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십스, '개 혁', 4장 성도의 안식 (김영희)
제 4 장 성도의 안식
“그러므로 내가 네게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에 사신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대하 34:28)
최고의 말들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은 다분히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둠 속에서 시작하여 빛 가운데 마친다.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들과 악인들의 차이를 눈에 보이고 손에 느껴지게 드러내신다. 롯과 소돔사람들의 차이, 노아와 음란한 세상의 차이, 홍해에서 이집트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의 차이가 그런 경우다.
본문에서는 그것이 선한 왕 요시야와 그의 백성의 차이가 나타난다. 요시야는 하나님이 악한 반역의 신민들에게 내리실 모든 재앙을 눈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거룩한 사람은 어떤 풍랑을 만나도 반드시 결과가 순탄하다. 이사야가 말했듯이 모든 영광 위에 덮개가 있기 때문이다.(사4:5) 하나님은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신다.(시97:11) 그런 사람은 환란을 만나도 마지막이 복되다.
-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리니” - 선한 왕 요시야에게 주시는 상과 큰 은총이 약속되어 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로, 율법에 순종한다는 조건으로 주시는 약속이 있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 둘째로, 자신의 죄를 보고 겸손해지면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즉 예수그리스도를 확실히 믿으면 살리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가장 포괄적인 약속이며 영생과 죄 사함의 약속이다.
셋째로, 은혜 안에 있을 때 주시는 격려의 약속들이 있다. 아들을 상속자로 삼으려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많은 격려의 약속들을 주듯이 하나님도 은혜의 언약 안에 있는 자녀들을 그렇게 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의 상속자인 요시야에게 격려의 약속을 주셨고, 은총을 베푸셨다. 이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일반적인 교훈이다.
원리 1. 자녀를 은혜로 대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분은 자녀의 선행을 일일이 보시고 이생에서도 상을 주신다.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신음 소리는 없고 하나님이 병에 담지 않으시는 눈물 방울도 없다. 그분은 냉수 한 그릇에도 반드시 상을 주신다. 그 이유는, 그분은 우리의 선행을 자신의 영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선행은 그분 자신이 우리 안에서 이루신 작품이다. 또한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하늘의 복을 끌어 내리기 때문이다.
적용) 우리는 여기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천국만 상으로 주실 뿐 아니라 이생에서도 모든 선행에 보상해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위선자들의 어떤 선행에도 반드시 생전에 갚으신다. 그들이 바란 것은 천국이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이므로 그것을 얻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5)
양심이 떳떳한 사람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히스기야처럼 기도할 수 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사38:3) 베드로처럼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21:15)라고 고백할 수 있다. 양심의 거리낌 없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특권이다. 설령 그 외에 다른 상이 없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의 모든 선행은 기도처럼 복을 간구하는 힘이 있다.
- “그러므로 내가 네게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 이제 요시야가 받은 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살펴보자. “그러므로”는 약속을 제시하기 전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단어이다. 낙담한 영혼을 조금이라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다.
원리 2. 성령은 평범한 일로도 영혼을 세워주셔서, 평범한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하신다. 그분은 “네가 죽어서”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조상들에게 돌아가서”라고 말씀하신다. 성령은 죽음을 “돌아가다”라는 말로 유화하신다.
원리 3. 죽음이란 돌아가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낯선 땅을 지나는 순례자들처럼 우리는 이 척박한 곳에서 고생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반드시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요시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는 세상 사람들을 떠나 더 좋은 사람들에게 갈 것이고, 땅의 왕국을 떠나 더 좋은 왕국으로 갈 것이다.”
원리 4.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좋은 쪽으로 변화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두심은 그만큼 우리를 귀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사신 존재다. 그래서 악한 날이 이르기 전에 우리를 거두신다. 우리 모두는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바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흩어졌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모아져야 한다. 모든 수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분은 모든 선한 연합의 머리이시다. 우리를 모으시는 것이 그분의 사역 목적이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이생에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교제로 돌아온다.(살전4:17) 은혜 가운데 자랄수록 그리스도와 교제가 더욱 친밀해지고, 죽음을 통해 영광 중에 그리스도께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 그 뒤에 더 높은 차원의 모으심이 이루어진다. 심판 날에 모든 성도가 대회를 이루고, 우리의 육과 영이 다시 연합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에서 무슨 일을 당해도 우리는 반드시 돌아간다. 죽음은 돌아가는 일일 뿐이다.
적용) 이것은 친구들을 사별할 때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그들은 구원을 잃은 게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 불려 갔을 뿐이다. 그들은 평안히 조상들에게 돌아가 안식하고 있다. 우리는 죄 많은 세상과 눈물의 자리를 떠나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인가? 그러니 무디어지고 나른해진 우리 영혼은 깨어나야 한다. 물론 악인들도 돌아가지만 그것은 재앙의 수확이다. 그들은 자기가 이 세상에 살 때 좋아했고 함께 지냈던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들은 모두 가라지이므로 함께 단으로 묶여 영원히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다.
- “내가 네게---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 요시야가 받은 상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평안한 죽음이다.
원리 5. 장례는 아름답고 명예로운 일이다.
죽은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의 전이자 그리스도의 지체이므로 장례에 예를 다해야 한다. 또한 이는 장례가 고인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애정의 표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표현하는 의미로도 장례를 귀히 여겨야 한다. 지금은 흙 속에 묻히지만 나중에 몸이 부활할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장례는 명예로운 일이다.
질문) 그런 장례가 치러지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대답) 비록 장례는 치러지지 못해도 하나님의 자녀로 죽는 것이 악인으로서 세상 최고의 명예로운 장의를 누리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4:13) 그러므로 장례가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것을 받지 못해도 우리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있으면 모든 복을 받은 것이다. 요컨대 사후에 우리 몸이 어떻게 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바다와 땅이 죽은 자들을 다 내줄 것이다.(계20:13) 우리 몸은 본래 그분이 주신 것이다. 그분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하자.
반문) 요시야는 전쟁 중에 적들의 활에 맞아 죽었다. 이것이 평안한 죽음인가?
대답)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적들의 손에 피를 흘리며 죽었지만, 그것은 평안한 죽음이었다. 죽음으로써 죽음보다 더 처참한 것을 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생에 묶어 두어 죽음 자체보다 더 비참한 꼴을 당하게 하실 수도 있다.
원리 6. 살아서 당할 재앙보다 죽음이 덜 비참할 수 있다.
이생이 워낙 비참하고 죽음이 삶보다 훨씬 나아 죽음을 택하고 싶을 수 있다. 요시야는 이 한 번의 죽음으로 얼마나 많은 죽음을 면했는가! 그가 죽은 후에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는 망했고, 그의 아들들은 포로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거나 눈알이 뽑혔고, 하나님의 성전은 허물어지고 우상이 들어섰다.
악인들은 그저 죽고 싶지 않아 삶을 바라지만, 지옥에서는 차라리 죽음을 바랄 것이다.
원리 7.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들어가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다윗은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31:15)라고 했다. 그분은 삶과 죽음의 주인이시다.
적용) 세상을 사는 동안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우리의 때는 원수의 손 안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우리의 죽음은 조상들에게 돌아가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께 순종하다가 믿음과 소망 중에 죽어야 한다.
또 인간은 자신의 행복이 다한 뒤로도 더 살 수 있으나 결국 그 삶 자체가 오히려 심판이 될 수 있다. 죽음보다 더 비참한 꼴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요시야를 데려가신 것은 행복을 다한 뒤로도 더 살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분은 우리가 비참할 때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아시며, 짐을 주시면 반드시 감당할 힘도 함께 주신다.
많은 경우 하나님은 너무 슬픈 일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신다.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 서로를 대할 때, 상대를 정도 이상으로 슬프게 하거나 또는 상대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알려서는 안 된다. 특히 자식들이나 젊은 사람들은 윗사람을 슬프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윗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죽음보다 더 비참한 일이다. 이것은 “살인하지 말라”고 한 제 6계명에 어긋난다. 요시야도 자식들이 망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것이 죽음보다 더 비참했을 것이다.
-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
원리 8. 눈으로 보는 재앙이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귀로 들을 때보다 눈으로 볼 때가 가장 깊게 영혼에 새겨지는 법이다. 하나님은 요시야가 재앙을 눈으로 보면 그 마음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아셨다. 시각이 가장 확실한 감각이며 영혼에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긴다.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큰 기쁨과 행복이란 하나님을 영원히 직접 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듯 시각은 우리를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한다.
적용) 장차 자신의 악한 눈으로 지옥에 보내진 자신을 보게 될 사람들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들은 자신이 즐기던 육체적 안락과 함께 지옥에 갈 것이다. 많은 무신론자들의 소원은 오직 목숨을 지키는 것이지만, 때가 되면 천 번의 죽음보다도 더 비참한 상태를 눈으로 보고 몸과 양심으로 느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죽음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장수를 이해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장수는 은총이며 마땅히 사모할 대상이나, 장수를 구하는 기도에는 하나님이 장수를 좋게 보시는 경우에 한해서라는 조건이 붙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이 장수를 주셔서 세상의 재앙을 보고 느끼게 하실 수 있다.
원리 9. 주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비참한 재앙을 일절 보지 않는다.
경건한 사람들은 사후에 어떤 재앙도 보지 않는다. “의인들은 장차 임할 악을 떠나 불리어 가도다”(사57:1)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의 성인들에게 하는 기도는 말씀에도 어긋나며, 그 기도는 무효하다. 의인들은 천국에 가기 때문에 후손들의 결핍과 비참한 상태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기도와 복된 향과 제사를 드려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원리 10. 요시야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를 배울 수 있다.
섭리의 신비는 선택이나 예정 같은 굵직한 주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세상사의 질서 속에도 들어 있다. 요시야는 전쟁 중에 적들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성경은 그가 평안히 죽었다고 말한다. 그의 죽음은 자비이자 또한 징계였다. 징계인 이유는 그가 너무 서둘러 바로와 전쟁을 벌이는 과오를 범했기 때문이다. 묘하게도 천국의 지혜는 시련과 은총, 징계와 자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우리에게도 자비와 고난이 동시에 임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의 죽음을 통해 요시야의 어리석음을 징계하심과 동시에 그의 겸손에 상을 주셨다.
아울러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방식에서도 신비를 볼 수 있다. 그분이 요시야가 평안하게 죽으리라고 약속하셨다면, 당연히 화려하고 위엄 있는 죽음이 예상될 만도 하다. 하지만 그의 평안한 죽음은 적들을 통해 찾아왔다. 이렇듯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때로는 고난과 박해 같은 정반대 방식들을 통해 천국으로 데려가신다.
그리고 그를 서른 아홉밖에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데려가셨다는 사실은 또한 신비다. 그는 얼마든지 많은 선정을 베풀 수 있었다. 선뜻 하나님의 신비하신 섭리로 믿어지기 어렵다. 그분의 때는 우리의 때보다 낫다. 그를 죽게 한 것은 바로가 아니라 민족의 죄였다.
적용) 그분은 자신의 행위를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으신다. 왜 어떤 사람은 살려 두시고 어떤 사람은 데려가시는가? 왜 악인은 살려두시고 의인은 데려가시는가? 우리는 모른다. 신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에 맞추어서 자신의 알곡을 거두신다.
원리 11.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 심판과 재앙을 막아내며, 반대로 그들의 죽음은 심판의 전조다.
하나님은 요시야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땅에 심판을 내리지 않으시다가 그가 죽은 후에야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유) ① 은혜로운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장소를 선하게 만든다.
② 또한 은혜로운 사람들이 화를 막아냄은 기도로 하나님을 제지하기 때문이다. 소돔의 롯에게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창19:22)라고 말했다. 집이 무너지기 전에 보석을 꺼낸 사람은 집이 불에 타도 개의치 않는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자 세상에 화가 임하였다. 루터는 자기 평생에 독일 민족에게 전쟁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가 죽자 전란에 휩싸였다. 또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에 하나님은 예루살렘 근처의 펠라라는 작은 도시에 그리스도인들을 모으신 후에 로마가 와서 예루살렘을 페허로 만들었다. 때로는 은혜로운 부모인 경우, 그들의 사후에 악한 자녀들에게 비참한 종말이 임한다.
적용) ①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사람들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들 덕분에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두시는 것이다. 그들이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복이 따라다닌다. 라반의 집이 야곱 덕분에 복을 받았고, 보디발의 집이 요셉 덕분에 복을 받았다.
② 우리는 또한 선한 사람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우리를 떠받치는 기둥들이다. 심판이 지연되어 세상이 지속되고 있음은 경건한 사람들 덕분이다.
③ 그래서 우리는 선한 사람들의 죽음을 애통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다.(왕하2:12) 그래서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죽음을 애통했다.
-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에 경고하신 심판이 “재앙”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다. 재앙에는 죄의 재앙이 있고, 심판의 재앙이 있다. 첫째, 죄의 재앙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그것을 가증하게 여기신다.
둘째, 심판의 재앙에는 두 가지로 ① 기근이나 역병 등과 같이 하나님에게서 직접 오는 재앙이 있다. 이런 벌을 받을 때는 하나님께만 엎드리면 된다. 사후에 영혼을 덮치는 재앙을 심판의 재앙이라 한다.
② 하나님에게서 오되, 사람을 통해서 오는 재앙이 있다. 인간을 도구로 쓰셔서 전쟁이나 잔인한 학대 등으로 우리를 벌하시는 것이다. 인간을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징벌이야말로 우리가 이생에서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재앙이다. 이 재앙은 하나님의 분노 외에도 인간의 독한 악의까지 상대해야 한다.
원리 12. 우리가 당하는 재앙은 죄의 재앙에서 비롯된다.
죄 때문에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것이다. 모든 재앙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죄이다.
질문)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악한 재앙을 내리실 수 있는가?
대답) 징벌의 재앙이 곧 선한 정의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모든 재앙은 선하다. 그분의 징벌은 받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유익하다. 징벌을 통해 그들을 돌이킬 수도 있고, 혹 돌이키지 않더라도 그들을 정의롭게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모든 징벌에는 하나님이 관여되어 있다.
적용) 출발점을 바로 알아야 한다. 고통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부차적인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분과 화해해야 한다. 그러면 그분이 모든 부차적인 원인들을 초월하여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간수나 형 집행자에게 가지 말고 재판장에게 가라.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고자 쓰는 도구 때문에 안달하지 말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16:11)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욥1:21)
우리는 모든 환란 중에 인내하며,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복종해야 한다.
반문) 하나님이 자신의 교회와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신단 말인가?
대답) 하나님께 따지지 말고 그분의 손에서 저울을 빼앗지 말라. 하나님을 저울의 대변인으로 부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보다 더 악한 사람들을 통해 자기 백성을 징계하신다. 천사들이나 선한 사람들이 하기에는 그것이 너무 천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이라며 자랑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조치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뜻이 최고의 의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하신다. 따지지 말라!
원리 13) 하나님은 선인에게는 충실한 종들을 주셔서 그를 충실히 대하게 하신다. “이에 사신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하지만 악인에게는 비위를 맞출 종들을 주셔서 그를 멸망에 빠뜨리게 하신다. 아합처럼 진리를 들을 마음이 없는 악인에게는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이 와서 그를 파멸의 길로 이끌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시야에게 충실한 여선지자를 주셨고, 충실한 사신들을 주셔서 진실한 답변을 전하게 하셨다.
원리 14) 왕의 본분은 국가와 교회를 돌보는 것이다. 요시야 왕은 메시지를 전해 듣자마자 그는 은혜로운 왕다운 행동을 취했다. 행여 반응이 식어질세라 자신의 마음이 동했을 때 곧바로 시행에 옮겼다. 선한 행동이었다. 선한 목적과 교회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인다면, 회의 소집을 통해 많은 선을 이룰 수 있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여호와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함께 한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