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빌립보서 강해', 4장 사랑과 지식과 총명 (김영희)
4 장 사랑과 지식과 총명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9-11)
- 본문에는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사도의 특별한 기도가 나온다. 그의 기도는 형식적으로 덧붙이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야말로 바울이 남긴 기록 중에 가장 중요한 기록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바울의 기도는 항상 지적이고 사려 깊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매번 자신이 기도하는 대상의 형편에 따라 내용을 배열한다. 자신이 기도하는 대상에 대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는 것이다. 그의 기도에는 목회자와 선생으로서의 지혜와 건전함과 재능이 반영되어있다. 그의 기도는 그의 논증이나 변론 못지않게 신학적이다. 가르침과 신학과 교리로 가득 차 있다.
이 기도를 얼핏 보면 놀랄 수도 있다. 빌립보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내용과 6절의 내용이 상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6절에서 이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완성될 것이 확실하다면, 왜 이런 권면의 기도를 하는 것인가? 그뿐 아니라 기도 자체 내에도 명백하게 모순되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라고 말해 놓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바란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의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 열매가 맺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12-13에서 사도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한다.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심으로써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 내신다는 사실만 알면 문제는 해결된다. 하나님은 무엇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신 후에, 그 일을 하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 일을 일부나마 우리의 노력과 행동으로 지속시키도록 명하시고 지시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겉보기에는 모순되지만 실상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 구원은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다 – 일단 구원하신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책임을 가진 새사람으로서 스스로 무언가를 할 것을 요구하신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관계는 유달리 편안했고, 빌립보 교회의 삶도 편안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이 우리 주와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은혜에서 더 진보하고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바울의 간구를 살펴보면 그는 자신이 누리는 축복을 빌립보 교인들도 누리기를 바랐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행복했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 그 안에서 그와 더불어 “자족”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고 말한다. 기독교 복음은 만사가 잘 될 테니 용기를 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난관을 극복해 나갈 힘을 제공해 준다. 사도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기본 진리를 이미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에 더하여 확인해야 할 점이 있다는 것이다.
- 우리가 던져야 할 명백한 질문은 첫째,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 ‘무엇을’, ‘왜’
기도 하는가?
첫째, ‘무엇을’ -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풍성해지기를 구한다. 바울은 단순히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기만을 구하지 않는다. 그는 그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흘러넘치기를 구한다. 그들의 지식만 느는 것이 아니라 – 여기에 그의 균형 감각이 나타나는데 – 사랑이 지식으로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구한다.
사도는 신앙이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신앙은 기본 명제이다. 그래서 단순히 지식이 늘기만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 교육’이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교육에는 신앙의 자리가 없다. 평범한 교과서를 가르치듯이 성경을 가르칠 수는 없다. 그것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우습게 만드는 것이다. 성경은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한 책이다.
바울은 참으로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도 없다고, 지식을 전하기 전에 생명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을 경계하며, 지식으로 통제되고 제어되지 않는 사랑을 경계한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자라나고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구한다. 이 두 가지는 항상 같이 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계속 부닥치는 유혹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순전히 자신의 체험과 감정에 의존해서 사는 것이다. 이들은 가르침이나 교리나 신조를 싫어하며, 모임을 인도할 때도 순전히 감정에 의존하여 서로의 체험을 나누고 간증한다. 그리고 그런 것을 마음이 따뜻하게 하나로 모아졌다고 말하며, 사랑의 분위기라고 말한다.
정 반대의 위험은 순전히 이론적이고 추상적이고 학문적으로만 교리에 관심을 보일 위험, 무미건조한 신학적 입씨름에만 관심을 보일 위험이다. 이런 사람들은 오로지 어구에 관심을 쏟으면서 복음을 하나의 철학 내지는 다수의 철학으로 변질시켜 버린다. 성경과 기독교 진리에 순전히 지적인 관심만 보이는 것이다. 머리로만 모든 것을 생각할 뿐, 마음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유혹을 피하려면 우리의 사랑은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자라나고 풍성해져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지식”이란 가장 온전한 의미의 영적 지식을 가리킨다. 이 지식보다 온전한 지식은 없다. 사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기독교 진리 및 계시의 전체 내용과 본질에 대한 지식이 늘기를 구하고 있다. 베드로도 진리에서 벗어나 삶에 짓눌린 자들을 가리켜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지식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기 일쑤이다. 사람에게 짓눌리고 세상의 현 상황에 짓눌린다. 그는 고전2:12에서도 이점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란 구원의 전 계획과 방법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간절한 소원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크고 영원한 율법을 아는 것이며, 자신들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지 아는 것이다. 십자가 죽음의 본질과 부활의 능력을 이해하는 것이며, 성령이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하시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정하신 계획을 확실히 이루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온전히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 큰 구원을 확신하면 할수록 사랑은 더 풍성해진다. 그뿐 아니라 이 사랑을 알면 알수록 삶에서 부닥치는 모순과 실망과 문제들을 직면할 힘이 생겨난다.
“하나님은 내 머리털까지 세고 계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하나님은 친히 시작하신 과정을 반드시 마치실 것이며 결국 나를 완성시키실 것이다”라는 것을 믿으면, 이 모든 것을 믿으면, 주변 상황이 새롭게 보이면서 나에게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이 전부 하나님께서 나를 끌로 다듬어 나가시는 과정임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깊이 알수록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커지고, 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과정을 함께하는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도 커진다.
“총명”은 ‘분별력’ 또는 ‘판단력’이다. 사도는 지식과 분별력, 지식과 판단력을 구분한다. 지식이 많다고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는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이 단어를 선택한다. 그는 “너희가 진리를 알기 바란다. 그러나 어떤 처지, 어떤 환경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없다면, 그 지식은 다 쓸데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아는 것과 쓰는 것은 다르다.
초대교회에는 바로 이 능력이 필요했다. 거짓 교사와 거짓 교훈이 거의 동시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기원후 200-300년 사이에 거의 대부분의 이단이 나타났다. 분별의 영, 판단의 영보다 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없다. 지식은 가르칠 수 있고, 정보는 전수할 수 있지만 지혜는 줄 수가 없다. 사도는 성령께서 지혜를 주실 수 있음을 알았기에 기도했다.
이 능력은 어느 때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필요하다. 요즘처럼 하나님의 교회에 진리를 분별하는 영이 필요한 시대가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이다. 분별력도 없고 판단력도 없어서 실생활에서는 물론이요 교리의 영역에서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가려내지를 못한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행복을 원했기에 이 두 가지를 구한 것이다.
둘째, “왜” - 바울이 이것을 구하는 이유는 이러한 지식과 총명과 분별력이 있어야 “지극히 선한 것”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 좋은 번역은 ‘긴요한 것’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바울은 지식과 총명이 있어야만 긴요한 것을 알아보는 감각이 예민해진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들의 지식과 총명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구했다. 긴요한 것을 망각한 채 이차적인 것, 삼차적인 것에 골몰하다 힘과 시간을 낭비하기가 쉽다.
바울은 말한다. “너희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삶의 어려움과 방해물의 모순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긴요한 것에 집중하는 능력이다. 정말 중요한 한 가지를 붙잡고 나머지는 버릴 줄 아는 힘이다”
그 한 가지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면, 무슨 일이 닥치든, 어떤 사건이 벌어지든 안전하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여러 가지 일에 바빠서 정작 중요한 일은 잊고 산다. 요긴한 것을 알아보고 거기에 집중하는 감각이 우리에게 생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바울의 또 다른 소원은 그들이 순결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날이 오고 있다. 그날이 오면 모든 사람이 그분 앞에 서야 하는데, 너희가 허물없이 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날을 준비해야 한다. 그날이 오기 전에 우리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자라나고 풍성해져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런 삶을 살기를 원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삶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착한 행실과 착한 일을 보아야 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이처럼 의의 열매로 가득한 삶을 사는 길은 우리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기도함으로 풍성해진다.
이것이 바울의 비책이요, 삶의 문제와 난관에 대비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