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존 C. 라일, "옛 길", 8장 칭의 (김영희)

강대식 2019. 1. 22. 20:24

8 장     칭의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5:1)

 

1. 참 그리스도인의 주요한 특권, 즉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림에 대해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이 화평은 하늘과 땅의 주인되신 분과의 친교를 조용하고도 지적으로 인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그의 거룩하신 창조주 사이에 아무 장벽이 없음을 느낀다. 그는 모든 것을 보시는 분의 눈 아래 있음을 깨달으면서도 아무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모든 것을 보시는 분께서는 자신을 바라보시면서도 불쾌해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이와 같은 사람은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보아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평안을 누린다. 이와 같은 사람은 영원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잔잔하다.

 

나는 그 어떤 행복도 이 화평이 미치는 행복과 비교할 수 없음을 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4:7)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교도가 고행을 하고 자신들이 만든 초라한 형상에 예배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화평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지닌 신앙의 가치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 이 화평을 소유 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당신은 화평을 누리는가? 만일 당신이 이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당신은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다. 당신은 영원을 소유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 화평을 누리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다.

 

2. 그 특권이 흘러나오는 샘, 즉 그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에 대해 참 그리스도인의 화평은 근거가 없는 애매모호하고 꿈꾸는 듯한 감정이 아니다. 그는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칭의가 없이 참 화평을 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화평은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고 그의 죄의식(죄책)이 제거되었음을 깨닫게 됨으로써 생긴다. 그는 의롭게 되었다. 그에게는 완전한 의의 옷이 입혀졌으며 이제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천사 곁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즉 하나님은 그를 의로운 자로 여기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화평을 누린다.

그는 본래 가련하고 연약하며 결점이 많은 죄인이 아닌가? 그는 본래 빚진 자가 아니었는가? 그는 본래 깨뜨려진 율법의 저주를 면할 수 없지 않았는가? 그는 본래 형벌을 받아 마땅하지 않았는가? 모두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가? 우리가 의로워지지 아니하였다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기자.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아 사라졌다는 합리적인 소망을 지녀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양심의 증거를 지녀야 한다. 이것이 없이 화평을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리고 심판의 그 두려운 날이 이르면 의로워진 사람의 소망 외의 어떤 소망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며, 칭의에 기초한 화평만이 굳건하고 실제적이며 깨뜨려지지 않는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3. 샘이 솟는 바위,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참 그리스도인이 의로워진 것은 그 자신의 선함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완전한 표준에 비추어 판단해 본다면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그는 의로워진 한 죄인이며, 용서 받은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어떤 일로도 의롭게 될 수 없다.

1) 참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인하여 의롭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그리스도인의 보증인과 대리인이 되셔서 그가 져야 할 모든 짐을 지셨고 행하셨다.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빚을 계산하여 자신의 죽음으로써 하나도 남김없이 다 치르셨다.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 마귀는 그에게서 아무 흠도 찾을 수 없었다. 그분은 율법을 성취하심으로써 영원한 의를 가져오셨고 그래서 그의 백성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옷이 입혀졌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는 참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사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위하여 무덤으로 가셨고 그를 위하여 부활 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고 그곳에서 그의 영혼을 위하여 간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구속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행하셨고 모든 것을 지불하셨으며, 모든 것을 당하셨다. 여기에서 참 그리스도인의 칭의가 비롯되고 여기에서 그의 화평이 솟는 것이다. 그 자신 안에는 아무것도 없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자신의 영혼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누린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얹혀지고 그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얹히게 된다. 그래서 이제 그는 무죄한 자로 여겨진다. 하나님은 지금도 의로우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건치 아니한 자를 용서하신다. 인간 중 어느 누가 이같은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 소식을 듣는 자마다 찬송하지 아니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2) 칭의는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고 불러 마땅하다. 그리스도에 의한 칭의라는 방식만큼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밝히 드러내어주는 방식은 없다. 이것은 태초부터 의로워지게 된 아담의 자손이 그들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던 유일한 옛 방식이다. 아벨 이후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전혀 긍휼을 맛볼 수 없었다. 모세 이전에 세워졌던 모든 제단은 그를 가리키기 위한 것이었고, 모든 제사와 의식은 이스라엘의 자녀에게 그를 가르쳐 주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또 모든 선지자들은 그에 대하여 증거하였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인간 본성의 욕구와 요구를 정확히 충족시켜 주는 칭의 방법이다.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양심이 남아 있다. 인간의 양심이 아직 기갈을 느끼지 않을 때에는 어느 종교적 장난감이든 그 사람의 영혼을 만족시켜 잠시 동안은 그에게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일단 그의 양심이 갈증을 느끼게 되면 어느 것도 그를 평안케 해줄 수 없고 오직 실제적인 영의 양식, 곧 그리스도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인간의 양심이 정말로 깨어나게 되면, 마음 속에서는 내 영혼을 위해서 어떤 값을 치러야 한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어야 한다. 내 죄로 인한 형벌과 고통이 있어야 한다. 내 영혼을 위한 제사장이 계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평이 없다라는 소리가 들리게 될 것이다. 복음은 즉시 그리스도를 만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 보증과 임명을 받아, 이미 그의 구속을 위한 속전을 십자가로 지불하신 것이다. 그는 무거운 짐에 눌린 죄인들의 큰 제사장이시고, 전능한 용서자시며, 은혜로운 위로자이시다.

 

당신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귀로 듣고, 그분의 이름을 계속해서 믿음으로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에 대하여 어떤 체험적 지식을 지니고 있는가? 화평은 그가 주신 특별한 선물이다. 이 외에 다른 모든 화평은 흉내이며 기만이다.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도 갈증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배고픔을 느낄 수 없으며, 아무 휴식을 취하지 않고서도 지칠 줄 모르게 될 때, 그때가 이르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없이 화평을 누릴 수 없다. 당신은 이런 화평을 누리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만족스럽게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결코 쉬지 말라.

 

4. 그 특권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 손, 즉 믿음에 대해

한 인간이 그리스도와 그가 주시는 모든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수단은 단순한 믿음이다. 그것은 참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표시이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주 예수를 믿는다. 한 인간을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그를 의롭게 하는 것은 단순한 믿음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 믿음을 지니게 되면 인간은 즉시 완전히 의롭게 된다. 의롭게 되는 것은 장차 누릴 특권은 오랜 시간과 큰 고통 후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을 구별하는 특징으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만큼 많은 오류를 빚어내는 주제도 없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모든 사람이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에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도 있다.

 

1) 참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단순히 감정의 문제만은 아니다. 단순히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만이 아닌 속사람 전체의 한 행위이다. 그것은 머리와 마음과 의지의 행위, 이 모든 것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한 행위이다. 그것은 영혼의 한 행위이다. 즉 이 행위 안에서 자신의 죄의식과 위험과 아무 소망 없음을 보고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하여 내어주심을 본다. 이 행위 안에서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걸고, 그리스도께 도망치며, 그리스도를 자신의 유일한 소망으로 받아들이며, 구원을 기꺼이 그에게 의존하게 된다. 그것은 즉시 하나의 습관을 낳는 행위이다. 그의 주된 생활과 행동은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참 믿음은 그 자체로서 어떤 공적이 되는 것이 아니며 구세주의 손을 꼭 붙잡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이 그리스도께로 가져가는 것은 단지 죄인의 영혼뿐이다.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칭의라는 영광스러운 선물을 받고, 취하고, 받아들이며, 움켜쥐고, 맞아들이는 것 그리고 날마다 새로워진 행위들로서 그 선물을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인의 모든 은혜 가운데 믿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또 그 모든 것 가운데 인간이 실제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믿음이다. 인간이 믿음에 대하여 범하는 오해는 인간 본성의 교만이라는 뿌리 깊은 근원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 그 값을 전혀 치르지 않고 받기만 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 믿음이라는 것에 도무지 이해할 수 가 없다고 생각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영혼의 손이다.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영혼의 눈이다. 세워진 놋뱀처럼 그를 바라보고 고침을 받는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영혼의 입이다. 주리는 자는 생명의 떡을 받는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영혼의 발이다. 원수로부터 숨을 곳과 튼튼한 탑과 그리고 피난처가 된다.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교리만큼 아름답고도 단순한 교리는 생각할 수도 없다. 이것은 어두운 신비에 찬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가장 학식이 없고 가장 가난한 자도 영생을 얻게 하는 교리이다. 또 이것처럼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교리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의, 긍휼 그리고 거룩하심을 영광스럽게 한다. 이것은 아들을 영광스럽게 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께 속하는 일이다. 어느 교리도 이것만큼 인간에게 그 자신의 죄성과 연약함과 자신의 행실로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은 없다. 이 교리는 결국 구원받지 못하더라도 변명할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다.

그러나 상한 심령과 회개하는 죄인에게 이처럼 위로가 되는 교리도 없다. 이 교리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며 소망이 있음을 보여준다.

 

또 이 교리만큼 참 그리스도인을 만족시키는 교리도 없다. 이것은 그에게 그리스도께서 완결 지으신 일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이것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위로가 된다. 단지 우리는 믿음과 화평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이 교리는 모든 두려움을 물리쳐 준다.

또 이 교리만큼 인간을 성화시키는 교리도 없다. 이것은 인간을 모든 법규 중에 가장 강력한 것, 사랑의 법으로 끌어들인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빚진 자임을 느끼게 하고 그 빚이 탕감되었을 때 그에 대한 감사로 더욱 사랑하게 만든다.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는 율법의 가장 엄격한 요구보다 인간의 삶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 이 교리만큼 성직자의 손에 힘을 북돋워주는 교리도 없다. 이 교리는 지극히 약한 사람에게도 가서 당신에게도 소망의 문이 열려져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한다. 생명이 지속하는 한 내가 맡고 있는 영혼의 질병 중 못 고칠 경우는 없다라고 느낄 수 있게 한다.

또 이것처럼 우리에게 잘 들어맞는 교리도 없다. 이것은 빌립보의 간수처럼 처음에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까라고 부르짖기 시작할 때, 전투의 전방에서 싸울 때, 죽을 때에도 참으로 적합한 교리이다.

 

- 당신은 이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을 단순히 신뢰하는 것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가? 당신은 그리스도께 당신의 전적인 소망을 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면 칭의가 없고, 칭의가 없으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이 화평이 없으면 하늘나라에도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은 추상적인 주제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뿌리에 놓여 있는 것들이며, 또한 영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5. 맺는 말

1) 간단한 한 가지 질문을 한다. 당신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가? 전쟁과 분쟁은 결코 쉴 날이 없으며 다툼도 끊일 날이 없다. 그러나 결국 지금으로부터 백 년이 지나면 이러한 문제는 당신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묻고 있는 질문이 이보다 수천 배 더 중요하게 될 것이다. 그때 당신은 후회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것을 당신의 마음에 적용시켜 주셔서 당신이 죽기 전에 이제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노라!”하고 담대히 말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2) 한 가지 엄숙한 경고를 하고자 한다. 당신이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당신이 처한 위험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잠시만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진노가 당신 위에 머물러 있다. 하나님은 날마다 분노하고 계신다. 그것이 당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고 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잘라내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당신에게 평화가 없다면 당신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잠시만 생각해 보라. 그분은 내게로 오라고 부르짖으셨는데, 당신은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라고 대답해 온 것이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를 거부해 왔는가? 세상의 부요함 때문인가? 이것은 상한 심령을 치유할 수 없다. 세상의 사업 때문인가? 이것은 언젠가는 당신을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 것이다. 세상의 쾌락 때문인가? 이것은 진정으로 만족을 시키지 못한다. 이것들 때문에 그리스도를 거부해 왔단 것인가? 이것이 지혜인가!

 

3) 한 가지 사랑이 넘치는 부탁을 한다. 당신은 화평을 원한다면, 그것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지체 없이 그것을 구하라. 그리고 그분과 개인적으로 만날 때까지 중단하지 말라.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굳건한 화평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말라. 당신은 왕의 얼굴을 보고 황금 홀을 만져봐야 한다.

그리스도를 찾으라. 당신의 마음에 더러운 의심과 어두움과 불신의 얽힘을 모두 풀어버릴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다만 현재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를 찾으라. 슬프게도 불안에 떠는 많은 영혼이 그리스도와 가까워지는 일에 주춤거리는 이유는 겸손이 아니라 교만과 무지 때문이다. 그들은 많이 아픈 사람일수록 의사가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4) 격려가 되는 말을 하고자 한다. 당신이 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만일 그런 것들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오히려 당신이 지닌 화평의 실체를 의심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내적 갈등이 전혀 수반되지 않는 그러한 은혜는 조금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잠잠하고 고요한 마음에는 거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참 그리스도인을 알아보게 하는 것은 그의 화평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싸움이기도 하다.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이 의심과 두려움은 바로 선한 증거인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잃어버리기 두려워하는 것을 조금은 소유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5)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면서 그것을 생생하게 유지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권고하고자 한다. 자신이 의롭게 된 것과 하나님이 그를 받아들여 주신 것에 대하여 느끼는 정도와 형태는 다양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칭의는 확고하고 변화가 없지만, 다만 칭의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변화하기 쉬운 것이다.

화평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유지하려면 언제나 그리스도께 눈을 고정시켜 두어야 한다.

언제나 예수님과 친교를 나누어야 한다. 날마다 고백하고 용서받아야 한다.

우리 영혼의 원수들에 대하여 언제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삶의 모든 면에서 언제나 거룩을 쫒아야 한다. 망원경에 묻은 얼룩은 아무리 작은 것이어도 멀리 떨어진 것을 명확하게 보지 못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아무리 작은 먼지라도 시야를 부정확하게 만든다.

언제나 겸손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교만 뒤에는 타락이 따른다. 자기 신뢰는 태만을 낳는다. 베드로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기도해야 할 때에 잠자고 말았으며, 결국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우리 주님을 담대히 고백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명예롭게 하는 사람을 그의 많은 무리와 함께 명예롭게 하실 것이다.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떠났을 때에는 비참하고 가련한 존재들이었으나, 공회 앞에서 그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을 때, 그들에게는 기쁨과 성령이 넘치게 되었다.

언제나 은혜의 수단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

언제나 자신의 영혼을 방심하지 말고 지켜보며 자신을 살펴야 한다. 칭의와 성화 사이를 신중하게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거룩한 그리스도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 모든 사람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화평을 그들의 영혼 안에서 누리는 일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기를 충심으로 바라고 기도한다.

 

- 병자의 심방을 위한 지침서에서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셈의 글) -

당신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는가?”

병자가 라고 대답하면 그에게 당신의 영혼이 아직 당신 안에 머물러 있을 동안 당신의 모든 신뢰를 그리스도의 죽음에만 두라고 말하라. 다른 것에는 두지 마시오. 이 죽음에 당신을 전부 던지시오, 이 죽음으로 당신을 감싸시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심판하려 하시면 여호와시여,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와 당신의 심판 사이에 놓습니다. 나는 다른 방법으로는 논쟁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시오.

그리고 그가 당신에게 죄인이라고 말씀하시면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와 내 죄 사이에 놓습니다라고 말하시오.

 

또 그가 당신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말씀하시면 여호와여,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당신과 나와 모든 죄 사이에 놓습니다. 나는 그의 공로를 내 자신의 것으로, 내게는 전혀 없는 그런 공로를 내놓습니다라고 말하시오.

또 그가 당신에게 화가 난다고 말씀하시면 여호와시여,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와 당신의 분노 사이에 놓습니다라고 말하시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