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2', 20장 성령이 행하시는 강력한 과정
20장 성령이 행하시는 강력한 과정
1. 성화는 단번에 받는 것이 아니다.
1) 성화는 주어지는 것이라는 주장
성화는 받는 것인가? 성화는 주어지는 것이라는 견해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칭의를 받은 것처럼 성화도 받으십시오.” 20세기 초의 유명한 교사는 말했다. “당신은 손에 지갑을 들고 있고 그 안에는 파운드 금화 두 개가 들어 있습니다. 먼저 금화 한 개를 꺼내는데 그것이 여러분의 칭의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금화도 꺼낼 수 있는데, 그것이 성화입니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이 첫 번째 금화만 꺼내고 두 번째 금화는 꺼내지 않는데 그것은 비극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칭의를 받습니다. 이제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성화를 받으십시오.” 그들은 성화가 이와 같이 한 번의 행동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행26:18)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거룩케 된”이라는 말은 성화의 두 가지 의미 중 구별된다는 의미이다. 내적인 청결과 정화의 과정이 아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불린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벧전1:2)에서도 거룩하게 하심이 믿음보다 먼저 나온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6:11)에서도 거룩함을 칭의보다 앞에 놓았다. 이 모든 예에서 그 말은 “구별하다”라는 의미이다. 행 26장도 마찬가지다. “믿어 거룩케 된”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방인들이 기업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의미이다.
2) 요한 일서 1:7, 3:8, 9절의 올바른 해석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또한 요한 일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나오는 1:7, 3:8, 9절을 즐겨 인용한다. 이 구절들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빛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 그러다 내가 죄에 빠지면 어떤 의미로는 교제가 깨어진다. 하지만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공의로우셔서 여러분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로부터 여러분을 깨끗케 하신다는 의미이다. 요한은 그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가르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뭔가를 받아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죄를 짓는다면, 화목제물이 되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해결책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3) 롬 8:1-2의 올바른 해석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구절은 롬 8:1-2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들은 두 개의 법이 있으며 바로 여기서 반작용의 법칙이 개입하게 된다고 해석한다. 내 안에는 죄와 사망의 법이 있어 나를 끌어내리고 죄를 짓게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라는 다른 법이 내가 그리스도께 의지하고, 그 안에 거하는 한, 첫 번째 법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준다는 것이다. 부지깽이와 구명대에 대한 예화와 같다. 그러나 이 해석은 심각한 오해이다.
바른 해석은 바울이 앞의 두 장에서 이미 몇 차례 말했던 요점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아담의 타락의 결과, 그리고 원죄를 물려 받은 결과 죄의 지배 아래 있다. 죄는 육에 속한 사람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주관한다. 그들은 죄의 종이다. 그들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죄는 그들의 주인이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죄에 대해 죽었다고 말한다. 두 번째 진술은 6:18이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것은 “너희가 이미 해방되었느니라”라는 의미이다. 이 일은 이미 일어났으며 영단번에 일어났다. 우리가 죄없고 완전한 존재라는 뜻일 수는 없다. 우리는 죄가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죄로부터 해방된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도 않고, 죄의 지배 아래 있지도 않다. 바울은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라고 말함으로써 이 사실을 이미 표현했다. 그리고는 이처럼 아주 흥미롭고 놀라운 방식으로 그 말을 반복한다.
그는 20절에서 다시 한번 말한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의의 종이고 죄로부터 자유하다. 이 모든 구절들이 롬 8:1-2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7장으로 가서 매우 중요한 구절인 4-6절을 보자.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죽임을 당하였으니”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부정과거 시제로 되어 있으며 “영단번에”, 즉 최종적인 결과를 의미한다. 이 말은 의롭다 함을 받은 이후에 얻게 되는 어떤 후속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과 이로 인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때, 여러분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며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다. 여자가 자기 남편과 연합하여 자녀(즉 열매)를 갖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함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 그것이 우리에게 들어온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 생명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전에 우리를 속박했던 죄의 지배는 끝났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직 롬 8:2의 위치에 이르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심각한 잘못인가! 그들은 이 구절이 사실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계속해서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울이 말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부정과거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이미 해방하였음이라” 그 일은 일어났다. 그는 과거의 일을 돌아보고 있다. 하나의 사건이 영단번에, 최종적으로 일어났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순간 나는 죄와 사망의 법과 관계를 끊었다. 그 일은 내가 이차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일이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는 것의 심각성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새로운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연합된다는 것은 옛 남편과의 관계는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은 더 이상 죄나 사탄의 지배, 혹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롬 8:1-2에서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요약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4) 성화는 이루어 나가는 것임을 보여 주는 성경 구절들
만일 우리가 성화를 받기만 한다면 바울과 사도들이 그토록 힘들여 논증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왜 그런 권면들을 한단 말인가?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우리가 성화를 받으면 이런 일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는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을 금하고 우리 자신을 지키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받기 위해 기다리며 인생을 낭비하고, 그러는 동안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않고 있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엡4:28). 이 일을 해야 한다. 뭔가를 받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적질 하기를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하는 말, 그 외 다른 부적절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엡5:4).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12:2). 뭔가 받기 위해 기다려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세상을 본받았다면, 이제 그러기를 중단해야 한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4:8). 성화가 무언가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이런 명령들은 아무 의미 없는 잉크의 낭비일 뿐이다. 만일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다. 너희는 한 번의 행동으로 성화를 받을 수 있으며 그 후 해야 할 일은 그 성화를 유지하고 그 안에 거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신약의 가르침이 결코 아니다. 모든 신약 서신서에는 이런 위대한 교리와 윤리적 호소와 권면이 들어 있다.
2. 성화는 언젠가 얻게 되는 체험이 아니다
1) 극적인 체험과 성화가 동일시될 수 없는 이유다. 성미가 고약했던 사람 등등. 그들은 오랫동안 그 문제로 씨름했으나 해결할 수 없었고, 놀라운 체험을 하고서 다시는 화를 내지 않게 되었다. 담배나 술 등을 끊기 위해 노력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비슷한 이야기들도 있다. 우리는 이런 체험들을 주의 깊게, 그리고 공감하면서 검토해 보아야 한다. 물론, 저는 이런 체험들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 저 자신도 그런 체험을 몇 가지 했다.
그러면 그런 체험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저의 대답은 이것이다. 무엇보다도, 신약에는 그런 체험이 성화를 의미한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그런 체험이 성화의 일부일 수도 있고 성화에 크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성화는 아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저의 목회 경험 동안 모든 죄에서 해방되는 체험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극적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답이 되지 못한다. 자신을 굴복시키고 자발적으로 내드리려 애썼으며,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행했으면서도 이런 체험을 얻지 못한 정직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체험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면 그것은 일부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어야 한다. 또 하나의 논거를 말씀 드리고 싶다. 만일 한 가지 죄에 대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왜 모든 죄에 대해 그렇게 되지는 않는가? 왜 우리가 모두 죄 없고 완전한 상태가 되지 못하는가? 고약한 성질을 위와 같은 방법으로 제거할 수 있다면, 왜 즉각적으로 죄 없는 완전의 상태에 도달하지 않는 것일까요? 저는 우리가 그 같은 상태에 도달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한다.
이 점에 대해 제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육에 속한 사람이면서도 이와 비슷한 체험, 즉 갑자기 성격이 온순해졌다거나 음주에 대한 욕구를 상실하는 체험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체험은 사이비종교나 그와 비슷한 가르침에 의해 생겨 났다. 전기를 읽어 보면 갑작스럽게 예상치 못한 해방을 체험한 비슷한 이야기를 간혹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해방은 심리적 원인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그것이 일종의 영적인 표현일 가능성조차 암시되지 않은 채 말이다.
2) 체험과 성화의 관계
이 체험의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원리를 살펴 보자. 첫째로, 하나님은 특정한 죄들로부터 이런 식으로 갑자기 해방시켜 주실 수도 있고 그렇게 해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 체험을 일반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우리의 교리는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둘째로, 성화는 단순히 특정한 죄 혹은 심지어 특정한 죄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나와 하나님 사이의 전체적인 관계의 문제이다. 특정한 죄들로부터는 해방되었으면서도 성화는 여전히 매우 미미하고 미성숙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성화가 오락가락하고, 잃었다가 다시 찾기를 반복하는 변화무쌍한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3:18)라고 가르친다. 성화는 성장, 발전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체험과 성화를 혼돈하면 안 된다.
성화는 체험이 아니라 상태이다. 그것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이며 나는 “그(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고후3:18) 된다. 성화는 체험들을 포함하며 체험에 의해 도움을 받지만 성화 자체는 체험이 아니다.
성화는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 중생하는 순간 시작되는 생명이며 성장과 발전의 과정이다. 그 생명이 아주 작게 보이고 아무런 변화도 없어 보이는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복된 체험이 이어진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 체험을 성화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 체험은 심어논 식물에 비가 내리고 해가 비치는 것과 같다. 체험은 성화를 자극하고 촉진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성화 자체는 아니다 체험은 성장의 과정이 아니다. 하지만 성장을 돕고 촉진한다.
물론 체험은 갑작스럽고 극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이차적인 특별한 복을 많이 받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저는 주저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성화는 이차적인 복이 아니다. 체험들을 하면서 그들이 주님을 더 경험하면 할수록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과 주님을 실제로 사랑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우리의 성화는 촉진된다. 하지만 반복해서 말하건대, 체험이 성화는 아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진리의 한 측면을 깨달을 수 있고, 그 깨달음의 결과 그들의 삶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때까지는 그들이 성화되지 않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중생한 순간부터 성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감정은 변하고 체험은 오락가락하며, 만일 나의 성화가 나의 체험과 같은 것이거나 동의어로 여겨진다면 내가 성화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의심하게 될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성화는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성장이다
성화를 받아야 하는 체험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것이 갑작스럽게 일어난다고 믿는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거듭난 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고전3:10이다. 요한은 “자녀들,” “청년들,” “아비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요일2장). 이 말들은 태어나서 성인으로 갑자기 도약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성화이다. 여러분은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
1) 구약 성경으로부터 유추한 그리스도인의 삶
모든 이스라엘 자녀들의 역사는 영혼의 구원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영단번에 해방되었으며, 애굽 사람들은 홍해에 빠져 죽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인들의 괴로움은 그 순간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가나안을 들어갔지만 거기서조차 골칫거리가 있었다. 그들은 성화된 지위에 있었지만 여전히 싸워야 할 적들이 있었고, 문제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방법이며, 하나님이 모든 영역에서 동일한 원리로 역사하신다. 우리 주님은 땅에 씨를 뿌리고 나서는 집에 돌아가 밤낮 자고 깨기를 반복한 농부를 묘사하셨다. 씨는 자라기 시작하고 계속해서 자랐다(막4:26-29). 하늘나라도 그와 같다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다.
2) 성화의 과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순간 우리를 완전하고 흠 없이 만드실 수 있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으로 알듯이 하나님은 분명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셨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사탄을 멸하실 것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멸망시키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셨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방법과 방식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왜 하나님은 죽음을 폐하여 버리지 않으셨을까? 유일은 대답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로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며, 우리의 성화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성화 방법은 중생의 순간 시작하는 이러한 과정이다. 성화는 계속 지속된다. 우리의 모든 체험은 성화를 촉진시키고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된다. 우리는 진보하고 발전하고 있다. 우리는 일년 전보다 지금 더 성화되어야 하며, 그 과정은 마침내 영광 가운데 우리가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온전하게 되기까지 계속 진행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