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2', 18장 성화: 여러 견해들
제 18 장 성화: 여러 견해들
지금까지 우리가 밟아온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갖게 된다 거듭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의롭다고 선포되어진다. 가족으로 입양된다. 하지만 죄의 문제는 어떻게 된 것일까? 우리는 갑자기 완전해진 것이 아니다. 신자의 삶에는 여전히 죄의 문제가 남아 있고, 성화의 교리는 하나님이 이 문제에 대해 무엇을 하시는가를 다룬다.
1.성화에 대한 논쟁
1) 논쟁의 역사
이 교리는 커다란 논란의 대상이다. 성화에 대해 수없이 많은 관점과 이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화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보다는 성화가 정확히 어떻게 일어나느냐에 대해 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상당한 논쟁이 특히 지난 이백 년 간 계속되어 왔는데, 그 일차적 원인은 다름 아닌 위대한 존 웨슬리가 제공했다. 존 웨슬리는 성화와 거룩함에 대해 하나의 이론을 주창했는데, 그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중대한 것으로 생각했다. 커다란 토론이 일어났고, 유감스럽지만 똑같이 선하고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신랄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문제에 대한 신학과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존 웨슬리와 그의 보좌관이자 조력자인 매들리의 존 플레처, 그리고 이에 대항한 조지 휫필드, 아우구스투스 토플레디 및 다른 사람들 사이에 벌어졌던 커다란 논쟁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이 논쟁은 역사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고찰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중요하다.
2) 이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자세
어느 날 오후, 휫필드의 대단히 강력하고 공격적인 지지자들이 그를 찾아가 물었다. “휫필드 씨, 우리가 천국에서 웨슬리 씨를 보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에 대해 휫필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매우 높고 고귀한 위치에 있어서 여러분과 저는 그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우리의 구원이 성화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따라 결정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성화에 대해 무엇을 믿든 아무 상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경을 연구해서 어떤 교리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이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신자들의 의무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런 일은 아무 상관 없다고, 그런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그런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상 진리가 무엇이든 상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당신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사이비종교에 문을 활짝 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신은 매우 그럴듯한 가르침이 갑자기 제시되었을 때, 그것을 평가할 기준이 없음으로 인해 그 가르침을 믿어 버리게 될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대중에게 인기 있는 여러 이단과 사이비종교가 번성하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배우려는 수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믿는 교리들을 모른다면 정말 부끄러운 노릇이다.
2. 성화의 의미
구약에 사용된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밝은 빛처럼 ‘빛나다’라는 의미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자르다’, ‘분리하다’라는 의미라고 말한다. 성화의 문제에는 그 두 가지 측면이 모두 포함된다. 잘라 냄이 있다. 분리가 있다. 하지만 참된 성화는 모세가 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함께 있은 후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것과 같은 종류의 빛남을 포함한다. 거룩함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과 같은 일종의 밝음이 있다. 신약에 이르러서는 여러 단어들이 주로 분리의 개념을 의미한다.
1) 첫 번째 의미- 구분되어 하나님께 드려짐
성화는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따로 떼어 놓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구약 둘 다에서 성화의 중대한 의미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산은 “거룩한 산”, 혹은 거룩하게 된 산이라고 불린다. 그 산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따로 떼어졌기 때문에 거룩한 산이 되었다. 성전 건물을 거룩하다 말했으며, 그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다. 성전의 기구와 모든 기물 역시 구별되어 거룩하게 된 것으로 묘사된다(출28:29등).
구별된다는 것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불경하거나 부정하거나 불결한 모든 것에게서 분리된다는 것이다. 일단 거룩하게 되면 그것들은 일상적 용도에서 구별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적극적인 의미에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뜻대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이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 사용된 것을 보면 대단히 흥미롭다.
요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요 17: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와 같이 무언가로부터 구분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이중적 의미를 가진 이 용어가 무생물과 심지어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까지 사용된다.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이 같은 의미로 신자들에게도 매우 자주 사용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행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구분한다는 의미이다. 고전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성화가 칭의 전에 나오고 있다. 그것은 그린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즉 죄악된 고린도 사회에서 나와 하나님께로 구별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씻음 받고 거룩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 구별되었다.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것은 구별되었다는 의미이다. 이 구절의 문맥으로 보아 다른 의미일 수는 없다. 14절도,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거룩하게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구별되었다는 말 외에 다른 의미일 수 없다. 벧전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여기서도 역시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세상으로부터 나와 구별되어져서, 하나님께 맡겨진다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벧전 2:9, “너희는 ---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여기서 베드로는 출 19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사용된 것과 똑같은 용어를 교회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한다. 이스라엘 자녀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거룩케 된 나라였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그들을 구별하셨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미 거룩하게 되었다.
2) 두 번째 의미- 거룩하게 되는 내적인 변화
성화는 구별되었다는 것뿐 아니라, 그로 인해 우리를 새로운 지위에 합당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무언가가 우리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성화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서 우리를 점점 더 주 예수 그리스도와 닮아 가게 하고,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도록 우리를 주의 형상으로 바꿔 나가는 정화와 씻음의 역사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성화에 대해 말할 때 일반적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이같은 내적 씻음, 내적 정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성화의 또 다른 훌륭한 정의
성화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죄인을 죄의 오염으로부터 건져 내고 그의 본성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새롭게 하며 그가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혜롭고 계속적인 작용”이다.
칭의와 성화의 차이점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적용시키시며, 그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신다. 이것이 전가된(imputed) 의이다. 하지만 성화에서 우리는 분여된(imparted) 의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나의 것으로 간주된 의가 아니라 내 안에서 창조되고 내 안에서 만들어진 의이다. 이것은 중대한 구분이다. 교부들은 전가된 의와 분여된 의의 차이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곤 했다. 17세기, 18세기, 심지어 19세기에도 이 용어는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이런 용어들에 대해 우리가 그들처럼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선조들에 비해 얼마나 퇴보했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이다.
성화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견지에서 규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화는 사실상 우리가 중생하고 칭의된 이후 하나님이 죄의 문제를 다루시는 방식이다. 우리는 언제나 성화를 우리의 도덕적 상태 및 상황이라는 견지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도덕적 상태 및 상화의 견지에서 규정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성화라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위라는 개념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성과 순결함 자체가 성화는 아니다. 성화에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이 말하는 최고로 도덕적인 사람과 성화된 그리스도인 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3. 성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견해들
우리를 죄의 오염으로부터 정화시켜 순결하게 되도록 하고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도록 하는 이 과정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1) 완전주의자의 견해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일종의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견해로서 몇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죄가 완전히 근절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
성화란 주어진 매 순간에 가능한 한 최고의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원에서 잡초 전체를 뿌리채 뽑아내 버리는 것과 같다. 일 년 후 혹은 십 년 후에는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완전함이란 이 순간에 가능한 최대한의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완전함에 대해 가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다. 찰스 피니가 이에 속한다.
존 웨슬리의 완전주의는 그와 전혀 다르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순간에도 어떠한 알려진 죄도 고의로 짓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웨슬리는 완전함이 순간순간의 상태라고 말한다. 다음 순간에는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알려진 죄에만 적용된다. 모르고 죄를 짓고 있다면, 그 죄는 시간이 지난 후에 드러날 것이며, 알게 된 순간 그 죄 역시버려야 한다. 그러면 그 죄에 대해서도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화는 모종의 완전함을 의미하지만 절대적인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화를 깨끗한 마음, 죄에서 완전히 깨끗하게 된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
그들 역시 알려진 죄와 고의적인 죄만을 다룬다.
웨슬리는 “완전한 사랑”을 말한다. 그들이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이 이생에서 그리고 실제적인 면에서 정말로 완전하지는 않다 해도, 그들은 사랑 안에서 완전하다고 했다. 그들은 온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 이것이 완전한 사랑이라고 웨슬리는 말했다. 그는 완전함과 성화의 순간순간의 측면을 강조하는 데 대단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성화를 한순간에 받아야 하고 받을 수 있는 무언가로 본다는 점이 모든 완전주의자의 견해의 특징이다. 성화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그것을 바라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믿음을 발휘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당신은 칭의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성화도 받아야 한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하나의 경험이며, 순간적으로 완벽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2) 반작용의 원리에 의한 성화
이것은 1870년대에 유명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인기 있는 견해이다. 이들은 죄가 근절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들의 근거를 이루는 중요한 본문은 롬 8:2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들은 말한다. “그렇다. 죄는 신자 안에 남아 있다. 하지만 그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의지하면, 그리스도는 그가 죄를 짓지 않도록 지켜 줄 것이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이러한 죄의 권세가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은 그것을 역전시키고도 남는다.” 바로 여기서 반작용이라는 개념이 개입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예화가 부지깽이와 구명대의 예화이다.
완전주의자의 견해들과 마찬가지로, 이 가르침 역시 통상적으로 성화는 하나의 체험으로 시작되며 그 후 과정으로서 계속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성화는 받아야만 하는, 그리고 한순간에 받을 수 있는 것이며, 그후 당신이 할 일은 그 경험 안에 거하는 것뿐이다.
3) 거듭난 순간 시작되어 영화롭게 될 때 완성되는 성화
성화는 우리가 중생하는 바로 그 순간 시작해서 우리 삶 전체 동안 점진적으로 계속되며, 죽음 이후에야 완전해질 과정이라고 말한다. 커다란 차이점은 여기서는 성화를 칭의 이후에 받을 수 있는 체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우리가 거듭난 순간 성화가 시작되며, 이 성화는 계속 진행되어 우리 몸이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되고 부패로부터 건짐 받을 때에 이르러서야 완전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몸이 최종적으로 구속될 때에야 우리의 성화는 완전하게 될 것이다.
저는 존 웨슬리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심지어 그의 거룩함에 대한 가르침에도 빚을 지고 있다. 제가 그의 가르침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며, 명백히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들도 있다. 하지만 저는 완전주의자들에 속한 사람들의 성화와 거룩에 대한 작품들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주된 강조점을 믿지 않고 거부하긴 하지만 그 작품들을 읽으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제 안의 성화의 과정이 격려 받고 더 촉진된다는 것을 기쁨으로 증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