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빌립보서 강해', 6장 넉넉히 이기느니라 (김영희)

강대식 2019. 10. 2. 15:33

6 장 넉넉히 이기느니라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될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12)

 

- 오늘 설교에서는 바울이 11, 12, 13, 14, 19, 20절에서 한 말을 살펴보겠다. 12절은 이 모든 구절을 이해하는 실제적인 열쇠가 된다. 그는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갇힌 상태에서도 승리의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알리고자 했다. 그는 빌립보 교인들로 하여금 진리를 굳게 붙잡게 함으로써 장차 어떤 불운이 닥친다 해도 자신과 같은 믿음으로 승리하게 되기를 바랐다.

사도의 말을 살펴볼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가 정확히 어떤 형편에서 이 편지를 썼느냐 하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감옥에 갇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운신의 자유까지 박탈당한 것이다. 어떠한 배려도 없는 그런 상황이 얼마나 괴롭고 견디기 힘들었을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12절에서 기독교의 역경론이라 할 만한 말을 하는 것이다.

삶이 괴로움과 시련의 문제가 종종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과 이런 세상의 현실이 모순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분노와 깊은 상심으로 등을 돌린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성경은 이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는다. 성경은 원칙을 주고 기본 명제를 제시한 다음, 진리는 이것이니 적용해 보라고 한다. 이것이 성경의 방법이다. 저는 성경은 세상과 삶의 모든 문제에 답을 주지는 않지만, 감사하게도 삶을 살아가기에는 충분한 답을 준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문제들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게 하셨다. 훈련의 일환으로 우리를 무지한 상태에 두시며, 우리의 한계를 보이시고 우리가 신이 아님을 상기시키시는 것이다. 결국 우리를 시험하시고 낮추시기 위해 우리가 전능하신 조물주의 손아래 있는 한낱 피조물임을 일깨우시기 위해 이처럼 불가해한 일들을 허락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부족함이 없는 교리를 주셨다.

첫째 원리는,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생긴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이것이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태도이다.

둘째 원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대하는 참되고 올바른 태도는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태도라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거의 모든 진술에서 이 태도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복음과 말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기든, 복음과 그 가르침의 관점에서 바라보라는 것이다.

사도처럼 사나운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사도가 믿는 바를 믿는 사람이다. 믿는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 바른 장소에서 출발하는 것, 바른 시각과 관점을 갖는 것, 성령이 밝혀 주신 눈으로 모든 일을 바라보는 것이 비결이다.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고백이 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바울처럼 반응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 이 원리가 사도의 삶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용했는가? 역경에 반응하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12절은 이 주제를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보여주고 있다.

1. 소극적 측면) - 바울은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 하나님과 그분의 방법에 일말의 의구심도 내비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비결은 그가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을 대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관점과 반응이 올바르고 관계가 온전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불평이나 원망이 있을 수가 없었다. 바울이 절대적으로 확신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는 그 사랑을 자신의 절대적이고 확실하며 견고한 토대로 삼았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여기에 기독교의 인생관이 전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역경을 딛고 승리자로 우뚝 서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여기에 달려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2) 이것이 바울의 논리인 동시에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다. 5:10에도 같은 논거가 나온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속하시기 위해 생명을 주시고 죽으셨다면, 하늘에 계신 지금은 더더욱 그 생명으로 우리를 붙드시며 구원의 일을 완성하실 것이 확실치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심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것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일이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바울처럼 이 논리를 적용하고 있는가? 벌떡 일어나 이 강력한 기본명제 -‘하나님은 나와 나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실 만큼 날 사랑하신다’-를 직시하는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제대로 보인다. 바울은 그 사랑을 절대적으로 확신했기에 그의 뜻과 방법을 의심하지 않았고, 불평을 터뜨리지 않았다. 그는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8:38-39) 그가 의지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올바른 태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 생각하거나 자신에게만 관심을 쏟지 않았다. 자신을 완전히 잊을 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한 데 바울의 비결이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까?”를 묻는 대신, “이 일이 복음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를 물었다. 병적이고 감상적인 자기집착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삶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바울의 유일한 관심사는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시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 나라와 그 나라의 왕에게 온 관심을 쏟았기에, 현재 인간의 삶에 저주가 되고 있는 병적인 정신상태와 불행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다.

 

2. 적극적인 측면) 바울은 환란과 고통의 때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환경을 바꾸신다는 표시와 표적을 주시기를 구했다.

하늘의 연금술은 형편없는 재료를 아주 좋은 재료로 바꾸어 놓는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내가 옥에 갇혔다고 복음 전파까지 다 끝난 것처럼 생각하지 마라. 나의 투옥은 멋지게 방향을 틀어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고 있다. 내가 갇히지 않았다면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 이것이 투옥의 주된 결과다그를 지키고 있던 군병들은 시위대 소속이었다. “그들은 내게 전후 사정을 물었고, 나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궁전의 온갖 화제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큰 화젯거리로 삼았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투옥을 화학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오히려 복음을 확장시키셨다.

 

요셉은 잔인한 과거를 떠올리면서 그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헤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50:20),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이 힘겨운 상황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하나님은 이 상황에 개입하시고 이 상황을 사용하시며, 이 상황을 바꾸고 계신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인생의 역경과 시련과 환난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태도부터 바로 잡으며,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이 이 상황을 통해 하시려는 일이 무엇인가?”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바라보는 사람은 이미 승리한 것이며 시험을 딛고 일어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항상 복음을 증언할 기회를 포착한다.

바울은 자신의 투옥을 시위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주안에 있는 많은 형제들이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다고도 말한다. 바울이 감옥에서 이와 같이 처신함으로써 나타난 두 가지 중요한 결과이다.

 

역경과 고난의 때에 저와 여러분이 하는 모든 행동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를 찾는 것이야말로 삶에 맞서는 방법이요, 고난과 환난에 맞서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느닷없는 시련이 닥칠 때 큰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라. 그럴 때 나를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시련은 복음을 증언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또한 바울은 우리보다 약한 사람들, 조금씩 의심하며 주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들이 여러분이 모습을 보면서 그래, 결국 복음이 옳다. 저 사람은 변명 한 마디 없이 견뎌 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 옳다는 것과 복음의 약속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이렇게 대처하면 이길 수 있다.

 

바울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시는 과정임을 알았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19-20) 여기에서 말하는 구원은 풀려나는 구원이 아니라 가장 온전한 의미의 구원이다. 바울의 요지는 내가 이 시련의 의미를 속속들이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 나를 완성시켜 나가시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감옥 안이 아니면 하실 수 없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시련과 환란이 감당하는 역할이 있다. 시련과 환란은 삶을 똑바로 보게 해 준다. 재난이 닥치고 사업이 망하면 비로소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이든 우리에게 유익하다. 시련은 다음 세상을 생각하고 준비하게 만든다. 시련이 없으면 다음 세상을 잊은 채 현세에만 매여 살기 쉽다.

또한 시련은 우리의 죄성과 무가치함을 일깨우며 연약함과 무력함을 상기시킨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게 만든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며 그를 더 알고 싶어 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이든 아주 유익하다. 그 모든 것은 나를 완성시키시는 과정이며 거룩하게 하시는 과정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경영과 지혜 안에서 우리 삶에 많은 시련을 허락하신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12:6) 시련은 하나님의 자녀를 최종적으로 완성시키기 위한 과정이다.

 

우리는 삶의 시련과 환란에 맞서는 사도의 비결을 살펴보았다.

소극적인 측면을 기억하라. 그는 하나님에 대해 자신과 삶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무런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않았다.

적극적인 측면도 기억하라. 하늘의 화학작용이 일어나기를 구하라. 복음을 증언할 기회를 찾으라. 나를 완성시키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과정에 순복하라. 하나님이 사랑의 손길로 결국 자신의 일을 마치시리라는 사실을 마음에 분명히 새기라. 그리고 최악의 상항에서도 삶을 직면케 하는 복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을 힘입어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