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십스, '개 혁', 3장 통곡의 덕 (김영희)
제 3 장 통곡의 덕
“내가 이곳과 그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대하 34:27)
선지자 에스겔이 말한 물은 성전에서 흘러나와 점점 깊어져 처음에는 발목까지 차던 물이 무릎과 허리, 마침내 흘러넘치는 강물이 되었다. 이 본문도 마찬가지다. 처음 연약한 마음에서 점점 깊이 들어가 속사람의 신비로운 겸손을 지나 마침내 요시야의 내적 겸손의 외적 표현에 이르렀다. 즉 그는 옷을 찢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파멸의 두려움의 원인인 자신과 백성의 죄를 깨닫고 마음이 슬퍼서이다.
“네가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 요시야의 내적 감정의 외적 표현은 두 가지로 나와 있다.
옷을 찢었다. 통곡했다. 그는 말로도 슬픔을 표현하였을 것이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 충격과 슬픔과 비탄이 너무 커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그의 말보다 심정과 눈물을 더 중시하시고 거기에 주목하셨다. 복음서에 나오는 가련한 여인도 그리스도께 와서 울고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어 드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눅7:38) 베드로도 닭이 세 번째 울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바라보자 차마 할 말이 없어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했다.(눅22:61-62) 괴로운 영혼에서는 어눌한 말밖에 나올 수 없고, 상한 마음은 말도 더듬거릴 수밖에 없다.
1. 옷을 찢었다.
옷을 찢는 행위는 고대에 흔히 있었던 일이다. 그것은 슬픈 마음의 가시적 표현이었다. 욥도 옷을 찢었고(욥1:20), 바울과 바나바도 옷을 찢었다.(행14:14) 히스기야도 랍사게의 말을 듣고 옷을 찢었다.(사37:1) 이교도들도 비참한 사고를 당하면 옷을 찢곤 했다.
옷을 찢는 이유는 슬픔에 겨워 자신이 아무것도 입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시야도 자신의 신분과 왕위와 왕관과 왕의 체통을 무시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기를 다스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보았고, 한편으로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의 비참한 상태를 보았다. 그 결과 자신이 그런 장식물을 주렁주렁 달고 있을 자격이 없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첫째로, 옷은 알몸을 가리고 악천후의 피해를 막는데 필요하다.
둘째로, 옷은 성별과 신분을 구별해 준다.
셋째로 옷은 우리의 악한 육신을 꾸미는 장식물의 역할을 한다.
요시야는 바로 이런 장식물의 역할을 하는 옷을 찢었다. “내가 나를 가려야 하는가? 하나님이 노하셨다. 그분의 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나는 일체의 세상 것에서 어떤 낙도 누리지 않겠다” 자신이 아무런 옷도 걸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외적인 표현일 뿐이며, 따라서 반드시 진실한 내면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우리는 비통할 때 마음을 찢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마음을 찢지 않고 옷만 찢는 것은 위선이다. 그래서 요엘은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라고 말했다.(욜2:13) 그 둘이 함께 있으면 아름답다. 외적인 표현만 있고 비통한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꼴사나운 위선이다.
질문) 왜 그 둘이 함께 있어야 하는가?
대답) 몸과 영혼이 함께 죄의 행위에 가담하기 때문이다. 영혼이 가담하지 않는 몸의 죄란 없고, 몸이 가담하지 않는 영혼의 죄도 없다. 따라서 몸과 영혼이 함께 겸손해야 한다. 사람의 신앙적 행위는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옷을 찢고 눈물을 짜내기는 쉽지만, 영혼으로 아파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인간이 마음은 가장 힘든 길은 버리고 가장 쉬운 길만 찾는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로 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갈 때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야 한다. 참된 신앙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자아의 실상을 제대로 깨달아야 하고, 자신이 맞이해야 할 하나님이 영광과 위엄으로 충만하시고 크신 하나님임을 알아야 한다. 신앙이란 마음에서 나와서 몸가짐으로 퍼져 나가야 한다. 진실한 신앙은 내면의 마음가짐이 표출된 것이다.
적용) 이 시대 사람들의 내적 겸손은 어디 있는가? 하다못해 외적 겸손은 어디 있는가? 그들은 어느 정도 자신을 낮춘다. 하지만 자신의 비참한 상태가 두려워 겸손해지는 사람들은 우리 중에 얼마나 적은가! 나아가 교회 전반의 비참한 상태로 인해 겸손해지는 사람은 또 얼마나 적은가! 통곡하는 한 영혼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가?
우리에게 옷을 찢는 풍습은 없다. 하지만 옷차림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찢기는커녕 유행을 중시하고 화려한 옷을 과시하려고 하나님의 집에 간다. 가장 겸손해져야 할 그곳에서 그들은 교만을 드러낸다. 정작 그곳은 위대하신 천지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멸하는 불”이신 그분의 임재 안에 서기 위해 오는 곳이다. 그들은 감히 그분께 맞서며 교만으로 그분을 노하시게 한다. 우리도 선한 왕 요시야처럼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2. 통곡했다.
“네가---통곡하였으므로” -요시야의 내적 겸손의 두 번째 외적 표현으로 통곡이 옷을 찢는 행위보다 더 내면과 닿아 있다.
원리 1. 겸손의 행위에 몸과 영혼이 함께 있어야 한다.
몸과 영혼은 둘 다 하나님이 지으셨고,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셨다. 몸과 영혼은 서로 교류한다.
① 몸과 영혼은 지각과 전달을 통해 서로 교류한다. 감각적 자극은 오감을 거쳐 영혼 속에 들어온다. 몸이 몸을 주관하고 인도하는 일을 영혼에 의존하듯이, 영혼도 많은 일을 몸에 의존한다. 성찬이 좋은 예다. 설교는 청각을 통해 들어오지만 성찬은 더 많은 감각을 통해 더 생생히 그리스도를 만난다. 몸과 영혼은 정보의 전달을 통해 서로 교류한다.
② 몸과 영혼은 유혹당할 때 서로 교류한다. 외부의 자극은 세속적인 사람들의 오감을 즐겁게 한다. 그것이 감각을 거쳐 영혼 안에 들어가면 영혼은 거기에 지배당할 수 있다. 그래서 외부의 자극은 위험한 유혹이 된다.
③ 몸과 영혼은 복종이나 실행을 통해 서로 교류한다. 하나님은 몸과 모든 지체를 영혼의 도구와 무기로 지으셨다. 몸은 영혼이 거하는 집이요, 영혼의 일터다. 그런데 영혼은 몸과 모든 지체를 도구나 무기로 사용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있고 욕되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겸손해질 때도 몸과 영혼이 함께 있어야 한다.
- 교황주의자들은 죄가 몸에만 있다고 생각하여 몸을 괴롭히고 낮춘다. 고행으로 공로를 쌓으며 자만에 빠지는 것이다. 영혼을 빼놓고 몸만 괴롭히는 것은 거짓된 겸손이요 참된 교만이다.
원리 Ⅱ. 하나님이 사람을 괴롭게 하시거나 낮추시면 나라도 그를 구할 수 없다.
요시야는 왕이요, 절대군주였지만 하나님의 경고 앞에서는 그의 왕국도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나님이 사람을 끌어내리시면 어떤 나라도 그를 지켜 줄 수 없다. 아무리 요시야처럼 왕이라 해도 소용없다. 지금 떨지 않으면 나중에라도 그분이 반드시 떨게 하신다.
원리 Ⅲ. 내면의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죄로 인한 눈물과 통곡은 누구에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성별과 신분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도 어울리는 자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대할 때는 자신의 지위를 잊고 최선의 방법으로 그분을 만나야 한다. 심지어 복되신 우리 구주께서도 하나님을 대하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대하셨다.(히5:7)
적용) 겸손히 낮아지는 거룩한 일은 그래서 정당성을 얻는다. 하나님을 대할 때 우리는 아무리 낮아져도 부족하다. 다윗은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라고 말했다.(삼하6:22) 우리의 신앙고백은 부족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위선이 없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과 겸손을 잘못 알고 있다. 그들은 신앙을 외적 행동으로만 생각해, 조금 듣거나 읽거나 기도하면 그것으로 되는 줄 안다. 우리의 외적 표현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정의를 바로 아는 데서 비롯되어야 한다.
모든 거룩한 행동은 먼저 내면에서 싹터 바깥으로 흘러나와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정의와 위엄과 자비를 묵상하여 내면이 바뀌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몸으로 표출될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인간은 죄를 끊을 수 있다. 하나님을 상대할 우리가 겸손히 낮아지지 않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다. 하나님을 대할 때는 두려워 겸손히 낮아지는 것이 지혜이자 모든 용기의 근원이다. 요시야도 왕이지만 그렇게 했다. 이 구절의 앞부분에는 연약한 마음이 나오고 여기서는 그 연약한 마음이 녹는다. 전자가 구름이라면 후자는 비다. 요시야의 눈물을 유발한 외적 요인은 나라에 닥친 위험이었다.
원리 Ⅳ. 백성에게 닥친 모든 위험을 마음에 품는 일은 누구보다도 목민관들과 관계된 일이다.
왕들은 모든 심판을 누구보다도 더 마음에 품어야 한다. 요시야는 왕인 자신의 안위보다 나라를 더 생각했다. 왕은 백성의 머리요 목자다. 목자는 양떼를 돌보는 사람이다. 모든 감각이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왕에게 그런 마음이 있어야 왕과 백성이 하나가 될 수 있다. 왕은 백성의 머리요 목자다. 머리는 몸의 모든 아픔을 금세 지각한다. 모든 감각은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목민관이 백성에게 따뜻한 애정을 품으면 백성도 그가 곤경에 처할 때 울고 슬퍼한다.
원리 Ⅴ. 자기가 사는 곳과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를 마음에 품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도리다.
우리는 교회와 국가의 환난과 비참한 상태를 마음에 품어야 한다. 자신의 문제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문제도 아파해야 한다. 요시야처럼 교회의 상태로 인해 마음을 낮추는 그리스도인은 요시야가 받은 상을 받는다. 느헤미야도 고위직에 등용된 데 대한 기쁨보다 동족인 유대인들로 인한 슬픔과 아픔이 더 컸다.
우리도 이 땅에서 저질러지는 죄들을 보며 슬퍼하고 통곡할 수밖에 없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도 통곡할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우상숭배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아무리 돌 같은 마음도 그것을 보고 들으면서 어찌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악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서도 울고 통곡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자기를 대적하는 예루살렘의 악한 유대인들로 인해 우셨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그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싸움꾼으로 몰아세웠다. 그런데도 그는 그들을 위해 자신이 충분히 울지 못할까 두려워 간절히 눈물을 소원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9:1)
질문) 예레미야는 왜 그들 스스로 울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
대답)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잘 알았던지라 그들 스스로 울게 해달라는 간구가 헛수고로 보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원한 적이 없어도 그들을 위해 울었다.
우리를 향해 심판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울어야 한다. 심판이 오기 전에 울 수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표시다. 악인들은 심판이 감각으로 느껴져야 울지만, 지금 믿음으로 그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복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는 울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울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①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우리의 교감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 그리스도의 영을 지닌 자가 그리스도처럼 슬퍼하지 않을 수 있는가?
② 몸의 지체들 사이의 교류 때문이다. 우리는 다 신비로운 한 몸의 일부분이다. 다른 지체들의 비참한 상태를 마음에 품지 않을 수 있는가?
③ 참된 은혜가 있는 곳에는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의 오만한 자세와 신성모독의 말들 때문에 교회를 위한 눈물과 통곡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비난과 욕을 듣고도 가슴이 아프지 않을 자녀가 누가 있겠는가?
④ 은혜로운 사람은 통곡하지 않는 위험 때문에 운다. 통곡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죄다. 교회의 죄와 비참한 상태를 우리 것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애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었다.(고전5:2) 하나님은 시대의 죄 때문에 통곡하는 모든 사람을 따로 구별하여 주목하겠다고 약속하셨다.(겔9:4)
⑤ 우리는 개혁에 통곡을 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와 나라가 위험에 빠진다. 아간을 찾아내 벌하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한 상태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게 된다.
질문) 어떻게 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통곡할 수 있는가?
대답) ① 장애물을 제거하라. 돌 같은 완고한 마음을 제거해야 한다. 완고한 마음은 무엇으로도 녹일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고 광야에서 그분의 모든 자비와 복을 보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나님께 부드럽고 연약한 마음을 구해야 한다.
② 세상 것들을 사랑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영혼은 사랑의 불로써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의 마음을 품으면 영혼을 고갈시키는 이기심을 죽일 수 있다. 하늘의 눈물은 바로 그 복된 불에서 나와야 하고, 상한 마음의 증류수는 바로 그 사랑의 정신에서 맺혀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모든 계명을 사랑으로 압축하셨다. 과연 사랑이 전부다.
③ 영혼이 잘 슬퍼하려면 다른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를 최대한 많이 보아야 한다. 기꺼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을 때는 듣기라도 해야 한다.
④ 하나님의 교회 상태에 대해 읽어야 한다. 창세 이래로 교회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복을 받고자 한다면 마땅히 우리는 힘써 애통해야 한다.
⑤ 스스로 자기 마음에 여린 감정을 가꾸어야 한다. 영적으로 둔하고 메마르고 황량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하기를 아들인 자기를 사랑하여 목숨을 버린 어머니를 위해서는 울 수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자신을 위해서는 눈물이 없다고 했다. 영혼의 위험을 인해서는 더욱더 울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찬은 기쁨만 아니라 슬픔이 함께 있어야 한다. 성찬식에는 그 둘이 함께 섞여 있다. 마음의 눈으로 옛 아담을 보아야 한다. 우리의 악한 본성, 더러운 말, 불순종한 행위, 반항적 생각을 돌아보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영혼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분을 십자가에 매단 것은 세 개의 못이 아니라 나의 죄였다.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12:30) 성찬은 기쁨과 감사의 시간만이 아니라 슬픔의 시간이기도 하다. 성찬을 기뻐하려면 죄로 인해 낮아진 마음에 기뻐해야 한다.
반문)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하지 않았는가?(살전5:16,18)
대답) 애통해야 할 이유와 기뻐해야 할 이유는 늘 공존한다. 애통해야 할 이유는 우선 그리스도인의 내면에 있다. 자신의 죄성과 날마다 범하는 죄를 본다. 동시에 기뻐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을 생각한다. 바울도 자신과 자신의 악을 볼 때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절규했지만, 동시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로다” 이렇듯 언제나 기쁨의 원인과 애통의 원인이 함께 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 안에는 신기하게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 있다.
우리는 슬픔에 완전히 파묻히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지나친 기쁨에 도취하지 않는다. 자기 안에서 늘 슬픔의 원인을 보기 때문이다. 희비의 혼합의 비율은 원인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가장 기뻐해야 할 때가 있고 가장 울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알려는 노력은 가치가 있는 일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분별의 영을 주셔서 그 때를 가르쳐 주신다.
질문) 통곡을 끝마쳐야 할 때가 언제인지 어떻게 아는가? 영혼은 늘 애통하거나 늘 기뻐하고 있을 수만 없다.
대답) 마음을 다잡아 힘써 애통하고, 그분의 긍휼을 간구하고, 짧으나마 충분한 기도로 자신을 쏟아 놓는다면, 우리는 애통의 본분을 다한 것이다. 그 뒤에는 기쁨과 감사의 원인을 바라보아야 한다. 나라와 우리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을 바라보면 감사할 수밖에 없다. 영혼을 다잡아 힘써 애통했으면 이제 기쁨과 감사의 원인을 바라보아 영혼을 돕고 일으켜 세워야 한다. 좋은 것을 얻는 최선의 방법이 기도와 애통이라면, 그것을 보존하는 최선의 방법은 감사와 기쁨이다.
질문) 교회의 죄와 비참한 상태로 인해 울고 싶지만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이들에게 뭐라 할 것인가? 영적인 일들보다 외적인 일들로 더 많이 우는 영혼들에게는 뭐라고 할 것인가?
해답) 눈물을 말할 때 늘 명심해야 할 것은 가장 귀한 눈물은 내면의 슬픔과 사랑에서 솟아나는 눈물이다.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눈물이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눈물의 양은 중요하지 않다. 눈물은 없지만 참된 슬픔도 있을 수 있다. 기질상 남들보다 쉽게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고, 반대로 슬픔이 더 큰데도 눈물은 가장 적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교회의 죄와 비참한 상태로 인해 가끔이라도 울 수 없다면 자신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외적인 일들에 눈물이 더 많은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정죄해야 하는가? 나는 아니라고 답하겠다. 외적인 일들에 대한 본능적 슬픔은 성령과 본능 둘 다의 산물이다. 다윗이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하며 울던 때가 그런 경우이다. 위로 성령과 아래로 우리의 본능이 함께 있으면 외적인 일들로 인해 크게 슬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실 많은 본능적 슬픔보다 적은 영적 슬픔이 더 낫다. 영적 슬픔은 영혼을 살찌우기 때문이다. 본능적 눈물이 없는 사람은 그만큼 타락했다는 의미다.
“내 앞에서---통곡하였으므로” - 요시야는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울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졌다. 그분은 드러난 죄만 아니라 우리 마음까지도 아신다. 우리는 위선 없이 그분 앞에서 울어야 한다. 세상이 보든 말든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한다. 그것이 위선 없는 눈물이다. 요시야가 그렇게 겸손히 울었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요시야의 겸손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요시야의 심중 언어까지도 들으셨다. 성령은 우리의 속뜻을 아신다. 우리의 갈망과 탄식과 신음 소리를 들으신다. 그분의 귀는 자녀의 부르짖음에 늘 열려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의 모든 유혹 앞에서도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원리 Ⅵ.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낱낱이 주목하시고 이해하신다.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38:9),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시145:19)
이유) ①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기 때문이다.
② 그분이 사랑으로 맡으신 아버지라는 관계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입양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면 그분은 듣지 않으실 수 없다.
③ 육신의 아버지의 사랑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속성과 사랑 때문이다. 그분은 약속하셨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④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멸시할 수 없음은 그것이 그분 자신의 영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신음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에는 제물이신 그분 아들의 향기로운 냄새가 배어있다.
⑥ 그것이 그분의 뜻대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반문) 기도한지 오래되었는데도 응답하지 않으신 것은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이다.
대답) 하나님은 언제나 들으신다. 다만 우리를 더 끈질기게 하시려고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가나인 여인의 말을 처음부터 들으셨으나 거부하고 퇴자를 놓으셨다. 또한 자녀들의 기도를 음악 소리처럼 즐거워하시기 때문이다. 자녀의 말이 비록 어눌할지라도 그분은 마냥 좋아하신다. 그리고 때로는 정말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진중에 아간이 숨어 있거나 배 안에 요나가 있기 때문이다.
적용)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를 들으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누려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분은 때가 되면 우리 모두에게 응답하신다. 성령의 감화로 인한 탄식 하나, 눈물 한 방울, 어떤 선한 것도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분 때에 반드시 풍성히 응답하신다.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기도할 마음을 불러일으키시고, 기도의 동료로 중보자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장차 때가 이르리니 그분은 기도 외에 아무것도 받지 않으실 것이고 우리는 기도 외에 아무것도 올려 드릴 게 없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우리가 평소에 기도했고 이제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안이 되겠는가? 온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대적하고 다 빼앗는다 해도 우리의 하나님만은 빼앗을 수 없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기도하시는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한 우리는 결코 비참해질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는지 잘 살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 응답으로 받은 것이 아니면 귀한 줄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 어찌 응답에 감사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심을 알기에 우리는 무엇이든 부족할 때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그 놀라운 특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온 세상 가치도 이 하나의 특권만 못하다.
질문)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가?
대답) 우선 우리는 이 복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한다.
① 그분의 말씀을 들어라. 요시야도 낭독되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녹았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28:9)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은즉---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잠1:24-28)
② 우리의 기도가 상한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기도는 상한 마음의 제사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성 베르나르는 이렇게 고백했다. “저의 삶은 늘 부족하지만 주께서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시니 거기에 저의 위안이 있습니다”
③ 요시야처럼 우리의 기도에 상한 마음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진실을 담아야 한다.
④ 요시야처럼 우리도 단호한 개혁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죄 가운데 살려는 마음밖에 없다면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알아주시지 않으신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