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2', 15장 확 신
제 15 장 확 신
1. 확신에 대한 다양한 견해
1)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견해
로마 카톨릭교회는 이 확신의 교리를 개신교의 가장 해롭고 못마땅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라고 여긴다. 그들은 이생에서 확신을 가질 수 없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모교회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내적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개념은 도저히 견딜 수 없고 위험한 이단이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칼 바르트도 그렇다. 그는 구원의 확신이라는 개념을 철저히 혐오한다. 그의 신학 체계에 비추어 보아 일관성 있는 행동이다. 바르트는 체험을 아주 싫어했으며 이 모든 일 중 정말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더 나아가 믿음을 표현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필연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2) 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본질이라는 견해
개신교의 선구자들-루터 칼빈과 그 동료들-은 이 모든 것에 반대하여 정반대의 극단으로 나가 믿음의 확신이 믿음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말했다. 카톨릭 교회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사람들을 교회의 속박과 폭정에서 해방시키는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이 확신이 없이는 믿음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하기에 이르렀다. 존 웨슬리도 초기에 똑같이 가르쳤다. 후에 그는 수정했다. 이것은 종종 일어나는 극단적 반작용으로써, 특별히 모호하고 막연하고, 영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인 시기를 겪은 후에 잘 나타난다.
3) 구원의 확신이 믿음의 필수 요소는 아니지만 확신을 소망해야 한다는 견해
개혁주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타나 있다. 확신은 믿음의 필수적 부분이 아니며 확신이 없어도 믿음을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확신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확신을 소망해야 하고 그것을 얻기까지 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2. 믿음과 확신의 관계
1) 의심의 문제
의심 자체는 믿음과 상반된 것이 아니다. 의심은 믿음에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 대비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심각한 의심을 경험할 수 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0).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믿음을 잃어버렸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의심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믿음이 연약하거나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심은 죄로 인해 생길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지면 정죄감을 갖게 되고, 이어서 의심이 생길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의미는 아니다. 잠시 동안 의심의 희생자가 된다.
의심은 믿음의 본질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생겨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때로 믿음이 능동적인 것이며, 적용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순전히 수동적인 상태에 머물러 뭔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만 있다면, 믿음보다 의심이 앞설 가능성이 높다. 믿음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하며 진리를 붙잡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우리는 의심을 제거할 것이며 믿음은 더 강해질 것이다.
2) 확신이 없이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1:10). 우리의 부르심이나 택하심을 결정할 수 없지만, 우리는 굳게 할 수는 있다. 이 일에 힘쓰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은 분명 확신이 없이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우리에게 확신을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3) 객관적 확신과 주관적 확신
객관적 확신과 주관적 확신은 차이가 있다. 고전적인 예는 존 웨슬리이다. 마음에 ‘이상한 따뜻함’을 느꼈던 엘더스게이트 가에서의 사건 이전에도 존 웨슬리는 진리를 믿었고 그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객관적 확신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이 되도록 그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내면의 사건이 바로 주관적 확신이었다.
참된 확신은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진리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하지만 저는 나의 내면, 스스로의 확신에 대해서는 행복하지가 않아요.”
3. 참된 확신의 근거
여기서의 확신은 완전한 확신을 의미한다. 즉, 객관적일 뿐 아니라 주관적인 확신, 외부적일 뿐 아니라 내면적인 확신을 말한다.
1)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그 다음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5:10-11). 그러므로 나의 확신의 첫 번째 근거는 그것이 여기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여러 구절들은 믿는 자들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한다. 믿은 자들에게는 이미 영생이 있다는 것이다. 이 구절들을 접한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확신의 첫 번째 근거일 뿐이다. 애석하게도 성경 말씀만이 유일한 근거이며 더 이상은 필요없다고 말하면서 그 이상 나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는 그런 관점이 극도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요한 일서는 한때는 교회의 일원이었으나 진정으로 속한 자가 아니었기에 지금은 떠나 버린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해 준다.
2) 생명의 증거
성경은 만일 내가 믿으면 나에게는 영생이 있다고 말해 준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영생을 가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적용할 수 있는 특별한 시금석들이 있을까요? 요한 일서에 나온다. 첫 번째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그러면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이것을 아는 것이 체험적 측면에서 중요하다. 성경은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이 장차 우리가 들어가게 될 기업에 대한 인침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에서 몇 가지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참으로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속죄의 교리들을 참으로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게 성령을 주셨다는 첫 번째 증거는 나의 믿음이다.
둘째로, 내가 이 지식을 사모한다는 사실이 내가 성령을 갖고 있다는 좋은 증거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오직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들만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싶어하고 그분의 이끄심에 복종하고 싶어한다.
셋째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이다. 그 사역은 죄를 드러내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더 강력해질수록 우리는 죄에 대해 더 민감해지고 이전에는 간과해 왔던 일들을 이제는 죄로 여기게 된다. 넷째 증거는 성령의 열매이다. 다섯째는 양자 됨의 영이다.
3)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
믿음의 확신의 세 번째 근거는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하시는 증거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 성령은 추가적인 증인이시다. 바울은 여기서 “그 사실이 우리 영을 통해 증언된다.”라고 하지 않고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증언하신다”고 말한다. 우리 영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 하지만 그에 더하여 성령이 나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신다. 나의 영에 대해 증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영이 무언가를 할 때, 성령이 옆에서 다른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저에게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높은 경지 중 하나이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주님은 실재가 되신다. 주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자신과 성부가 우리에게 찾아와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령은 이 일을 하신다.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오심으로 인해 성부와 성자가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주목하라-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22절). 이 사람에게 주님은 자신을 영적인 방식으로 나타내실 것이다. 이 일을 하실 분이 바로 지금 주님이 말씀하고 계신 성령이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이것이 무엇일까요?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이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명확하고 독특한 작용이다. 이 작용을 통해 성령은 우리가 살아계신 주님을 깨닫고 의식하게 만드신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믿는 것을 넘어서서 일종의 내재적 직관으로 그분을 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실재가 되신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를 인용하길 좋아한다.
주 예수여, 당신을 내게 생생한 실재가 되게 하소서.
바깥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믿음의 눈으로 더 생생하게 보도록
세상의 가장 달콤한 인연보다도 더 귀중하고 친밀한 가까움으로.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처음부터 이것을 증언해 왔다. 이것이 확신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근거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실재가 되시기 때문에, 약속대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이것은 확실한 지식이다. 성도들이 이 사실을 증언한 것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루터, 조나단 에드워즈, 휫필드, 웨슬리, 피니, 무디도 경험했다. 그들 모두는 성령이 자신들의 영으로 더불어 증언하심을 경험케 하셨다는 사실을 증언하였으며, 이 경험이 압도적인 것이었다고 느꼈다.
무디는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뉴욕 시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 경험의 영광과 장엄함과 탁월함 때문에 자기 육체가 짓눌리고 죽게될 것 같이 손을 맞잡고 하나님께 멈추어 달라고 기도해야 했다. 수반되는 감정들은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이 확신의 궁극적 근거이다. 피니의 경우 이 경험은 계속해서 밀려드는 파도처럼 왔다. 그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 존 웨슬리의 경우는 이처럼 압도적인 경험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이상한 따뜻함’을 느꼈다. 이런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런 확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성경이 가르치는 규칙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당신의 믿음을 확증하라. 만일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면 당신이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를 의지하고 있는 면은 없는지 확인하라. 자신의 모든 의를 더러운 옷과 같이 여기고 있는지 확인하고, 천 년을 산다 해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기에 결코 적합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라. 십자가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에만 오로지 의지하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의에만 오로지 의존하고 있는지 확인해보라. 성경 말씀을 스스로에게 적용하고, 말씀을 알아가며, 읽으시라. 제가 인용한 성경 구절들 위에 서서 그 말씀들을 자신에게 적용하시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성경이 그 사실을 말한다. 나는 그 말씀을 믿으며 그 말씀 위에 서 있다.”고 말하라. 그 삶을 사시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시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시라. 하나님께 그분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여러분에게 자신을 나타내 달라고 구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P 272)
4. 참된 확신과 거짓 확신
1) 거짓 확신
거짓 확신은 일반적으로 나쁜 가르침, 잘못된 복음 전도, 사람들에게 결정을 내리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 아니면 성령이 역사하시는 과정이 일어나기 전에 그들을 거듭나게 하려고 애쓰는 것 등으로 인해 생겨난다. 마 7장의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 자들,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잘못된 확신이었다. 마 25장에 나오는 세 비유, 어리석은 처녀들, 자기 달란트를 묻어 놓은 사람, 자기들이 언제 주님께 이러 저러한 일을 행치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의 비유는 똑같은 것을 가르친다. 잘못된 확신이었다.
2) 참된 확신을 가진 사람의 특징
참된 확신의 특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이다. 참된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은 확신을 유쾌하기 그지 없는 것이라거나 흥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 겸손하다. 또한 언제나 성품과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다. 언제나 요한 일서에 묘사된 것과 같은 삶으로 이끈다.
자기 점검
또 하나의 대단히 좋은 시금석이 있다. 만일 여러분이 스스로를 점검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된 확신의 표지이다. 거짓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 점검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참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점검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했으며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권고한다.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소망
참된 그리스도인은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 가운데 행한다. 그들은 진리의 빛 가운데 행하는 겸손한 사람들이다. 참된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소망이 계속 증가한다.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고 말한다.
5.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구원의 확신
휫트필드가 이 놀라운 확신, 성령의 이 직접적인 증거가 어떻게 그에게 주어졌는지, 묘사하는 말을 들어 보라. 그는 오랫동안 이 확신을 추구한 끝에 병에 걸렸다.
병은 칠 주 동안 계속 되었으며, 그것은 이 모든 기간 복되신 성령이 나의 영혼을 정결케 하시는 영광스러운 방문이었다. 나의 이전의 모든 천하고 악명 높은 죄들과 심지어 나의 마음 속의 죄들까지도 이제 절실히 느껴졌다. --칠 주가 끝날 무렵, 그리고 열 두 달 이상 육체와 마음의 말할 수 없는 압박 속에서 신음한 후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나를 자유하게 해 주셨다. 어느날 유난히 목이 타고 입안이 불쾌하게 끈적이는 것을 느끼고는 갈증을 가라앉히려 여러 가지를 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가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셨을 때, 그의 고난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침대에 엎드러져서 “내가 목마르다.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쳤다. 잠시 뒤 나는 나 자신이 치유됨을 알았으며 너무 무겁게 나를 누르고 있던 짐에서 해방되었다. 애통의 영이 내게서 제거되었고 내 구주 하나님을 참으로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며, 한동안 어디로 가든지 시편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기쁨은 점점 더 확고해졌으며,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 이후 간혹 중단되었던 순간을 제외하고는 내 영혼에 거하면서 더 커져 갔다.
구세군에 속한 어떤 사람도 같은 내용을 말했다. 이 사람 역시 진리를 믿은 사람이었다. 그는 객관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으나 주관적인 확신은 갖지 못했으며 그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의 기록이다.
나는 그날 아침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삶을 살고,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나 하나님께 절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자 하는 열망으로 주리고 목마른 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한 없는 욕구를 갖고 깨어났다. 그런 요구를 갖고 나는 성경을 폈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 중에 예수님은 나에게 이생에 사는 사람이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복을 주셨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계시였다. 천국의 사랑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내 영혼은 불 앞에 양초처럼 녹았다. 나는 흐느끼고 또 흐느꼈다. 주님을 향해 죄를 짓고, 주님을 의심하고 주님의 영광이 아닌 나를 위해 살아왔던 것이 혐오스러웠다. 자신을 위한 모든 야망은 이제 사라졌다. 타오르는 불이 나방을 태워 버리는 것처럼 순전한 사랑의 불꽃이 그 야망을 태워 버렸다. 나는 기쁨으로 울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아침 식사 전에 보스턴 코몬스에서 걸어 나왔다. 오, 나는 얼마나 그분을 사랑했는지! 그때 나는 예수님을 알았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 마음은 그 사랑으로 찢어질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분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다. 나는 작은 참새가 지절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사랑스러웠다. ---나는 낯선 사람도 사랑했고, 이교도들도 사랑했고, 온 세상을 사랑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하셨다. 복되도다.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이여, 나는 순결해지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내가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얼마나 주리고 목말라했던가. 그분은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고 나를 만족시키셨다. 신중하게 말하건데 하나님은 나를 만족시키신다. 하나님은 나의 교사, 나의 인도자, 나의 상담자, 나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다.
우리 주님은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성령을 통해 그 일을 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적인 나타남”(존 플레처)을 보게 될 때, 그들은 아무 것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절대적 확신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아직 이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면, 이제 가질 수 있다. 이 확신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세상보다 훨씬 높은 곳에, 우리의 영과 우리가 영들에 적용할 수 있는 시금석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시는 성령의 증거가 있다. 이 증거는 그 필요를 느끼고 그것을 갖고자 열망하고 추구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받을 유산이다. 주님께 허드슨 테일러의 짦은 기도를 올려 드리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