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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지 래드, `하나님 나라`, 8장 신적 활동으로서 임재하는 하나님의 나라

강대식 2018. 10. 3. 09:55

8장 새로운 구원의 시대로서

임재하는 하나님의 나라

 

구원의 영역

 

하나님 나라의 근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 혹은 다스림이다. 예수님의 독특한 요소는, 하나님의 그의 왕적인 통치를 영광 가운데서 드러내시기 전에 그의 통치가 종말론적 완성에 앞서서 미리 인간 역사를 침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실레이아의 모든 용례들이 이러한 역동적인 개념으로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구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람들이 들어가는 하나의 종말론적 영역으로 그리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나 혹은 다가올 시대에 들어가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두 가지 모두 영생과 동일한 의미를 지녔다(10:17-30).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의 종말론적 영역으로 말씀하심으로써 보통 사용하는 어법을 탈피하셨을 뿐 아니라, 그는 또한 그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현재 임재하고 있는 구원의 영역을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하셨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의 축복들을 누리는 구원의 영역이 생겨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사실상 이미 예수님의 사역 속에 스스로를 드러냈다면, 그로 인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현재의 다스림의 축복들을 누릴 수 있는 하나의 영역이 생겨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가장 명확한 실례를 누가복음 16;16에서 볼 수 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세 가지 요소가 있다: 한 시대(율법과 선지자의 시대)가 요한으로 끝났다는 것과, 그 때부터 새로운 활동- 하나님 나라의 선포- 이 일어나서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는 것과, 그 결과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새로운 구원의 영역으로 간주됨)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다른 말씀들도 현재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간다는 동일한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21:3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너희는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23:13).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11:52).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12:34). 11:11의 경우 예수께서는 (지금) 천국 안에 있는 자는 세례 요한보다도 큰 자라고 말씀하셨다.

 

세리들과 창기들이 제사장들과 장로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말씀의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그것을 현재의 활동으로 보는 해석이다. “버림을 당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밀려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새로운 구원의 시대로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구절은 마 11:11-13인데, 이는 세상에 나타나는 현재의 역동적인 하나님의 활동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장 중요한 말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말라기 3:1(11:10)의 예언이 세례 요한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단언하셨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에 속한 그 어떤 성격이 실재한다고 하셨다. 그 회복의 날이 곧 회개와 용서를 통해서 백성이 종교적으로 새롭게 되는 날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11: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의 난해한 말씀의 해석이다. 요한의 문제 그가 선포했던 종말론적 구원과 심판이 예수에게서 성취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11:4-6에 나타난 예수의 답변은 메시야의 구원이 이미 임재해 있고 성취되는 과정 중에 있으나 전혀 예기치 못하던 방식으로 그렇게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요한의 제자들에게 확신케 해주었다. 그러므로 천국에있는 자들은 곧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시행하시는 메시야의 구원을 체험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세례 요한처럼 큰 선지자가 되는 것보다도 그 복된 소식을 듣고 그 메시야의 구원의 치유와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큰 일이었던 것이다.

 

이 해석은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인정하는 세 가지 사실에 의해 뒷받침을 받는다. 1) 11:11이 천국 안에 있는 자들과 세례 요한을 대비시키고 있다는 것; 2) 12절이 요한의 때 이후부터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되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씀한다는 것; 3) 13절이 요한에게서 한 시대-율법과 선지자의 시대-가 끝을 맺었다고 말씀한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1) 요한이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를 끝맺음 했다; 2) 요한 이후로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3) 이 새 시대를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른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들에 대한 약속들이 성취되는 바로 문턱에 서서 새로운 질서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그것들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는 준비의 시대를 절정에 이르게 했다. 성취가 준비보다도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그 성취를 경험한 자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라 할지라도 요한보다 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는 행위 때문이 아니라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그를 위하여 행하시는 일 때문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 안에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교회 안에 속하여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가 베푸는 구원의 새로운 질서 속에 속하여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천국에 있는 이에 대한 이 말씀은 중립적인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대한 다른 말씀들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나라, 그의 왕적인 다스림이 역사 속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축복의 영역이 창조된 것이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나라로 불린다. 그 나라의 완전한 실현은 아직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 나라는 현재에 임재하고 있는 것이다. 11:11-13에 대한 이 해석은 누가복음도 지지한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구원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그 새 질서의 축복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소경들이 시력을 되찾은 것이 아니며, 앉은뱅이가 모두 치유받은 것은 아니었고, 나병환자가 모두 깨끗함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소수의 죽은 자들이 살아났을 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표증들은 다만 하나의 표시였을 뿐 그 충만한 완성이 아니었다. 에스카톤이 임하여 이 시대가 사라져 갈 때가 되면, 귀머거리나 소경이나 나병환자나 죽은 자들이 없을 것이다.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 바가 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신비한 사실이 있다. 그 축복들이 옛 시대에 들어와서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전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옛 질서가 모든 사람에게서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다. 새 질서는 다가올 시대나 에스카톤이 아니다. 다만 새 질서가 옛 시대 속에 숨겨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처럼 숨겨져 있는 새 질서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가져다 주며,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11:20-24).

 

이 새 질서는 모든 인간 실존을 다 포괄하는 하나의 세상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그것은 옛 시대 속에 감추어진 새 질서였다. 요한 이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새 질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들을 귀를 가진 자들, 회개한 자들, 예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은 자들만이 그 새 질서 속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 안에있다는 것은 비록 죽음과 죄의 질서, 악한 시대 속에 살면서도 그 안에서 메시야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그 축복들을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의 선물로서의 하나님 나라

 

이 축복의 새로운 영역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묻게 되면, 우리는 바실레이아가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와 구원의 영역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생명과 구원의 선물을 지칭하는 뜻으로도 쓰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독창적인 요소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야의 구원이 내포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종말론적 완성의 때에 그 나라는 의인들이 값없이 상속받을 상속물이다(25:34). 다가올 시대에 하나님의 통치의 선물인 생명의 축복을 지칭한다(25:46).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10:23-24)과 영생을 받는 일(10:30)을 마치 동일한 개념인 것처럼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작은 양무리들에게 기꺼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12:32).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론적 완성의 때 이전에 역사를 침입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이기도 하다면, 우리는 현재의 하나님의 다스림이 그의 백성들에게 예비적인 축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옛 시대에서도 받을 수 있는 선물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수많은 말씀들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모든 것보다도 귀한 소유물인 보배, 혹은 값비싼 진주와도 같다(13:44-46). 그것은 지금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며(6;33), 어린 아이들이 선물을 받듯이 받을 수 있는 그런 것이다(10:15=18:16-17). 하나님의 통치는 무시무시한 권력이 아니라 하나의 선물이다. 어린아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자손들에게 요구되는 신뢰성과 수용성을 실례로 나타내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되는 것은 그들이 그것을 선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의 선물인 것이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라는 약속(7:7)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찾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것이 찾아지면 모든 요구가 만족을 얻게 된다(12:31). 두드려야 할 문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다.”

 

팔복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의 선물로 본다. 심령이 가난한 자, 의를 위하며 핍박을 받는 자는 천국을 선물로 얻는다(5:3,5). 팔복의 주요 목적은 완성의 때에 주어질 축복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복된 상태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영적 빈곤의 상태로 인하여 괴로워 하는 자에게 약속된 위로는 현재인 동시에 미래이며, 굶주림을 채울 것이라는 말씀 또한 마찬가지이다. 두 번 언급되고 있는 천국을 선물로 준다는 말씀에는 아마도 현재와 미래 모두가 포함될 것이다. 팔복의 말씀이 제시하는 것은 종말론적 구원이지만, 동시에 현재의 복된 상태인 것이다.

 

구원의 선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원은 종말론적 축복과 현재의 축복을 모두 지칭한다. 구원은 일차적으로 종말론적 선물이다. 단순히 (영원한) 생명에로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고(8:35), 주의 즐거움에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25:21). 이 미래의 구원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구해냄을 받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갖는 것이 그것이다. 전인을 다 포괄한 부활의 생명이다. 또한 죄로 인하여 깨어졌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의 회복을 의미한다.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사람의 생명을 잃는 것을 의미하며(10:39).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8:36). 멸망 당한다는 것이다. 게헨나의 불(10:28), 영원한 불(18:8), 어두움(8:12)으로 묘사되고 있다. 멸망이란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 상태에서 제외되는 것을 의미한다.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예수님의 사역은 미래적 의미가 있는 동시에 현재적 의미도 있다. 예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으신 것은 미래의 심판에서 그를 구하기 위함인 동시에 현재적 구원에로 그를 이끌기 위함이었다. 회개하는 삭개오게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9-10). 잃어버린 자는 곁길로 간 것일 뿐 아니라 구원받지 못하면 멸망할 위기에, 영원한 죽음에 처해 있는 것이다. “내가 그 잃어버린 자를 찾으며 --, 내가 내 양 떼를 구원하리라”(34:16,22). 예수께서는 바로 이 말이 자신에게서 성취되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베푸신 구원은 현재적 구원이었다. 그러나 그 축복은 동시에 미래에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나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는 종말론적 구원이 아니라 현재의 구원을 묘사하는 것들이다(15).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와 그 아버지의 집에 기쁨을 주었다는 내용은 예수께서 삭개오를 비롯해서 그의 교제를 받아들인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베푸신 현재적 구원의 축복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 비유에서 형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나타낸다. 형이 그 아버지의 슬하를 떠나지 않았듯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들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참된 이스라엘로 자처했다. 그러나 그 형 역시 잃어버린 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 아버지와의 참된 교제를 알지도 못했고, 그 아버지 집의 즐거움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종말론적 완성을 미리 바라보면서 현재의 교제를 선물로 베푸는 일은 음식을 나누는 교제를 통해서 표현하신 행위를 통한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의 식탁 교제야말로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의 즐거움과 교제를 미리 바라보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 식사의 종교적 의의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2:17)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잘 반영되어 있다. 예수께서 죄인들을 모아서 자신과 식탁 교제를 나누실 때에 그는 자신의 메시야적 사명을 이루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은 잃어버린 죄인들이 회복될 때에 큰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진리는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에 하늘에 큰 기쁨이 있다는 사실이다(15:7). 그러나 그 하늘의 기쁨은 이 땅에서 예수께서 회개하는 죄인들과 나누는 식탁 교제에서 미리 예시되었던 것이다.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에서 메시야적 즐거움의 면모를 볼 수 있다. 혼인 때에는 금식하는 법이 아니다. 신랑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금식이 아니라 즐거움과 기쁨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의 제자들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이러한 혼인 잔치라는 메시야의 상징으로 묘사하신 것이다. 구원의 날이 이미 왔고, 혼인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다. 비통한 울음은 설 자기가 없고 오직 기쁨과 즐거움만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메시야적 구원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또한 예수께서 행하신 병 고치는 이적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경우 복음서 기자는 구원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 안에서 실재한다는 사실은 혈루병에서(5:34), 소경된 상태에서(10:52), 귀신 들린 상태에서(8:36), 그리고 심지어 죽음 그 자체에서(5:32) 구원받는 것을 의미했다. 그 구원들을 메시야적 구원이 실재한다는 증거라고 말씀하셨다(11:4-5).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영혼만이 아니라 전인이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육체적 구원은 믿음의 응답을 필요로 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5:34;10:52). 육체적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영적인 응답이 필요했다. 치유의 이적은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병 고치는 일이나 귀신을 내어쫓는 일은 구원의 소극적 면이었다. 적극적인 면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이 들어와 임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 생명에 들어가지 않으면 귀신이 다른 귀신 일곱을 데리고 다시 돌아올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형편이 처음보다 훨씬 더 나빠질 것이다.

 

육체적 구원과 그 영적인 면이 서로 하나로 묶어져 있다는 사실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들을 고치신 일에서 잘 나타난다. 예수께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사마라인에게 예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17:19). 그 사람이 받은 구원혹은 온전함은 육체적인 치유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영적인 상태를 시사하는 것이다.

 

현재적 구원이 육체적일 뿐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시몬의 집에 있던 죄된 여인의 사건을 통해서 입증된다. 그녀의 눈물과 사랑의 표현이 그녀의 회개를 입증해주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7:50)고 하셨다. 그 여인의 질병은 도덕적인 것이요 영적인 것이었다. 그 여인이 받은 구원의 의미는 바로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라는 말씀에 잘 드러나 있다(7:48).

 

죄 용서의 선물

 

이 죄 용서에 대한 말씀은 메시야적 구원의 더 깊은 의의를 지적해준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과 서기관들 사이의 갈등은 예수께서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셨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런 주장은 신성모독이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2:7). 선지자들은 죄의 용서가 메시야 시대의 축복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을 말씀했다. 심판자시요 권세자이시며 왕이신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셔서 질병이 전혀 없을 것인데, 이는 여호와께서 모든 불의를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했다(33:24). 구원받은 남은 자는 죄를 용서함 받을 것인데, 이는 그들의 죄가 바다의 깊은 곳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7:181-20). 하나님이 새 언약을 세우시고 그의 법을 마음 속에 새기시며 자신과 완전한 교제를 허락하시며 죄를 용서하실 것이다(31:31-34). 다윗의 집에 샘이 솟아나 하나님의 백성을 모든 죄에서 깨끗이 씻을 것이다(13:1). 세례 요한이 죄의 용서를 약속했었고(1:4), 예수께서 이 약속을 성취하신 것이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외적인 증거였다(2:10).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서 죄 용서가 중심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죄 용서에 대한 비유에서 잘 나타난다(18:23-35).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용서보다 앞서며 그것이 또한 인간의 용서의 조건이 된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죄 용서의 교리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그는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죄를 용서함 받는 새로운 경험을 주신 것이다. 그는 시몬의 집에 있던 여인에게 죄가 용서함 받았음을 선언하신 것이다(7:48). 이것이 그 여인이 받은 구원이었다.

 

의의 선물

 

죄 용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의이다. 의란 주로 윤리적인 어떤 특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요, 죄책에서 해방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6:33),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는 것은 곧 거기에 수반되는 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의란 하나님의 요구인 동시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는 종말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도 나은 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했다(5:20). 이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화나, 탐욕이나, 복수 같은 것에서 자유로와야 했다(5:21-48). 만일 그런 완전한 의를 성취하는 일이 인간의 노력에만 맡겨졌다면, 그 어느 누구도 그 의에 도달할 수가 없다. 그 의는 하나님의 선물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스스로 이룩한 의를 버리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모든 것을 다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는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과 정반대의 입장에 세리가 서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내어 맡겼다. 그는 아무것도 없었다. 의의 행실도, 공적을 자랑할 만한 행위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스스로를 완전히 내어보였다.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18:14).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그의 의는 그 자신이 이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 비유의 가르침은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과 동일한 것이다. 다만 십자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산상수훈에 나타나는 의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채움을 입으리라는 약속(5:6)은 자신의 불의함을 인식하면서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주는 약속이다. “여기서 의란 유대인들이 생각하듯 공적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지하게 바라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을 가져왔다. 사람들을 이끌어 종말에 있을 구원을 실제로 미리 맛보도록 해준 것이다. 예수께서는 죄의 용서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죄의 용서를 베푸셨다. 그는 그저 사람들에게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교제를 확신시켜주신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 나라를 지고 있는 자기 자신과의 교제 속으로 사람들을 초청하셨다. 그는 그저 심판 날에 모든 것을 갚아주리라고 약속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그들에게 현재의 의를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는 종말에 육체적 악에서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신 것만이 아니다. 자신이 직접 나가셔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능력을 발휘하여 보이셨고, 사람들을 질병과 심지어 죽음에서 구원해 내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구원의 시대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임재의 의미이다.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다스림에 스스로를 굴복시킨다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선물을 받아들이며 그 축복을 누리는 상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취의 시대는 현재이다. 그러나 완성의 시기는 아직 다가올 시대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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