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하나님 나라`, 4장 의와 평강과 희락
4. 의와 평강과 희락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는 모든 것에 첫 번째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그 기준은 크기이다. 기독교라고 제시하는 것이 작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우주에서 가장 크다. 하나님 나라는 광대하며 영광스럽다!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 나라는 크고 심오하다. 하나님 나라는 외형이나 의식이나 예식과 관련된 작고 고상한 것 정도가 아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과 하지 않는 일 정도가 아니다. 깔끔하고 아담하고 작은 삶 정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크고 거대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의라는 큰 물음에서 시작한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라. 하나님을 보고, 의를 보라!” 기독교는 내가 지금까지 했던 방식으로 내 자신을 생각하기를 멈추고 하나님을, 하늘을, 나와 그분의 관계를 보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내 도덕성이 아니며,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내 생각이 아니다.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멈추고, 하나님을 보라!” “의”라는 말은 즉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올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히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분은 의로우시다. 의는 그분의 거룩하고 영원한 속성 가운데 하나이며, 그분의 거룩의 한 부분이며, 그분의 영광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의롭고 공정하시며, 선하고 참되시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의이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는가라는 질문과 맞닥뜨린 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우리가 이것과 저것을 하면 전적으로 의롭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의는 우리의 행동이나 사상이나 예배나 의식이나 그 외 잡다한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의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계시고 네가 있다. 너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너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고, 그분과 대면해야 하며, 네가 육체로 있을 때 살았던 삶을 해명해야 한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9:2) 욥의 오래된 물음과 맞닥뜨리기 전에는 의를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도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자신의 행동을 의지하여 살고, 자신의 선을 의지하여 살고, 자신이 훌륭하고 부족한 부분이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며”(히9:27).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므로(시100:3)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고 의로운 방법으로 심판하시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으므로, 또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다.
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그가 했던 설교의 주제는 의였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17:31) 세상은 의로 심판받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에게 그분의 거룩한 율법과 길을 따라 살기에 충분한 재능과 능력과 기질을 주셨으므로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기대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으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하는 삶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에 빛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이것은 의의 삶이다. 이 기준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바리새인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16:15). 결론은 이것이 의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분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나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도 보신다. 나의 생각, 나의 바람, 나의 상상까지도 보신다. 그분은 내 마음의 깊은 곳을 보시며, 내 존재의 중심을 보시며, 이런 것들에 따라 나를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의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교회 출석을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는지 말하거나,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마시지 않는지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여러분 자신이 창녀들과 술주정꾼들보다 얼마나 더 나은지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한가?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구약 시대의 이사야 선지자조차도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64:6)라고 말하였다. 율법에 대하여 의롭다고 생각하였던 다소의 사울도 진정으로 의를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하였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9). 일단 의를 하나님이 규정하신 대로 이해하면, 우리의 모든 선은 하찮은 것이 된다. 배설물과 쓰레기가 된다. 우리의 모든 의는 추하고 더러우며 곪아 있다. 악취가 난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그러므로 의에 대한 물음은 이것이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렘13:23)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느냐? 우리가 우리의 죄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정결하고 깨끗하지 않는 한, 우리가 하나님과 같지 않는 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는 순간, 의복과 포도주의 종류와 그 외에 사소한 모든 것에 대한 하찮은 관심은 완전히 우스운 것이 되며, 의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죄와 죄의 권세로부터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사51:10). 이것이 내게 필요하다. 나는 적극적으로 의롭게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에게 “두 배의 치유”를 주시려고, 나를 죄와 죄의 권세에서 정결하게 하시려고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셔서 그 모든 것을 행하셨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그는 앞서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사신(대사)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5:19-20).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명부, 우리의 이름 아래 다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이름 밑에 있는 기록을 그분의 이름 아래로 옮기셨다. 이것이 “돌린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고 죽으셨다. 우리의 죄가 그분을 죽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그분에게 돌려졌고 우리에게서 제거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값없이 용서받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죄의 권세, 곧 악한 본성이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싶고, 죄악된 생각과 삶과 욕망을 버리고 싶다. 내가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으려면, 먼저 마음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해야 하며 의로운 본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그렇게 하려는 것이 난센스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렇게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 돌리실 때,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돌리신다. 나의 명부에 있던 죄가 그분의 명부로 옮겨진다. 그분의 선과 의와 정결이 나의 이름 아래로 옮겨진다. 하나님은 나의 옷을 벗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그분의 흠없고 완전한 순종의 삶을, 그분의 거룩한 본성을 나에게 입히신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분은 새로운 분이며 나는 그분 안에 있다. 하나님은 그분 안에서 그분의 의를 입은 나를 보신다.
“주 예수여, 당신의 의와 피, 내 아름다움, 내 영광의 옷이니 불타는 세상 속에서 이 옷 차려입고 기쁨으로 내 머리를 들리이다.” - 친첸도르프
이것이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여러분과 저의 작은 선이 아니다. 기독교는 무엇을 행하느냐와 행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는 제가 이전보다 얼마나 더 나아졌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러면 그분의 흠 없고 완전한 의가 보일 것이다. 여러분이 그분을 믿으면, 그분의 의가 여러분에게 주어지고 여러분은 그분의 의를 입게 될 것이다.
기독교는 “평강”이다. “의와 평강”이다. 의에는 필연적으로 평강이 따른다. 자신의 영혼을 염려할 때, 죽음 뒤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할 때,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달을 때 어떻게 평안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된 진리를 믿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의 길로 믿는 순간, 곧 모든 것이 바뀐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과 화목(평화)하게 된다.” 이것으로 나의 무익한 모든 노력은 끝이 난다.
루터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완벽한 그림을 보여준다. 그에게는 노력, 고뇌, 불안, 고통 등 모두가 헛수고이었다! 그때 루터는 갑자기 깨달았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순간, 그의 영혼에 평안이 찾아왔다. 그가 결코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를 위해 해놓으셨다. 이것을 깨달을 때, 그의 영혼에 평안이 넘쳤다.
나는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한 소심한 두려움에 빠지지 않는다. 그분은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위해 그분의 외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시다. 내가 이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10:19). 여러분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었으며 그분의 의를 입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길은 분명하다. 그 길은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이며, 이제 활짝 열렸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목하며 여러분 안에도 평안이 있다. 이제 영혼의 안식을 찾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당신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우리 마음은 쉴 수 없나이다.” 안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과 화목하고, 내면의 평안을 누리라. 이웃과도 화목하라. 그들도 우리와 똑같으며, 우리와 똑같은 것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이웃과 화목하라. 우리는 함께 하나님과 화목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평강을 찾았는가? 여러분의 영혼은 아직도 불안한가? 더 멀리 가기 전에 그분께 고백하라. “내 손의 수고로 율법의 요구를 채울 수 없고 쉼없는 열심과 늘 흘리는 눈물로도 죄 속할 수 없나이다. 주여, 오직 주께서 구원해 주셔야 하나이다” - 오거스터스 탑레이디
그분께 고백하라. 그러면 고통받는 여러분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그러면 바울의 마지막 말대로 될 것이다. “성령 안에 있는 --- 희락이라”.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기독교라 불릴 자격이 없다. 그러나 단지 도덕적일 뿐이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의 기쁨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굳게 믿는 하나님 나라는 기쁨으로 넘친다. 오순절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들이 얼마나 행복했던지 사람들은 그들이 술에 취한 줄 알았다! 그들은 고무되어 있었고 의기양양했으며 승리의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께 영광을 올리고 있었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여러분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왔다가 사라지며, 내 마음이 변하면 따라 변한다. 성령의 기쁨은 자기 죄가 용서되었음을 아는 사람들의 기쁨이다.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표현했듯이, 성령의 기쁨은 자신이 지고 가던 무거운 죄짐이 갑자기 벗겨져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보는 사람의 기쁨이다. 십자가가 죄짐을 벗겼다.
그러나 단지 나의 죄가 용서된 것만이 아니다. 나는 내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 있음을 안다. 나는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은 나를 그분의 가족으로 입양하셨다. 여러분이 이 사실에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큰 영예가 찾아올 때 기쁨이 충만하여 모두에게 말하지 않겠는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음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고 기쁨이 충만해야 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다. 이것이 “성령 안에 있는 --- 희락”이다.
이러한 기쁨의 가장 놀라운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환경을 완전히 초월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기쁨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초월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5:3). 모든 것이 우리를 대적할지라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사실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감옥에 가둬 보라.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
그분의 백성이, 그분의 성도들과 순교자들과 고백자들이 교수대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들은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에게 던져지면서도 찬송했다. 그들은 종교개혁 시대에 화형을 당하면서도 찬송했다. 그들은 이후로 늘 이렇게 했으며 앞으로도 이렇게 할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쓴 놀라운 편지를 보라. 그리스도인이 바울처럼 말하고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이것이 성령의 기쁨이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혀를 자를 수는 있지만 여러분의 기쁨을 빼앗을 수는 없다. 여러분의 눈을 멀게 할 수는 있지만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다(벧전1:8).
마지막으로, 너무나 놀라운 것은 기독교가 “영광의 소망”이라는 것이다(골1:27).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이 말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는 뜻이다(빌1:23). 이 기쁨은 꺼질 수 없고, 사라질 수 없으며, 빼앗길 수도 없다. 여러분을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사람들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분, 이제 여러분이 사랑하는 영광스러운 분 앞으로 즉시 옮기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성령의 기쁨이다. 이것이, 이것만이 기독교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