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2', 19장 성화: 하나님의 일과 우리의 일
19장 성화: 하나님의 일과 우리의 일
성경은 몇 가지 원리를 대단히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는 이 원리들을 가지고 위의 세 가지 견해들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1. 구원의 전 과정의 목적인 성화
1) 성화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신약 성경 뿐 아니라 구약 성경 도처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중요한 원리는 성화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살전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이 구약에서 하신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성화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갈4:4) 목적도 역시 우리의 성화였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은 우리가 완전하게 되는 것이었으며, 성령을 주신 목적도 마찬가지였다. 실로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의 구원에 대해 하신 모든 일의 목적과 목표는 우리의 성화이다. 요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9절,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이 일을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2) 피해야 할 오류들
첫 번째 큰 위험은 이 다양한 교리들을 개별화시켜서 잘못된 방식으로 서로 분리시키는 위험이다. 모든 교리 사이에는 중대한 연결성이 있으며 그 교리들은 모두 하나이다. 칭의와 성화를 구분해야 하지만 분리해서는 안 된다. 칭의와 성화는 같은 과정의 일부, 즉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활동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가 없이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다고, 즉 성화되지 않고도 칭의를 얻을 수 있다거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성화에 이른다고 말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것은 완전히 비성경적이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사도는 여기서 구원의 전체 과정은 하나이며 하나님이 어떤 사람 안에서 이 일을 시작하실 때, 전체 역사가 이미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칭의에서 영화로 바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이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두 번째 위험은 먼저 죄사함만을 구하고 성화는 나중에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죄사함을 구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하심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참으로 죄사함을 구하고 있다면, 그들은 자기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짓게 한 것으로부터, 그들을 이토록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한 것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하지 않을 수 없다. 죄사함이 그 모든 것을 포함한다면 그것은 이미 성화의 시작이다. 우리가 죄의 넘치는 죄성을 보고, 그로부터 분리되기를 갈망한다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즐거워하기를 갈망하게 되는 순간, 그 자체가 성화, 즉 하나님을 향해 구별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위안과 해방을 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성화의 중대성을 강조하지 않는 그릇된 복음 전도는 대단히 위험하다. 죄사함에서 멈추는 복음 전도는 성경적 복음 전도가 아니다. 모든 복음 전파의 핵심은 죄의 본질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화목을 참되게 선포한다면 성화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며 값 주고 사신 바 된 존재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울의 논지이다. 그는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통해 성화를 가르친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6:19-20). 성화를 전파할 때 사도는 성령만이 아니라 동시에 십자가도 전파한다.
3)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성화
성화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서 춢발하고자 하는 지극히 해로운 습관으로부터 생겨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자신의 문제들, 우리의 죄들과 필요들을 생각하며, 성화에 대해 말할 때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둔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오류이다.
사도 베드로는 성화에 대해 설교하면서 정반대의 순서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이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 이것이 이유이다-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3-16).
교회는 특정한 죄로 인해 고민에 빠졌을 때 찾아가야 하는 진료소가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두 성화되고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 데는 한 가지, 오직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나 우리의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 우리는 죄된 삶을 살 권리가 없다.
성화의 과정은 중생하는 순간 시작된다
내가 신성한 성품을 받는 순간, 내가 거듭나는 순간, 나를 죄로부터 분리시키게 될 뭔가가 들어온다. 약 4:5의 바른 번역은 이렇다. “하나님이 너희애게 주셔서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이 너희를 세상과 그 영으로부터 떼어내어 하나님께로 가게 하기 위해 심지어 시기할 정도까지 열망하시는 것을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내가 거듭나서 성령을 받는 순간, 이와 같은 구별의 과정은 이미 시작한 것이며, 성화의 과정이 내 안에서 이미 시작되지 않고는 중생할 수 없다. 육신과 성령의 갈등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모든 부분, 모든 단계에서 나를 세상으로부터 떼어 내어 하나님께로 구별하려는 싸움이다.
2. 성화의 주체 (두 번째 원리)
1) 성화를 이루시는 하나님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믿음을 표현해야 한다. 성화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능동적인 참여를 묘사하는 고전적인 본문은 빌 2장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2-13절). 이 구절에서는 완벽한 균형이 제시된다. 그러므로 성화의 주체에 대해 논할 때, ‘성화의 역사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수행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반드시 성화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말로 출발해야 한다.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이에 대해 대단히 명백한 입장을 취하며, 분명한 표현을 사용하여 표현한다. 성경에서 성화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일로 돌려진다. 살전 5:23은 성화가 성부의 역사라고 가르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히 13:20-21,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성경은 성화가 성자의 역사라고 말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5-26).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똑같은 방식으로 성화는 성령의 역사이기도 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6:11).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2:13). 그러므로 성화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특별히 세 번째 위격, 즉 성령의 사역임이 분명하다.
2) 성화를 이루는 우리의 행동
칭의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언적 행동이다. 하지만 성화에서는 우리의 행동이 요구된다. 성화 교리에서 대단히 중대한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서 혼란에 빠지는데, 특히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셨기 때문에, 이제 새 본성을 발휘하는 것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으며,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적용함으로써 그 일을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성화와 관련된 모든 일을 스스로 한다.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성화는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최초의 행동과 동기와 힘,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반대의 극단이 있다. 그들은 우리는 수동적으로 예수를 바라보고 그의 안에 거하는 것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으며, 그렇게 하면 모든 일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요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잘못 오해한다. 나무의 가지는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지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가지는 나무로부터 올라오는 수액을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것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수액이 공급되면 가지는 활력과 생명으로 가득 찬다. 가지는 공기로부터 뭔가를 끌어들이고 되돌려 보낸다. 가지의 잎사귀 하나하나는 대단히 활동적이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말한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처음에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지 않았다면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일하신다. 하나님은 나의 소원 안에서 일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원대로 행동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해 주신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나도 소원하고 행해야 한다.
성경의 예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나에게 호소하시는 성화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12절). 당신은 죄가 당신 안에서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절). 우리는 우리 지체를 드려야 한다. 그것이 적극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너희가 ---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절).
우리는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성령이 없이는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것이 수도원 제도의 오류였으며, 모든 도덕 규범의 오류이다. 하지만 성령을 받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면, 성령을 통해 우리는 우리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3:5)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굳게 서라”(고전16:13). “싸우라”(딤전6:12).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딤후2:22).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우리는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명령을 받는다(엡4:22,24). 가장 중요한 본문은 고후 7:1이라고 생각한다.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성경을 왜곡하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그로 인해 멸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명백하게 가르치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구원을 이루게 된다. 우리가 정말로 해야 하는 일은 이같이 여기고, 이해하고, 적용하고, 죽이는 것 등이다. 즉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대단히 균형잡혀 있다. 성화에서 일차적이고 가장, 극도로 중대한 것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이다. “갓난 아이”로서,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거룩하게 되라는 권면을 받는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며 그가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정말로 합당한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