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신학의 패러다임전환: 존 후퍼, 크롬웰, 통일령/ 로이드 존스
헨리 8세는 단지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만 벗어나기를 원했다. 교황을 대신하여 국왕인 자신이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바꾸지 않았다. 신앙적인 면에서 헨리 8세는 죽는 날까지 로마 가톨릭교도였다. 후퍼의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과 모든 교회를 자신의 가르침 아래 두셨다. 인간의 양심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그 어떤 법도 언급될 수 없다.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 인간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의 법에만 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성경에 대한 약간의 지식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후에 이 성경을 통해서 주교들과 박사들, 설교자들과 보조 목사들의 설교가 쓸개즙과 같이 쓴지 아니면 꿀과 같이 단지, 혹은 그들이 자기 자신의 법을 전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법을 전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하셨다. 인간이 만든 법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얽맬수록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되고도 올바른 이해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따를 것은 오직 성경과 사도들의 교회뿐이다. 그 어떤 인간의 권위나 심지어 그룹이나 스랍과 같은 천사들도 따라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1662년에 활동했던 사람들이 믿고 가르쳤던 대표적인 내용이다.
“제가 확신하기로는, 목사가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은 하나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가장 온전했던 초대교회에서도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없다.”
“원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시요.” 이 원시 교회의 회복! 바로 이것이다.
“이 원시 교회와 견줄 만한 교회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상숭배적이고 미신적인 모든 움직임과 징후들을 제거하라. 그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참된 신앙을 세우라”.
“왕이나 황제, 혹은 고위 관리들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마귀나 마귀를 섬기는 자에게서 전수받은 그 어떤 물건이나 촛불, 예복, 십자가나 제단과 같은 것들을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물건들이 신앙과 관련하여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교회에서 용납된다면 나중에는 그러한 것들이 교회에서 필수적인 것이 되어 계속 보존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 말인가!
그는 엄청난 압력을 받은 후에 결국 그로체스터의 주교직을 수락하였다. 자신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강하게 거절했다. ‘주교들이 작성한 기도서를 조금도 변개하지 않고 성실히 지키겠다’는 맹세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거기에 ‘수치스럽고도 불경건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교들이 입는 예복도 입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성경 어디에도 이 두 가지 행위를 뒷받침해 주는 구절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후퍼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1662년에 활동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그들이 그러한 행동을 감행하도록 이끈 원리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그 어떤 것도 신앙의 조항이나 지켜야 할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양심을 구속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와 반대로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므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성경에 위배되지도 않고 성경이 그것을 금하고 있지도 않다면, 교회의 권위나 어떤 적법한 권력에 의해서 신자들에게 부과될 수도 있다”라고 주장했다. 교회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냐에 대한 상반된 두 견해 사이에 일어난 싸움은, 1662년까지 약 100년 동안이나 영국 교회 내에서 계속되었다.
후퍼는 당대의 영국 국교회 목사들이 착용했던 ‘예복’에 관해서 그가 한 말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다음의 교리를 말한다. 곧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된 것들을 다시 불러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바울은 아론의 제사장직이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 안에서 이미 폐지되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때 모든 의식과 예복과 기름 부음과 성별하는 것들도 함께 폐지되었다. 이처럼 아론의 제사장직에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조차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양립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물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책의 기록에 따라 아론이나 이방인들에게서 기원된 것일 뿐인 교황의 제사장적 지위를 가진다고 하는 주장이 감히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양립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교회에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것이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독일과 스위스와 스코틀랜드에 흩어져 있던 개혁주의자들도 이 모든 개혁에 일제히 동의했다. 이는 로마교회의 교리는 물론 그 의식까지도 완전히 거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영국 국교회 내에서도 이와 동일한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며, 국교회는 “로마교회라고 하는 마녀의 잔에 들어 있는 사술을 비워 내고 그 사술의 매력적인 빛깔로 사람들을 유혹했던 잔을 치워 버려야 한다”라는 청교도들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제임스 1세가 펼친 정책으로 인하여 약 300명의 청교도 목사들이 영국 국교회를 떠났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화란으로 떠났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밖의 여러 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1620년에는 잘 알려진 대로 필그림 파더스가 메이플라워를 타고 미국을 향해 떠났다. 이들은 화란에서 거주하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찾아 뉴잉글랜드로 향한 것이다.
1625년에 왕좌에 오른 찰스 1세는 곧바로 교회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대주교 라우드에게 일임하였다. 혹독한 시련이 시작되었다.
1645년부터 1653년까지 장로교주의자들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교회에서도 그 세력이 대단히 컸다. 그러나 1653년 공화정이 막이 내릴 때까지는 독립교회주의자들에게 그 주도권을 빼앗겼다. 독립교회주의자였던 크롬웰은 새로운 장로가 예전의 사제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강력하게 독립교회주의자들의 편에 섰으며, 이로 인해 장로교주의자들은 세력을 잃고 말았다.
참된 종교적인 관용의 면에서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다름 아닌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장로교주의자들은 관용의 면에서 매우 인색했으며, 제5왕국파들과 다른 분파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각각 자신이 가진 견해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투쟁했다. 반면 올리버 크롬웰은 이들의 모든 요구에 대해서 저항했으며,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는 로마 가톡릭교도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유대인들에게도 거할 수 있는 보호시설을 마련해 주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의 종교적인 관용의 면에서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다. 그로 인해서 그는 장로교주의자들과 제5공화국파와 수평파, 그리고 퀘이커 교도는 물론이요 감독교회주의자들에게도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1651년 올리버 크롬웰이 죽자 그의 아들인 리차드 크롬웰이 잠시 권력을 잡았지만, 그의 통치는 별로 신통치 못했다. 그래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정이 복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장로교주의자들이 다시 실권을 장악하여 의회의 주축을 이루어 있었다.
찰스 2세가 돌아 왔을 때 백스터와 그의 동료들은 그를 영접하러 나가 그에게 관용을 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만약 백스터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너무나 합리적이며 양보와 타협을 하는 데에 지나칠 정도로 열려 있었다는 점이다. 장로교주의자들은 “왕이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는 최고의 통치자이며, 국가뿐만 아니라 교회의 제반 문제에 대해서도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다”라고까지 말했다. 존 낙스였다면 꿈에서라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칼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기보다 타협하고자 했던 백스터는 이 정도까지 양보할 각오를 했던 것이다. 주교들은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주교들은 “주교들을 통해서 성직을 받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사제로서의 서품을 받아야 한다고”고 주장했다. 1662년 전에는 결코 영국 국교회에서 누군가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에 적합한지를 검증하기 이전에 반드시 주교에게 안수를 받아야 한다는 법을 제정한 적이 없었다. 1662년 5월 19일, 왕은 이 통일에 관한 법령에 대해서 승인했고 이 법안은 마침내 ‘통일령”이 되었다. “영국 국교회에 속한 모든 목사들은 166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매의 날까지 반드시 이 법령의 요구에 복종해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최종 기한과 관련하여 예상되었던 성 미카엘 축일이 아니라 성 바돌로매의 날인 8월 24일로 정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가혹한 이유가 있었다. 성직자들이 일 년의 십일조를 받는 날이 바로 성 미카엘 축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반대자들을 대하는 모습과 청교도들이 공화정이 실시되는 동안 그들을 대했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요!
청교도들은 통일령에 따라 자신들에게 강요되는 요구에 저항하고 거기에 동의하기를 거부했다.
<불신자들을 향한 경고>(Alarm to the Unconverted)라는 책의 저자인 경건한 조셉 얼라인의 부인 얼라인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통일령이 공표되기 전, 제 남편은 자신이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또 자신의 영혼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영혼을 구원하는 이 복된 사역을 단념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구하여 밤낮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매우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가 이미 동의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또 그는 종종 자신은 절대 사소하고 불분명한 일로 인하여 이 사역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의와 찬성을 구하는 조항들을 본 후에 거기에 서약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그러한 자신의 결정에 만족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