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2', 16장 이신 칭의

강대식 2019. 7. 27. 07:48

16 장 이신 칭의

 

1. 칭의 교리의 중요성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로 어떤 질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알기 위해 적용할 수 있는 시금석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것은 칭의라는 말에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위대한 마르틴 루터의 삶을 변혁시킨 것은 바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의 재발견이었다. 이로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개신교 역사의 영광스러운 사건들은 모두 다 이 교리로부터 나왔다. 개신교라는 말을 들을 때, 특히 이 단어와 연관된 역사를 깨닫는다면 반드시 전율을 느껴야 한다.

 

2. 역사적 배경

 

루터는 회심 전에 왜 고민했는가? 문제는 그가 칭의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신칭의에 대해 전형적인 로마가톨릭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로마가톨릭은 그 교리를 가르칠 것을 주장하지만 절대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롭다 하심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을 개신교의 이단적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로마가톨릭의 오류의 핵심은 로마 교회가 칭의와 성화를 혼동한다는 것이다. 칭의가 죄사함의 의미를 포함한다는 것인데 이 말은 옳다. 그들은 이어서 칭의시에 우리에게 은혜가 능동적으로 주입되며 그 일은 물론 세례에 의해 일어난다고 말한다. 죄사함, 즉 죄가 제거된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그들은 세례시에 적극적인 의가 주입되고, 적극적인 의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역시 주입된다고 말한다. 또한 그들은 칭의가 점진적이라고 말한다. 소위 대죄를 저지르면 칭의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칭의를 잃어버렸을 때는 고해성사를 통해 다시 얻을 수 있으며, 그렇게 회복되는 과정은 연옥에서 완성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루터가 회심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견해이기도 했다. 그는 어느날 성경의 한 구절을 보게 되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1:17). 이 말씀은 그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의 전 생애가 변혁되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칭의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개념이 대단히 비성경적이고 전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알게 된 순간 영혼의 커다란 해방을 경험했다. 그는 이 진리를 선포하기 시작했으며, 그럼으로써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위대하고 엄청난 일을 시작했다.

 

루터가 깨달은 것은 칭의는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과 공로에 근거해 의롭게 여기신다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법적인 행위라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고 우리의 것으로 돌리시며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에 의지한다. 그 결과로 바로 그 순간 자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로마 카톨릭의 방식으로 자신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 애썼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말씀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선포하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기에 그는 의롭다.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그의 것으로 삼아주시기 때문이다.

 

3. 칭의란 무엇인가

 

1) 법정적 선언인 칭의

칭의에 대해 우리가 흔히 범하는 큰 실수는, 마치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칭의가 우리가 의롭게 되거나 선하게 되거나 바르게 되거나 거룩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칭의에서 우리는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르다. 칭의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성화와 혼동하는 것이다. 칭의는 법적인 혹은 법정적인 것이다. 칭의는 선언적 행동이다. 칭의는 우리에게 뭔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해 뭔가 말하는 것이다. 칭의는 나의 실제 지위나 내면의 상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의 나의 위치와 나의 지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와 관계 있는 것이다.

 

2) 칭의가 법정적 선언이라는 성경적 증거

먼저 구약에서, 23:7,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25:1,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이 재판관들은 두 당사자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선언을 한다. 이것은 법적인 행동이다. 17:15,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칭의는 정죄와 대비 되어 있다. 여기서도 칭의는 법적인 문제이다.

 

신약에서,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7:29). 이는 하나님에 대해 선언한 것이다. 성경이 칭의에 대해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부분에서는 언제나 이런 의미를 전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고전적인 본문인 롬 3:20-28,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이어서 28절에 엄청난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5: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8:30-34,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언제나 칭의는 법적이고 법정적이며, 성경을 계속 살펴보면 다른 곳들에서도 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고전6:11, 2:16,

 

3) 칭의의 두 가지 요소

하나님은 율법을 제정하신 분이시며, 그리스도가 그 율법을 만족시키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0;4). 하나님은 이 선언을 하시며 그것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의 의미이다.

 

첫 번째 소극적 요소.

하나님이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하신다는 것. 율법은 우리 모두를 정죄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10). 나는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 나의 죄책이 어떻게든 해결되어야 한다. 칭의 의의 첫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나의 죄가 가리워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용서받았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나의 죄는 소멸되었다.

 

두 번째 적극적 요소

이는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적극적인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되었다는 것, 혹은 우리에 계정에 넣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지키셨고 존중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모든 요구에 대하여는 의로우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그리스도의 의를 나의 것으로 삼아 주신다.

 

칭의에 대하여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이다.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의를 나에게 돌리시며, 나의 것으로 삼으시며, 전가시키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의라는 흠없는 옷을 입는다.

 

4) 칭의와 성화의 차이

첫째로, 칭의는 성부 하나님의 행동이다. 성화는 본질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다. 의 롭고 합당하다고 선언하시는 분은 성부이시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둘째로, 칭의는 우리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마치 법정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같다. 반면에 성화는 우리 안, 즉 우리의 내적 삶에서 일어난다.

셋째로, 칭의는 죄책을 제거한다. 성화는 죄의 오염을 제거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한다.

칭의는 영단번에 이루어지는 행동이다. 칭의는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칭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영단번에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성화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우리는 수건을 벗고 완전하게 될 때까지 주님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계속 자라간다. 칭의가 법정적이고 외부적이며 선언적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지에 관계 없이 당신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5) 칭의와 믿음의 관계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믿음과 칭의의 관계는 중요하다. 이 말을 우리가 믿은 것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전적으로 이단적이며 철저히 부정되어야 한다. 만일 내가 나의 믿음 때문에, 혹은 내가 믿음을 발휘하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나의 구원은 분명히 행위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은 내가 믿음이라는 행위를 한 것 때문에 나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 된다. 하지만 성경은 나의 믿음 때문에 혹은 내가 믿음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내가 믿음으로(by faith)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믿음은 단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의를 받아들이는 도구일 뿐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믿음이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칭의의 근거는 우리에게 전가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이다. 나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의 의이다. 나를 구원해 주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믿음이 아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내 믿음을 구원의 근거로 간주하는 것의 미묘한 위험성을 이해하겠는가?

 

그러면 믿음은 어떤 일을 담당하는 것인가?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오는 통로이자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믿음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신다. 이렇게 믿음을 발휘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가하시는 의를 받는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우리가 믿음의 선물을 받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의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라 하고 야고보가 행함으로한 것은 모두 칭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두 사람은 믿음의 특성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바울과 야고보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두 가지 특정한 유형의 오류들을 바로잡고 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중대한 사실은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내게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게 믿음의 선물을 통해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이나 나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나의 의는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고전1:30)이 되게 하셨다. 내 믿음은 내가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하도록 만든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완벽하고 점 없고 흠 없는 의의 옷을 내 것으로 해 주셨다. 그것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성경적이고 개신교적인 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