:6 참고). 이것이 바로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의 내용이다.
1.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에 대한 무지
1) 타락한 인간의 비참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징벌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교회에게 약속되었다. 고대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에 대해서 열심히 탐구했다. 그러나 사도는 세상의 지혜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자기들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확증한다(고전1:21 참고). 그들이 지닌 것은 상상이나 자신들의 이성에서 비롯된 논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롬1:21 참고).
그리스도를 가리켜 ‘사람들의 빛’,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보편적인 어둠을 감안한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며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염두해 두고서 그리스도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의의 태양’이시므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어둠이 물러가기 때문이다.
2)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어둠,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가 모든 악의 근원이다
사탄은 어둠과 무지 위에 자기의 나라와 보좌를 세웠다. 사탄은 스스로 속임수를 써서 ‘이 세상의 신’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어둠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자리까지 높아져 사람들의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세상에 가득 차 있는 분냄과 피 흘림과 혼돈과 폐허와 잔인함과 비열함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샘에서 솟아 나온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그 성품과 속성들을 대변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있는가?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요14:8)라고 간청하던 빌립의 요구가 필요 없을 만큼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인격의 분명한 형상이요, 아버지의 성품을 대변하는 자’로 보는가? 그리스도를 본 사람이 아버지를 본 사람임을 믿는가?(요14:9 참고).
이것이 바로 구원 얻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보는 첫 번째 단계이다. 또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첫 번째 경우이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점에서 영원히 영광스러우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광을 마땅히 갈망하고 애써 보아야 한다. 아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모형과 그림자로서만 볼 수 있었던 다윗의 간절한 기도를 보라(시63:1-2). 아직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그 영광을 보지만 앞으로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보는 것처럼 그 영광을 보게 될 때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는가?(고후3:18).
모세는 하나님의 크고 기이한 일들을 보고서도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출33:18). 영혼의 궁극적인 복락과 안식과 만족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데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어렴풋이나마 보고자 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장차 누릴 복락의 상태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모세처럼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의 영광을 더 보기를 갈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거기에 도달하느냐 하는 것이다.
1) 신성의 가장 영광스러운 속성들 가운데 하나는 무한한 지혜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는 하나님의 모든 외적인 행동들을 지휘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런 외적인 행동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다른 모든 탁월한 속성들이 현저하게 드러난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모든 영광은 무한하신 지혜로 말미암아 나타난다.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그 자체로 신성의 진수요 영원한 속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찬탄할 뿐이다. 그 지혜가 작용하고 열매를 나타낼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지혜를 분간할 수 있다.
그것들 중에서도 특히 탁월한 것은 교회를 구원하는 위대한 일에 대한 지혜이다. 사도는 그 일을 높이 찬양하였다(엡3:9-10).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택하고 인치셔서 그 무한한 지혜를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직무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본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그것을 볼 수 없다(고전1:22-23).
창조와 섭리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것과 비교해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 중에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분에 대한 신뢰를 발견할 수 있다
사도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나타난 결과뿐만 아니라 그 본질도 숙고해야 한다. 곧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복된 계시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 무슨 방도로 그 사랑의 영광을 볼 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으며, 모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서 가리어져 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본성적인 개념들은 거의 다 부패해 있으며, 그것들 중 가장 선한 것도 약하고 불완전하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는 놀라운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알며, 무엇을 통해 그것을 보는가? 사도는 그 점을 선언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4:9). 이것만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나타내는 유일한 증거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의 사명과 인격과 직무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드러난다. 그것이 없이는 모든 사람들은 이 신적 사랑의 참된 본질과 탁월한 작용에 관해 무지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된다. 이 영광은 그리스도를 ‘만물 가운데 뛰어나게 하시려고’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영화로우시며 아름답고 탁월한 분이신가를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정당한 표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피조물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볼 수 있는 시각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숙고하는 일이야말로 하늘의 영광에 최대로 동참하게 만든다. 이제 나는 하늘에 속한 것들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겠다.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가? 그 때문에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는가? 그 때문에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갈망하는가? 당신 속에 있는 이 소망에 관해 묻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댈 수 있으며, 왜 이런 것들을 바라는지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를 향해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공상과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영적이 사람이라면 영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 특권들을 기쁨으로 활용해야 하며, 부지런히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는 거룩한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은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직접 보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영적이지 못하거나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서 우리의 생각과 정서가 늘 다른 것들을 즐거워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을 복음의 위대한 비밀을 생각하는 데 기울이지 않거나 기울일 능력이 없는 주된 이유다. 이런 잘못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 속한 삶과 신령한 기쁨에 대해 매우 낮은 수준에 처해 있다.
3.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기 위한 지침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이라 생각하고 귀하게 여기라
하늘의 영광의 첫 열매들이 그 안에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기 때문이다(요17:3 참고). 만일 우리가 그것을 놀라운 특권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멸시하기 마련이다.
2) 그 특권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영적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많은 영적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사도 바울처럼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것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3) 사람들이 악한 습관에서 빠져 행하는 일들을 보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관점을 얻는 방편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라
사람들의 마음이 자기 욕심에 이끌려 그 대상에게 마음이 완전히 빼앗겨 있다면, 끊임없이 그 대상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쉬지 않고 천번도 더 궁리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영광에 합당하게 바꾸어 우리 마음의 눈이 부단히 그 영광을 바라보게 된다면, 어찌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는 것을 게을리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거룩한 행동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게 될 것이다.
4)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비해 피조세계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하늘의 성도들에게 복이 있다고 할 때, 그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복된 영혼들에게 어떤 효과를 가져오겠는가? 그것이 그들을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그리스도를 닮게 만들지 않겠는가?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고 만족하게 하며, 안식과 즐거움을 주고, 형언할 수 없는 충족감을 가지게 하지 않겠는가? 우리도 그런 복된 상태를 기대하고 바라고 있지 않은가?
그 복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삶을 영위하기 위해 연습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영혼 속에서 변화하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것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묵상하고자 연습하는 사람들에게는 보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