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하나님 나라', 9장 진정한 부 (부자 청년)
9. 진정한 부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막 10:23-25)
여기서 주님은 방금 그분에게 등을 돌린 채 슬픈 기색으로 근심하며 돌아간 젊은 부자 관원의 경우를 설명하신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악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핵심은, 선하기만 하다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소위 ‘젊은 부자 관원’ 이야기에서 중요한 요소 같다. 이것이 현 시대의 특징적인 오류이다. 오늘날의 주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데 꼭 필요한 한 가지를 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선이 열쇠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리에 관심이 없으며, 신학이 정말 싫다고 말한다. 우리가 착한 사람이 되고 착하게 사는 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부가 아닌가요? 그래서 교리를 버리고 기독교 윤리를 붙잡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전혀 나오지 않는 사람들, 기독교 신앙과 교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은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부자 관원 이야기는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그리고 철저히 다룬다. 본문은 20세기 초에 기독교 사회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본문 가운데 하나였다. 부자는 정죄를 받았으며, 따라서 부자가 아닌 모든 사람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적인 사건과 그 가르침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젊은 부자 관원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이 이야기만큼 비그리스도인들을 놀라게 하는 이야기는 없다. 여러분은 젊은 부자 관원이야말로 주님이 기뻐하시고 자신에게 나오기 원하신 유형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는 거의 완벽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나라 밖에 있다. 제자들도 이해할 수 없다고 반응하였다.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육에 속한 사람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모든 것과 전혀 다르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모든 선입견을 버려야 하며, 우리의 모든 생각을 제거하고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첫째 가는 원리이다. 주님은 어떤 필요를 드러내셨고, 그래서 젊은이는 그 필요를 채우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영생을 얻지 못했으므로 어떻게 영생을 얻는지 알고 싶었다. 이보다 더 나은 육에 속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이 필요를 채우기 위해 그는 주님께 나왔다. 젊은이는 주님께 나와 “꿇어앉”았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보다 더 나은 질문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본문은 제가 젊은이를 옳게 이해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얼마나 탁월한 출발인가? 여러분이라면 이 젊은이가 아무 어려움 없이 곧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야기는 다른 쪽으로 흘러간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젊은이의 문제가 무엇이었는가? 젊은이가 슬픈 얼굴로 돌아간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 젊은이는 “이 말씀으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입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 여러분은 교회에 앉아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분을 전혀 만나지 못할 수 있다. 그분을 만날 때, 여러분은 두 가지 반응 가운데 하나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완전히 사로잡혀 즉시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때문에 슬퍼하고 불쾌해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걸림돌”에 대해 말한다(갈5:11). 저는 때로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바로 그들이 십자가를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십자가가 아무 의미도 없이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십자가를 귀찮아 하지도, 불쾌해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복된 분에게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이 되거나, 아니면 여러분에게 걸림돌이 되어 여러분은 슬퍼하고 근심하며 그분을 떠난다. 저는 주님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보다 그분 때문에 귀찮아 하고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더 높이 평가하고 싶다.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감동을 받아 죄를 깨달을 수 있다. 아예 무관심한 사람은 방법이 없다.
이 젊은이는 왜 슬퍼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을까? 이 질문에 세 가지 항목으로 답해 보겠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시지 않은 내용 때문이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사실이다. 젊은이는 자신이 주님께 올 때 그분이 무언가를 말씀하실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각을 확증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선입견으로 그리스도께 나와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갖고 그분의 확증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확증을 얻지 못했다. 주님은 젊은이가 기대했던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그가 주님을 떠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 모두는 기독교란 우리가 자신의 삶에 덧붙이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선한 것에다 하나 더 선한 것을 더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니고데모도 그랬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폭발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부숴 버린다. 이 젊은이는 부서졌다. 주님이 그를 산산이 부수셨다! 기독교는 단순히 수학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여러분이 가진 것에 무언가를 더하는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는 전혀 다르다. 기독교는 “거듭남”을,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은 쓸모 없다. 여러분의 의는 “더러운 옷”이다(사64:6). 여러분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받는다.
둘째로, 젊은이는 그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주님이 하라고 말씀하실 것이라 기대했다. 주님께 끌린 젊은이는 착하고 이상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생각이 깊고 도덕적이며 삶의 향상과 인류의 발전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였다. 주님은 그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그의 능력 밖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이 치명적 오류라고 말한다. 젊은이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간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내용 때문이었다. 이것이 두 번째 항목이다. 주님은 도덕과 선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하고 쉽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그러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너는 이 계명들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후반부일 뿐이다. 나는 전반부를 말하지 않았다. 네가 후반부를 제대로 지킨다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의 입장은 이런 것이 아닌가? 깨끗한 삶을 살고, 인류의 운명을 개선하고, 희생하며 사는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 이 사람이 가장 멋진 그리스도인 아닌가?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니다. 도덕과 선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이것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두 번째 항목의 두 번째 요점은 이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에 이른다. 젊은이가 슬픈 기색을 하고 돌아간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에 관한 단순하고 분명하며 꾸밈없는 진리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삶의 진짜 문제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신다(요2:23-25). 주님은 그의 마음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고 그의 진짜 문제와 필요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기본 원리이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바로 이것이다!
이 특별한 젊은이의 경우, 문제는 그의 부(富)였다.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부 그 자체가 아니었다. 주님은 이것을 분명히 하신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them that trust in riches, 부를 믿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젊은이의 문제는 단순히 그가 부자라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는 부가 아니라 부에 대한 자랑, 부에 대한 믿음이었다. 젊은이의 문제는 부의 힘, 부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 부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 돈은 힘이 있으며, 젊은이는 이 사실을 알았다. 부자가 매우 위험한 처지에 있는 이유도 여기 있다. 다시 말해,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의 문제는 우리가 힘을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돈의 경우만 문제 되는 것이 아니다. 지적 교만이나 지성의 힘이나 말의 힘이나 그 외 모든 힘은 항상 위험하다. 모든 힘은 부패한다. 이 젊은 부자 관원의 경우는 돈의 힘이 문제였다. 그 돈으로 선한 일을 많이 할 수 있었고 좋아했으나, 자신의 때에 자신의 방법으로 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는 주체가 그 자신이었다. 그의 목적은 자기만족과 자랑이었으며, 그는 부를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부를 포기하라. 그리고 내게 결정권을 넘겨라.”
단지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그의 태도, 돈에 대한 그의 의존, 돈에 대한 그의 믿음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돈을 스스로 관리하고 다스렸으며 그 돈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었다. 주님이 단지 돈에 대해만 말씀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붙잡고 있으며 무언가를 자랑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이 된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만큼 탐욕스러울 때가 많다. 우리가 이 점에서 얼마나 속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돈만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오고 종교에 관심할 때 우리는 도움을 원하며, 지식과 이해를 원한다. 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코 지적인 이해가 아니다. 우리 세대는 종교의 문제를 지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 세대가 그 많은 책을 내놓는 이유도 여기 있다. 현대인을 위한 복음을 내놓으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여기에 최종적으로 답하신다. “문제는 지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어려움은 결코 지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도덕적인 문제를 지적인 문제로 위장한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라.” 젊은이가 슬픈 기색을 하고 돌아간 이유도 여기 있다. 그리스도께서 문제를 드러내셨으며, 젊은이가 그의 본질적인 죄를 깨닫게 하셨다. 그분은 언제나 이렇게 하신다. 주님이 여러분의 특별한 죄를 지적하셨는가? 여러분이 “예”라고 말할 수 없다면, 여러분이 그분을 전혀 만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지적인 것이 아니라 너희를 지배하는 정욕이다. 돈의 정욕, 권력의 정욕, 육체의 정욕, 성적인 정욕이다. 그분은 곧바로 중심을 꿰뚫으신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을 직시하고 크게 찔림을 받는다.
젊은이가 주님을 떠난 두 번째 항목 가운데 세 번째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는 다른 누구의 방식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방식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절대적인 명령을 하시며 젊은이의 전부를 요구하셨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 그리고 와서 ---”, 이것이 구원 복음의 기본 원리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가의 문제는 그분이 결정하시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께 복종하고 순종하며 그분을 따를 뿐이다. 우리는 단지 그분께 우리 자신을 절대적으로 내어맡길 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그분의 생각이다. 우리는 불쾌해 한다. “무언가를 덧붙이면 되지, 그분은 불가능한 요구를 하셨다. 저는 그분의 요구를 따를 수 없다. 터무니 없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18,22-23).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없다! 십자가는 거치는 것이며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뿐이다. 주님은 다른 길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지성은 수치를 당할 것이며, 여러분의 자랑도 땅에 떨어질 것이다. 여러분은 어린아이처럼 나와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밖에 없다.
결정하시는 주체는 여러분이나 제가 아닌 주님이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전2:2).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3:11).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마지막 요점은, 주님은 그분을 따르며 그분께 충성하라고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소유를 판 돈을 모두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것은 여러분이 가장 존경받는 지성인 그룹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며, 사람들로부터 모든 박수와 갈채를 받는다는 뜻도 아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십자가를 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여러분과 가장 가깝고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뜻일 수 있다. 이것은 아버지를, 어머니를, 아내를, 자녀를, 땅을 버리고 — 십자가를 진다는 뜻일 수 있다! 이것은 가족에게 박해를 받는다는 뜻일 수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바보 취급을 당한다는 뜻일 수 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주님은 어디로 가고 계신가?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신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막10:33-34).
기독교는 놀랍고 멋지며 온 세상이 감탄하는 것인가? 아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수치를 당하는 것이며, 멸시받는 것이며, 욕을 먹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가 되는 것이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이것을 요구하신다. 세상의 개혁이 아니라, 인기가 아니라, 즐거움이 아니라 정반대의 것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이것이 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젊은이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부분 때문에 돌아갔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부분 때문에 돌아갔다.
셋째로, 젊은 부자 관원이 슬픈 기색으로 돌아간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필요를 깨닫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잃은 자아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하나님 나라 밖에 있으며, 계속 그 나라 밖에 있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떠나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이들은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는지 전혀 모른다. 자신들의 위치가 절망적이며 희망이라고는 없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젊은 부자 관원이 이것을 깨닫기만 했다면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왜 세상에 오셨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주님을 그저 매우 선한 사람이자 특별한 선생 정도로 여겼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영원을 떠나 시간 속으로 들어 왔다. 나는 세상에 내려온 아들 하나님이다.”
마지막으로, 젊은 부자 관원은 하늘의 보화에 관한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는 땅에 있는 보화에는 전문가였으나 하늘의 보화는 몰랐다. 그는 용서의 기쁨을 전혀 몰랐고 새 생명을 얻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자녀와 아들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불쌍한 젊은이에게는 비옥하고 넓은 땅,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땅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젊은이여, 네가 나를 믿어 네 것이 될 하늘의 유산에 비하면 네가 이 땅에서 가진 유산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천국과 하나님의 상속권, 그리스도와의 공동 상속권,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다리는 영원한 영광을 전혀 몰랐다. 그는 순간에 집착한 나머지 영원을 알지 못했다. 욥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1:21). 우리는 빈손으로 돌아간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6:19-20). 그곳이 여러분이 보물을 쌓아 두어야 할 곳이다. 젊은이는 현재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아서 미래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그래서 그리스도를 떠났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이 젊은 부자 관원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여려분은 자신에게 있는 것- 돈, 지식, 도덕성, 선한 삶, 선행, 이타심-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의지하느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는가? 이 가운데 하나라도 의지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것이다. 첫 번째 교훈은 이것이다. 가진 것, 할 수 있는 일을 의지하고 믿는 것은 치명적인 잘못이다.
두 번째 교훈은, 그리스도께 등을 돌리면 언제나 슬픔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없이 이 세상에서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여러분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슬픔은 그리스도께 등을 돌리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다.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언제나 영적 자살이다. 유다는 그리스도께 등을 돌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여러분의 구원자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며, 진정한 생명을 떠나는 것이며, 여러분을 위해 죽고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떠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외에는 쉴 곳이 없다. 그리스도를 떠나면, 언제나 슬픔을 맞게 될 것이다.
현세에서 이렇다면 내세에서는 어떻겠는가? 이생에서 그리스도께 등을 돌린다는 것은 내세에 영원한 비극 가운데 살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열 처녀의 교훈이다. 너무 늦었다. 이들은 어리석었고 그래서 비참해졌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도 생각해 보라. 부자도 너무 늦게 알았다. 영원한 비극이 있을 뿐이었다.
그분은 영생과 영원한 복과 기쁨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주님을 떠나지 말라. 주님을 떠나는 것은 마지막이자 유일한 소망을 버리는 것이다. 남은 것은 슬픔과 영원한 불행뿐이다. 그분이 누군지 생각해 보라. 그분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사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를 때 여러분을 위해 예비된 기쁨을 생각해 보라. 간절히 바라건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비극에 빠질 것이다. 그분의 발 아래 엎드려 그분의 얼굴을 보며 말하라.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받아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