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존 라일, '옛 길', 16장 믿음 (김영희)

강대식 2019. 3. 13. 04:34

16 장   믿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우리는 이 말씀을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말씀이 지닌 그 엄청난 의미를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루터는 말하기를 이 구절이야말로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했다. 이 말씀에서 분기점을 이루는 곳은 다름 아닌 믿는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는 과연 당신은 믿는 자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큰 인기가 없다. 이런 문제는 사람들을 당황케 하고, 자기 마음속을 살피며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은 주일마다 그들이 대체 무얼 믿는지도 모른 채 내가 믿사오며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의 믿음에 관해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란 아무 쓸모가 없다.

 

1.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 “그분은 세상을 사랑하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다 사랑하신다고 가르친다.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도다”(145:9) 그는 유대인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사랑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친절과 자비 그리고 연민의 사랑이다. 비록 사람들이 타락하여 그 행위가 하나님을 분노하게 해도, 하나님의 마음은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하다. 그분은 의로운 재판관이 되시므로 죄는 미워하지만, 그래도 분명히 죄인들은 사랑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연민의 넓이와 깊이를 능히 측량할 수 없다.

 

1)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의 상태를 보면, 어찌나 사악하고 불경건한지 그 때문에 온 세상이 다 더렵혀졌다. 그래도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그분은 분명히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34:6)이시다. 그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벧후3:9) 원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벧후3:9) 원하시고,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33:11) 기뻐하신다.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미워하시고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거짓된 교훈에 주의하라. 하나님은 다만 진노하시는 분이고, 죄인들은 구원을 얻으려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쳐 그리스도께 가야한다는 상당히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을 경계하라. 성부와 성자를 서로 대립하는 위치에 놓는 것은 지극히 유치하고 조잡한 신학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노여움 때문에 돌아가시지 않았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돌아가셨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택함받은 자들에게 한정되어 있고 그 외에 사람은 버림받는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데, 이 또한 경계해야 한다. 탕자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집을 나가 정욕을 쫓으며 살고, 집에 돌아오기를 거부할 때에라도 그 아들을 사랑했고 측은히 여겼다. 그러나 보편구원론 역시 비성경적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모든 인류가 다 구원받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연민 그 자체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세상을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에 영원하신 사랑으로 그분의 택하신 자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실로 즐거워할 만한 복된 진리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문제란 하나님은 온 인류를 어떻게 대하시는가?”라는 것이다. 나는 주저함이 없이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한다고 대답하겠다. 하나님은 연민에 찬 사랑으로 온 세상을 사랑하신다- 라일의 요한복음 1:29, 3:16에 대한 주석에서 -

 

3)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있다면, 당신이 예배하는 그분 닮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풀되 특히 믿는 사람들에게 하라. 이웃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낯선 외국인이나 회교도, 여타의 이교도들까지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해야”(고전16:14) 하며,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5:44) 하고, 생명을 다할 때까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하나님을 닮아가는 방법이다.

 

2. 하나님이 세상에 주신 선물 - “그분은 독생자를 주셨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우리 앞에 분명하고 알아보기 쉬운 모습으로 나타나 있으며,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그분은 자기의 외아들이라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가장 큰 증거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무 대가 없이 그냥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외아들을 내어주시므로써 그 사랑이 거룩함이나 공의를 침해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늘로부터 사람에게 전해질 때에는 특별한 경로를 통하게 되는 것이니.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역과 불가분의 관련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세상에는 셀 수 없고 잴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의 영혼을 잃어버린 인간의 손실이요, 다른 하나는 죄인들을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만약 인간의 영혼과 죄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대체 어떤 분이 인간의 구세주가 되셔야 했던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죄인들의 친구로 내어주실 정도였다면, 죄는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타락한 세상은 그분을 기꺼이 영접하였는가? 하나님은 그분으로 하여금 멸시받고 거절당하게하셨다. 그분은 가난한 여인에게 태어나, 가난한 삶을 살았고, 미움과 핍박과 모욕을 당했으며, 악한 자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고, 유죄판결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실로 놀라운 사랑이요, 겸손이다. 만약 우리 가운데 선을 행하기 위해 굴욕과 고통을 받고자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1) 하나님은 무슨 목적으로 독생자를 주셨는가? 단지 자기부정 내지는 자기희생의 본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목적이 있다. 인간의 죄와 허물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게 하셨다.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하시려고 대신 저주를 받으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고 대신 죄인이 되셨다. 그 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갚으셨다.

예수님은 모든 죄인의 전능한 친구가 되신다.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해 주시며,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대신 받으시며, 그들이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을 갚아 주셨다. 예수의 삶과 죽음의 주된 목적은 인류에게 영원한 구속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현대신학의 거짓된 가르침이 그 아무리 그럴듯하게 여겨져도 전통적인 신앙을 버려서는 안 된다. 옛 성도가 지니고 있던 신앙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만약 이 중요한 교리를 버리게 되면, 기독교는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2) 그리스도의 구속의 범위를 좁게 보려는 생각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온 세상의 구세주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라. 예수님 안에는 모든 죄인과 부정한 자들이 와서 마실 수 있는 샘이 솟아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의 어려움을 충분히 채워줄 수 있는 귀한 처방이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인류에게 제공되고 있음을 기억하라. 내가 믿기로는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만이 궁극적인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에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역은 온 인류를 위해 충분한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만인의 죄 때문에 죽음을 당하셨고,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던 것이다.(2:9, 1:29)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 주시는 하나님이 선물이다.

 

3) 기독교는 무엇을 주는 종교인가?

은사, 사랑, 무한한 은혜 등은 순수한 복음의 중요한 특징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고, 그 아들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주셨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 삼위일체께서는 믿는 자에게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신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자라고 고백한다면, 능력과 기회가 허락하는 데까지 우리는 자기를 부정하며 기꺼이 베푸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특권으로 여겨야지 짐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하지 못한 일을 허락하시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외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모든 것을 주신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내어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8:32)

 

3.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는다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주시는 축복은 오직 믿는 자에게만 해당한다. 믿는 것은 신뢰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온갖 형식을 다 갖추어도 구원받지 못한다. 각자가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과의 사귐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분은 오로지 믿는 자들 속에서만 거하시는데, 유감스럽게도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무서우리만큼 단호하게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16:16, 3:36)이라고 말씀하셨다.

 

- 이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믿음이 단순한 것이라서 오히려 실족하고 있다. 그들은 겸손히 허리를 굽히지 않기 때문에 이 믿음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다. 이는 마귀의 믿음이나 마찬가지이다. 무지 가운데의 신앙은 존재할 수 없지만, 지식만으로 구원받을 신앙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또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그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느낀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종종 아침 이슬 같이 사라져 버리는 일시적인 흥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가끔 헤롯이나 벨릭스 같은 사람들도 그랬던 것처럼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복음에 마음이 끌림을 느낄 수 있고, 심지어 몸을 떨고 울면서 진리에 대한 대단한 사랑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는 동안에도 내내 우리의 마음과 의지는 변화되지 않은 채, 은근히 세상에 끌릴 수도 있다. 아무런 느낌 없이 구원받을 믿음도 없겠지만, 느낌만 있다고 해서 믿음인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은 스스로 죄를 자각하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구세주로서 받아들이는 마음속의 철저한 신뢰이다. 이는 지식과 양심과 감정과 의지의 총체적인 행위이다. 종종 처음에는 이 믿음이 너무 미약하여 자기가 믿음을 갖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 질 수 있다. 마치 갓난아이의 생명과도 같이, 이 믿음은 사실로 존재하며 참된 것이다. 양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죄를 느끼게 되고, 지식으로 예수께서 유일한 구세주 되심을 알게 되고, 감정으로 그리스도의 내미는 손길을 느끼게 될 때, 바로 그때가 믿게 되는 순간이다.

참된 믿음은 너무도 중요한 것이고, 영적인 일들을 더디 이해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에 성령님은 성경에서 그것을 다양하게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셨다. 그래서 어느 한 가지 양식을 통해 믿는다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양식을 통해 알 수 있다.

 

1)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로 오는 것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6:35) 모든 죄인과 도움이 필요한 자는 언제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믿음을 가지고 그분 앞에 나오는 자는 위로를 얻는다.

2) 믿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3:20) 그리스도는 용서와 자비와 은혜로써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고자 하시며, 평화를 이루시는 분과 왕으로서 그 속에 거하고자 하신다. 신자란 그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그를 주인과 제사장과 왕으로 영접하는 사람인 것이다.

 

3)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위에 영적인 집을 짓는 것이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2:7) 신자는 그리스도께 영원한 희망을 두며, 안전함을 누린다. 땅은 흔들리고 녹아져도, 그는 영원한 반석 위에 서 있기에 요동하지 않는다.

 

4) 믿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3:27)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올 모든 죄인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그 정결한 흰 예복이 되신다. 신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예복을 입게 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흠 없고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5) 믿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 있는 소망을 붙들기 위하여 그분께로 간다.(6:18) 그리스도야 말로 참된 도피성이 되시고, 그 뿔을 붙드는 자에게 보호구역이 되어주는 제단이 되시며, 물에 빠져 죽어가는 죄인들에게 은혜의 손길이 되신다.

 

6) 믿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6:55-58) 그리스도는 굶주리는 죄인들에게 주시는 신령한 양식이다. 또한 생명이요, 치료제가 되신다. 신자는 믿음으로 이 떡을 먹어 굶주림을 면하게 되고, 그의 영혼이 죽음에서 벗어나게 된다.

 

7) 믿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마시는 것이다. “내 피는 참된 음료니”96:55)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목마르며 죄에 더럽혀진 모든 죄인을 위하여 열어 놓으신 샘물이 되신다. 신자가 이 생명수를 마시면 그의 갈증은 해소된다.

 

8)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그리스도께 의탁하는 것이다.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도록 임명받은 분으로서, 우리를 죄와 죽음과 지옥과 마귀 등 모든 것에서 지켜주신다. 자기의 영혼을 전능하신 그분께 맡긴 신자는 영원히 모든 재난에 대비하여 보험을 들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9) 믿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12:2)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세워두신 구리 뱀이다.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보는 신자는 영적인 생명과 치료와 강건함을 얻게 된다.

믿는다는 것에 대한 표현에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믿음이 단순하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사실이다. 믿는다는 것이 신비하거나 거창하거나 특별한 공로를 요구하지도 않고, 가장 연약한 죄인이라도, 가장 무지한 사람이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구원받을 믿음이란 단순히 그를 신뢰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서,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익을 얻게 하는 것임을 기억하라. 뉘우침이나 거룩함, 자애로움 등이 중요한 것이며 믿음에 수반되는 것이긴 하나, 그런 것들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는 못한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 만약 이 사실을 제거하고 다른 무엇을 덧붙이면 내적인 평화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의 단순함을 인하여 감사해야 한다. 이는 우리에게 그 무수히 많은 신학지식과 신조를 다 이해할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믿는가 믿지 않는가에 대한 것뿐이다. 믿음이 있는 곳에 소망도 있다.

또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이 사실의 그 넓고 충만함을 인하여 감사해야 한다. 사람의 행위, 성격, 이름, 신분, 인종, 국적, 교파, 교회 등에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는다 이것이 복음이다.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8)

 

4. 진정한 믿음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증거

1)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마음에 평화와 소망이 있다. “이미 믿는 우리는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4:3)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그 양심이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화해하여 그의 친구가 되었고,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음과 심판과 영원을 기다린다. 그러나 비록 의심과 두려움이 있다고 해도, 그는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견고한 소망이 있으며,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새로운 마음을 가진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육신에 속한 일을 먼저 생각한다면, 구원받을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이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신자가 아니다.

 

3)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마음과 생활이 거룩한 사람이다. “주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신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바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바를 미워한다. 그는 매일의 삶이 부패한 옛 성품과의 끝없는 싸움임을 알고, 계속 죄와 대항하여 싸우고 결코 죄에 복종하지 않는다. 거룩함이 없이는 구원받을 믿음도 없다.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신자가 아니다.

 

4)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선을 행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5:6) 믿음을 지닌 사람은 결코 게으르거나, 자기 신앙으로 만족하지 않고, 기회 있는 대로 사랑과 친절과 자비를 행한다. 사랑의 역사가 없는 곳에 믿음도 없다. 게으르고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신자라고 간주할 권리가 없다.

 

5)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세상을 이긴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진정한 신앙인은 옳고 그름이나 참과 거짓을 분별할 때, 세상적인 기준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세상의 지배를 받는 마음에는 신앙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굴복하는 사람은 신자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6)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에 대한 증인이 계신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요일5:10) 언제나 참된 신자는 성령께서 증거하심을 속으로 느낄 수 있는데, 이 느낌은 그의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면서 파생되는 것이며, 불신자는 전혀 알 수 없는 느낌이다. 그에게는 믿기 전에 알지 못하던 희망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 이 증거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증거보다 훨씬 훌륭한 것이다. 이러한 영적이고 내적인 신앙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신자가 아니다.

 

7)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특별히 그리스도를 귀하게 여긴다. “(그리스도는) 믿는 너희에게 보배이나”(벧전2:7) 기독교가 귀하다거나, 복음 또는 구원이 귀하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 자신이 귀하다고 말씀한다. 신자의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생생하게 인격적인 결합을 하는 것이다. 예수께 확신을 두고,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를 기대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생명이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1:21)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 모든 신자가 일곱 가지 증거를 다 갖고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러한 증거가 자기의 믿음의 여부를 알고자 할 때,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특징임을 말하고 싶다. 만약 이러한 증거가 전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참된 신자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 일곱 가지 증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영혼에서 확신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가난할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부유하며, 사람에게는 멸시를 당해도 왕의 왕이신 분께서는 존귀하게 여기신다. 그는 천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 나라에 거할 곳이 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그를 돌보시며, 장차 내세에서는 온 세상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그를 자기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당신은 이제 믿는 사람인가? 다른 사람 때문이라는 불필요한 핑계는 그만두라. 성경은 의심하거나 머뭇거리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구원의 문제를 놓고 볼 때, 어떤 교파에 속한 것이나 어떤 신조를 따르는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인생은 짧고 불확실하지만, 죽음과 심판은 엄연한 사실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당신을 구원하실 수 있다.

우리 힘으로는 믿을 수 없어.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라고 말하지 말라. 구원받을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회개와 믿음이 하나님께서 만인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라고 말한다.(17:30, 요일3:23) 죄 가운데 가만히 앉아 죽은 것이 옳은 일인가? 그리스도께 가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 당신이 아직 진실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면 그분께 믿음 주시기를 구하라. 일어나 그리스도께 당신 영혼을 의탁하라! 분명한 것은 십자가 밑에 나아온 사람은 그 누구도 멸망하여 지옥에 가지 않는다.

 

4. 맺는 말

약한 믿음은 강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천국에는 갈 수 있다. 그러나 약한 믿음이 강한 믿음만큼 많은 위로를 주지는 못하는 법이다. 믿음의 정도에 따라서 누리는 평화와 희망과 능력도 달라지고, 우리가 감당할 의무와 고난 가운데 지녀야 할 인내의 분량도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성장시켜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신앙생활, 시간과 언어를 잘 통제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많은 사귐을 갖도록 하라. 그의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알고자 노력하라. 비록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너무 율법적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모든 신앙의 위인은 그러한 말에 연연하지 않았다.

 

자기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이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임을 잘 아는 광부는 갱도 위로 이끌려 올라갈 때에 걱정하거나 놀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잘 아는 신자는 절대적인 안정과 평화 가운데 신앙의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주여 내 믿음을 성장시켜 주소서 매일 기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