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퍼킨스, '주기도 해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윌러엄 퍼킨스
“기도는 어떤 종류의 행위인가?”
기도는 ‘입술노동(lip-laboring)’이 아니다. 기도는 특정한 탄원(간청)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즉, 이 행위는 다름 아닌 인간의 마음에 관계된 것이다. 롬8:26은 “성령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말한다. 과연 어떻게 간구하시는가? “마음 속의 탄식으로” 하신다. 출14;15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어찌하여 너는 부르짖고만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주님은 의심할 바 없이 모세의 내적인 울부짖음과 부르짖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을 받으신 것이다(시28:10,12:5)
‘우리가 기도할 때 따라야 할 형식 또는 규칙은 무엇인가?’
기도의 규칙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그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낮추면서 그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자신이 나열하는 것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명령하시는 것들을 구해야 하고, 그분이 명령하시지 않는 것들을 결코 구해서는 안 된다. 요일5:14은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확신이다. 즉 만일 우리가 어떤 것을 그의 뜻대로 구하면, 그가 우리를 들으신다는 것이다”고 말한다. (KJV는 1611년 완성, 퍼킨스의 책은 1595년 출판)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반드시 지식 가운데서(in knowledge) 해야 하고, 무지함 가운데(in ignorance)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가련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있는데, 깊이 숙고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께 매우 헌신적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하고, 그 후에 그 말씀에 따라 기도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들의 기도는 모두 하나님에 대한 조롱과 노골적인 모욕 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서를 가지고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이다(시51:17). 왕상21:29은 “주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떻게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하게 되었는지 보느냐’”고 말한다.
이 마음의 통회함은 두 가지를 포함한다. 첫째, 우리 자신의 죄와 비참함, 파산된 상태를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들에게 둘러 싸여있는지, 심지어 사탄과 그의 영들에 포위되어 있는지, 안으로는 얼마나 거대한 오물과 반역적인 부패의 바다가 있는지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극심하게 불쾌하게 하는지, 그것들이 우리 눈에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아는 것이다. 따라서 사방에 우겨쌈을 당한 채, 우리는 우리의 이 큰 비참함에 대한 감각에 접촉해야만 한다.
따라서 바르게 기도하는 사람은 불쌍하고 파산한 거지의 인격과 심정을 입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내재하는 비참한 상태를 분명히 슬퍼하지 않는다면, 효과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다. 시130:1은 “여호와여, 깊은 데서 내가 당신께 부르짖었나이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큰 비참함 가운데 있을 때, 사실상 지옥의 문턱에서 멀지 않을 때, 그때 하나님께 부르짖었나이다”는 말이다. 사26;16은 “여호와여, 저희가 고통 중에 주를 떠올리고, 주의 징벌이 저희에게 임할 때에 기도를 쏟아내었나이다”고 했다. 삼상1:15에 “(한나가 말하기를) 나는 괴로운 영의 여자라”고 말한다. 즉, 자신이 고통 중에 있는 영혼이라는 말이다. 한나는 “나의 영혼을 여호와 앞에 쏟아놓았나이다”고 말했다.
이상으로 볼 때,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의 상투적인 기도는 하나님을 몹시 불쾌하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비참함에 대하여 어떤 지각이나 감각도 없이 단지 모양만 내고 있다고 보시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처럼 그들의 고결함에 대한 허식에 빠져서 그들의 입술로는 굉장한 노력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주님에게서 떠나 방황하고 있다.
둘째, 통회하는 심령에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은택에 대한 간절한 갈망과 굶주림이다. 사람이 옛 자아를 족쇄로 묶는 것, 그리고 그의 죄와 비참함 아래 엎드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해야만 한다. 반대로 없어서는 안될 은혜들로 부요해지기를 소원해야 한다. 히스기야 왕과 이사야 선지자는 산혜립을 대항하여 기도했고,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었다(대하32;20).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간구한 바를 얻기 위해 얼마나 경이로운 소원을 가졌는지 볼 수 있다.
롬8:26 또한 말하기를 “성령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고 말한다. 시143:6에서 다윗은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되 물이 없어 메마른 땅처럼 갈망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더위에 바짝 마른 땅이 자기 몸을 갈라 틈을 만들고 물기를 얻기 위해 구름이라도 먹을 듯이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되, 그것을 얻을 때까지 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어떻게 기도했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주님 앞에서 물처럼 쏟아내었다”(애2:19). - pp 49-54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는 어떤 피조물의 이름으로도 해서는 안 된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중보로만 해야 한다. “만일 너희가 어떤 것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4). 사람은 본성상 지옥의 숯과 다름없고, 땅에 있는 하나님의 전 피조물은 하나님께 가장 극악무도한 반역을 했다. 사람에게는 자기 덕분에 하나님께서 기도를 듣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성인들 또한 중보자가 될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한다면 아버지 앞에 있는 대언자(변호사)가 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라”(요일2:1). 다음 구절은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다”(2:1)고 말한다. 불쌍한 영혼들은 눈먼 말처럼 하나님께 마구 돌진하지만 그들은 중보자를 모르며 그의 이름으로 기도드려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 중 하나님께서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이신 것만큼이나 가장 무서운 심판자이심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도에 믿음이 요구되는가. 아닌가?”
기도는 믿음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탄원을 허락하실 것을 확고하게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사람은 어떻게 유효하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든지 너희가 기도할 때에 갈망하는 것은 받을 것으로 믿으라. 그러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마11:24). 우리는 기도할 때 요구되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원하는 선한 것들에 대한 갈망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우리 구주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또 우리에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일뿐만 아니라 기쁨과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어떤 이유로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 후에도 자주 그의 축복을 미루시는가? 주님께서 우리를 분발시키셔서 더욱 열심을 내어 주께 부르짖도록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
“기도하라”. 이것은 다른 명령과 같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런 생각으로 당신 안에서 이 의무에 대한 자각이 생기게 하라. 그리고 당신의 부패한 본성이 당신을 그것에서 떠나게 하려 할지라도, 그 반대 방향으로 노력하라. 이 명령을 어긴다면, 이 위반이 다른 계명과 같이 당신을 하나님 앞에서 정죄할 것이다. 나아가 당신의 양심을 찔러 이 의무를 향하여 가게 하는 동기가 있다. 하나님은 기도의 영을 주시며, 그 영으로 이 명령이 우리에게 무겁지 않은 짐이 되게 하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보물 창고를 여는 열쇠이다. 즉, 그의 자비를 우리에게 내려주시도록 하는 열쇠인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전달하는 일을 봉사하는 것과 같이, 기도로 우리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생생한 감화를 갖게 된다. 나아가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친밀히 경험하게 된다. 이 사실이 우리를 감동시켜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기도는 그의 교회에게 주시는 주된 특권들 중 하나이다.
또한 기도는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교회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치 있는 방어수단인 것을 생각하라. 기도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로 인한 갈라진 틈에 서서 그것을 멈추게 하였다(시106:23). 기도로 그리스도인들은 용감한 전사처럼 자신의 부패와 다른 모든 영적인 대적들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다(엡6:18). 루터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회복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 인물이었다. 그런데, 루터가 스스로 증거한 말이 무엇인가?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이 은혜가 나에게 주어진 후, 주님은 나에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더 많이 계시하셨고, 그 후 독서와 연구를 통해 계시하셨다”라고 했다.
이 명령의 두 번째 요점은 주기도에 제시된 방식을 따라 기도하라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주기도는 일종의 지침(서)라는 점이다. 즉, 주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아 하는지 가르쳐주는 견본이다. 이 말은 우리가 주기도의 문구들에 속박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뜻은 우리를 그 말에 얽어매려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과 방식은 무엇이며, 기도할 때의 정서가 어떠해야 하는가 알려주는 데에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종들의 기도는 모두 결점 투성이가 될 것이다. 그들은 주기도와 똑같은 문구들을 사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기도는 심지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똑같은 말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우리 주님은 우선 기도하라는 명령을 주신다. 다음으로는 그것을 지키도록 지침을 주신다. 주님이 이렇게 하시는 까닭은 우리를 분발시켜 태만하지 않게 하고, 모든 수단으로 우리를 꾀어 천상적인(heavenly) 기도를 연습하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나는 다시 말한다. 겸손히 지속적으로 기도에 전념하라. 만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기도하는 일을 배우라. - pp 64
“아버지”
아버지라는 이 칭호는 삼위일체 전체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그 중 한 위만을 의미하는가?
이 명칭은 삼위일체의 모든 위에 돌려지기도 하고, 때로 그 중 한 위에게만 돌려지기도 한다.
이사야 9장은 그리스도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와 결합되고, 그에 의해 거듭난 모든 사람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칭호는 자주 삼위일체 안의 제 1위에게 주어진다. 이러한 곳에서는 한 위가 다른 위와 함께 주어진다. 주로 몇 몇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며, 이 칭호는 제 1위에게 돌려진다. 첫째, 그분은 성부의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본질상 그분(성부)은 그(성자)와 동일 본질이시다. 둘째, 그분은 본성상 또는 양자됨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격적 연합에 의한 그의 인간됨의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말씀의 위격 내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된 모든 신자들의 아버지시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 하는 것처럼 성령과 성자께 기도할 수 있는가? 부름은 삼위일체 안의 삼위 모두에게 속한다. 그것은 성부께만 속하는 것이 아니다. 행7:9은 스데반이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하고 기도했다. 살전3:11에서 바울은 “이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길을 너희에게 인도하옵소서”라고 하며, 또 고후13:13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와 함께 할지어다”고 기도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다시 말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세례를 받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구별된 위격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의 그리고 동일한 신격 또는 신적 본성 안에 존재하신다. 나아가 창조와 섭리, 택자들의 구원과 같은 모든 외적 사역에서 삼위는 분리되거나 나뉘지 않는다. 이 모든 일에 그들은 함께 사역하신다. 단지 사역의 방식에 있어 구별될 뿐이다. 만일 그들이 본성에 있어서나 사역에 있어서 나뉘지 않는다면, 예배를 받으심에 있어서도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주로 성부께만 향하는 것은 성부께서 순서상 첫 번째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성자와 성령도 함축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부께 성자의 이름으로 성령께서 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위격에게 기도가 향해지든지 우리는 다른 위격이 포함된다는 것을 우리의 의식과 마음에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이 간구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
1) 아버지인 하나님께 그의 아들 우리 구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모든 기도의 첫 번째 기초를 놓는 법을 배운다. 그것은 삼위일체 내의 삼위의 연합과 구별을 붙잡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가장 깊은 기초요, 첫 번째 토대가 된다. 바르게 기도하려는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 지식이 있어야 하며, 삼위일체를 올바르게 믿는 것이 요구된다. 또 세 위격이 어떻게 일치하는지, 어떻게 구별되는지, 순서가 어떠한지, 어떻게 성부가 1위이고, 성자는 2위이며, 성령을 3위가 되는지, 따라서 어떻게 성부께서 성자의 이름으로 성령에 의해서 일컬어지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교회와 이방인들의 기도가 구별된다. 이를 모르는 무식하고 부정한 사람들은 단지 차갑고 빈약한 기도 외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2) 어떤 경우에도 성인이나 천사들을 불러서는 안 된다. 다만 참되신 여호와만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주기도에는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어떤 부름도 없다.
3)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 외에는 중재자가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되 심판자가 아니라 친절하고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천사나 성인들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결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할 수는 없다.
4) 만일 우리가 아버지되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 안에서 하신 약속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기도에서 우리 마음을 분발시켜 우리 스스로 확신을 가지며, 하나님이 우리 간구에 응답하시리라는 신뢰를 가져야 한다.
아버지는 그의 자녀에게 은총의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만일 사람이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모든 약속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확신이 없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라고 진정으로 부를 수 없다.
“만일 내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이 자신을 낮추고, 기도하며, 내 얼굴을 구하며, 그들이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에 대하여 자비하리라”(대하7:14), “주께서 너희가 주와 함께 하는 동안에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만일 너희가 그를 구하면 그가 너희에게 발견되리라”(대하15:2).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대답할 것이며, 그들이 말하고 있는 중에 내가 들으리라”(사65:24).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발견할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마7:7). “비록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그를 갈망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모든 것의 주되신 그분이 그를 부르는 모든 자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2).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4:8)고 약속한다.
5) 만일 하나님이 불러야 할 아버지가 되신다면,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표지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행9: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와 함께”(고전1:2). 무신론자의 특징 중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을 결코 부르지 않는 것”(시14:4)이다.
6) 사람이 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탕자’와 같이 기도해야만 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눅15:18) 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할 뿐 아니라, 이후로 다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충실한 목적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자녀가 방탕함으로 계속해서 아버지를 불쾌하게 하면서 어떻게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를 향한 방탕함과 반역을 기억하고, 세리와 같이 영혼의 탄식 가운데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하고 말해야 한다. 진심으로 이것을 행하는 자가 진정한 자녀이다.
우리의 본성은 아버지를 대적한다. 마귀가 마음 전체를 장악하고 있으며, 우리의 모든 기쁨은 그를 섬기기 기쁘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상태를 직시하고 그렇게 애통하는 자에게 은혜가 주어질 것이다. 행복하도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보다 천 배는 행복하도다! 다시는 그분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지난 죄로 인해 그의 영혼이 상한 사람은 마음에 다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는 목적을 품는다.
기도하려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양자의 영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성령의 복된 사역이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 이는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이 그것을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한다(롬8:26). 스가랴12;10은 성령을 “은혜의 영”이라고 부른다. 또한 “통회와 기도의 영”이라 한다. 따라서 기도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영을 그의 교사로 모셔야 한다. 성령께서 마음의 슬픔과 탄식으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도록 해야 한다. 단순히 단어를 나열하는 것으로는 기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마음의 슬픔과 갈망으로만 기도할 수 있다. 마음으로 갈망하나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나,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전혀 기도하지 않는다. 다만 입술노동만 할 뿐이다.
성령의 두 번째 사역은 우리의 양심에 우리가 은혜의 상태에 있으며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롬 8:16은 “양자의 영이 우리의 영과 함께 증거하시는 바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고 말한다. 성령의 이 내적 증언이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일을 실행할 때 매우 필요하다.
“우리 아버지”
그리스도인이 사적으로 기도할 때 ‘나의 아버지’라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모범이 보증한다. “오,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내가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고전1:4). 그리스도의 의도는 우리를 이 문구에 속박시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기도 중에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에게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적으로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의 일처럼 그들을 위해 기도하여 우리로 이 말의 진정한 뜻을 실천하도록 하신다.
이 간구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자신과 자신의 유익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그들의 기도의 동역자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1)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마5:44은 “너를 해하는 사람과 너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라고 한다. 딤전2:1은 “내가 권하노니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와 중보---을 하고 특히 왕을 위하여 하라”고 말한다. 이 왕은 이교도들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렘29:7은 “어디로 내가 너희를 끌려가게 하든지, 너희는 그 성의 번영을 구하라. 그리고 여호와께 그 성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원수를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들의 죄, 모략, 계획에 대적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인격을 대적하여 하는 것은 아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내가 기도하오니 아히도벨의 지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라고 한다.
질문. 다윗은 그의 원수들에 대하여 저주를 사용했고, 원수들의 완전한 멸망을 위해 기도했다(시59편,109편). 바울도 마찬가지다(갈5:12,딤후4:14). 베드로도 같다(행8:20). 어쩐 일인가?
답. 첫째,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분의 영을 비상한 수준으로 주셨다. 이것으로 그들은 그들의 원수들을 분별할 수 있었고 그들의 악함과 악의가 치료될 수 없으며, 결코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판단한 것이다. 이와 같은 기도로써 초대교회는 배교자 율리안을 파면했다. 악하고 가망이 없는 대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순수한 열정을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대적을 향하여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을 했다. 우리는 우리의 열정을 의심해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우리의 열정은 증오, 시기, 경쟁, 보복에 대한 욕망 등의 악한 정서와 함께 섞여 있기 때문이다.
질문. 다윗이 그의 원수들을 저주했던 시편을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가? 다음 단서와 함께 읽거나 노래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과 교회의 원수들에 대하여 불특정하게 사용해야 한다. 완고한 적들이 있음을 항상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특정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둘째,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그것들을 끝까지 완고한 죄인들에 대한 마지막 심판선언을 선포하시는 성령의 확실한 예언적 선언으로만 사용해야 한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이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왕국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셋째, 그것들은 육체, 마귀와 그의 사자들, 그리고 세상 등 영적인 적들을 대적하여 사용될 수 있다.
2) 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한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어 서로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의 형제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5:23-24은 “네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만일 너희 형제가 너를 대적한 일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너의 예물을 드리라”고 한다. 또 이사야1:15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기도해도 듣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형식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뇌물과 압제, 사기, 고리대금 등을 버려야 할 것이다. 세상의 속된 노래는 “사람마다 자신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사시도다”고 말한 이것이 사람들이 서로서로에게 품는 속된 사랑과 관심이다. 그러한 기도는 이사야 66:3이 말하는 바 “개를 드리는 희생”과 같이 혐오스러운 것이다. 생각해 보라.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들이 그들의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을 수 있겠는가?
3)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배운다. 이 기도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주님께는 세상과는 다른 질서가 있다. 믿음을 가진 자라면 모든 사람이 그의 자녀들이다. 가난한 사람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선한 유업을 가지며, 왕과 다름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더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도 교만함으로 부풀어 올라서는 안 된다.
“하늘에 계신”
질문. 어떻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분은 무한하시므로 모든 곳에 계셔야 하지 않는가? 답. 첫째, 그분의 위엄, 즉 그분의 능력, 지혜, 공의, 자비가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무엇이든지 그가 뜻하시는 일을 행하시나이다”(시115:3).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라”(시2:4). 둘째, 이 지상의 삶 이후에 하나님은 가장 높은 하늘에서 그의 천사들과 성도들에게 즉시 가시적으로 그분의 영광의 충만함을 나타내시고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간구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
1) 로마교의 성지 순례라는 것이 헛되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보라. 땅은 그곳이 어느 곳이든지 하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2) 십자가 숭배라든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상 등 교황주의자들의 우상숭배를 뒤엎어 버린다. 이런 것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상상하게 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우리에게 우리의 눈을 하늘로 들도록 가르친다.
3) 최대의 경외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며 지상적인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훈계를 받는다. “하나님 앞에서 네 입을 함부로 놀려 말을 하지 말라”(전5:1). 그 이유는 “그분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네 말을 적게 하라”. 이 경외심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정서의 거룩함과 행동의 단정함 속에 나타나야 한다. 온갖 생각의 방황과 모든 헛된 지껄임을 피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에 회중이 모여 기도할 때 눈이 멀어 지각이 없이 기도한다. 다른 일들이나 재물이나 세상적인 일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기도는 매우 심각한 죄이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조롱하는 것보다 살인이나 도둑질보다 큰 죄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직접 대적하는 것이며 다른 것들은 사람들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죄는 첫 번째 돌판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분별하기가 어려우며 경시된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면, 모든 잠자는 기도와 죽은 기도를 버리고, 우리 마음에 경외심을 가지고 여호와 존전에 나아가자.
4)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야 하며,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주 여호와여, 내가 나의 영혼을 주께 올리나이다”(시25:1). 어린 아이는 그의 아빠의 무릎에 있을 때나 엄마의 품에 있게 되기까지는 결코 안정감을 찾지 못한다. 하나님의 자녀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정서적으로 그리고 영으로 그들의 하늘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되기까지, 그리고 기도로 그분의 품속으로 기어들어가기까지는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다.
5) 특별히 하늘의 속한 것들을 구하는 것이다. 지상적인 것을 요구하되 그것이 우리를 영원하고 불멸하는 하늘 상속, 곧 우리가 부름받은 그것을 섬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6)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이 순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더 나은 나라를 갈망해야 한다. 하늘 자체가 아닌가? 우리는 모든 방편을 다 사용하여 그곳에 들어가기를 계속해야 한다.
주기도의 이 서론에는 이중적 지주 또는 버팀목이 포함되어 있다.
첫 번째 지주는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전능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분이 하늘에 계시다고 기록함으로써 더 엄중히 표시하였다. 두 번째 버팀목은 하나님이 그 간구를 즉시, 기꺼이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아버지라는 칭호 속에서 배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며(요16:23), 우리의 모든 불행과 궁핍함을 돌보시며(마6:32), 지상의 어떤 아버지가 그의 자녀를 불쌍히 여기는 것보다도 우리를 더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시103:13)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나 우리 머리로 공상하거나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시리라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약속에 길을 잡고, 그 방향을 따라 우리의 간구의 뼈대를 만들며, 직각을 잡아야 한다. 절대적으로 약속된 것들, 곧 구원에 필수적인 모든 은혜와 같은 것들은 절대적으로 요청되어야 한다. 보다 덜 필수적인 은혜나 현세적 축복들과 같이 조건적으로 약속된 것들은 조건과 함께 요청되어야 한다. ‘조건과 함께’라는 말은 그것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거나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면, 그것은 우리에게서 너무 멀리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예외가 있다. 하나님이 어떠 현세적 축복을 절대적으로 약속하시는 경우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노년에 약속을 하셨다. 또 그 나라를 사울 후에 다윗에게 약속하셨다.
70년 후에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할 것을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다.
이 서문은 우리를 분발시켜서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과 경외심을 불어넣는다. 사랑하라. 왜냐하면 그들은 아버지에게 기도하기 때문이다. 경외하라. 그분은 하늘에서 위엄이 충만하시기 때문이다.
윌리엄 퍼킨스, “주기도 해설”, PP 6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