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빌립보서 강해', 7장 그분, 오직 그분 (김영희)

강대식 2019. 10. 13. 19:40

7 장 그분, 오직 그분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1:21)

 

- 이런 구절을 온당치 못한 태도로 대하는 것은 거의 신성모독에 가깝다는 것이 저의 입장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참된 경험, 실제 현실의 경험을 만나게 될 뿐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점검해 볼 기준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경험은 다 거룩하다. 그런 경험이 담긴 말씀을 초연한 태도(과학적인 태도)로 선뜻 다룰 수 없으면서도 어느 정도 분석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 의미와 참된 목적을 찾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석해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동시에 이것이 실제 경험이자 엄연한 사실임을 기억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갇힌 일로 염려하며 근심했다. 그러나 사도는 자신의 투옥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하는 것이 자신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라고 말했다. 이 말씀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고 다루려 하는 점은 사도가 이 특별한 말씀을 통해 삶의 의미,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무엇을 말하느냐 하는 것이다.

 

- 삶이란 무엇인가? 대체 어떤 것이 사는 것인가?

우리는 그토록 삶을 걱정하며 온갖 활동을 벌이면서도 정작 가장 명백하고 우선적인 문제, 즉 삶 그 자체와 산다는 것 그 자체의 문제는 직면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닌가? 21절은 오직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만을 위한 말씀이다.

 

바울은 여느 그리스도인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인물이라는 말에 누구보다 반대할 사람은 바로 바울 자신이다. 물론 우리도 은사와 직분이 각각 다르다는 점은 인정한다. 성령이 맡기시는 사역은 각각 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일하다. 이 사실이 우리 삶에 나타나야 한다. 사도에게 해당되는 사실은 당연히 다른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된다. 21절은 우리 자신을 검증할 수 있는 시금석 중에서도 가장 엄격하고 철저한 시금석이다. 우리도 이 사람처럼 우리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가? 이 사람처럼 말할 수 있게 될 때,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이 사람처럼 주를 향한 열정으로 타오를 때, 그리스도인의 삶은 찬란하게 빛을 내며 세상은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내게는 그리스도가 곧 삶이요 삶이 곧 그리스도다거듭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그리스도가 곧 그의 삶이라는 것이다.

- 이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을 살펴보면

에피쿠로스주의들의 인생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먹고 마시고 즐기자이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삶 자체보다 하루하루 사는 것에 집중한다. 그들에게 산다는 것은 곧 즐기는 것이다. 이것은 참담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스토아주의 인생관삶이란 견디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지적이기에 세상은 잔인하고 고통이라는 것을 안다. 삶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사나운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에 맞서는 것이고, 한도 끝도 없이 투쟁하는 것이며, 꿋꿋이 참는 것이며, 결연히 버티는 것이다.

 

신비주의적 인생관도 있다. 전형적인 신비주의 관점은 삶과 삶의 모든 불행은 결국 몸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몸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고 몸에서 벗어남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비주의자들은 몸을 죽이는 일에 시간을 투자한다. 세상에 대해 죽은 자처럼 완전히 수동적인 태도로 살아간다.

보통 사람의 인생관, 교회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에게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이 붙잡고 사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면, 가족과 가정, 일과 직업, 삶의 여러 가지 활동을 의미한다고 인정하며 고백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 아닌가? 물론 그런 것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 자체가 삶이 되어, 그런 것들을 잃으면 삶과 세계 전체가 무너져 내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인본주의적인 관점도 있다. 인본주의자들에게 산다는 것은 선을 행할 기회, 세상을 개선하고 사회의 상태를 향상시킬 기회를 의미한다. 그들에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물으면 인류의 삶을 변화시키고 진보시켜서 향상시킬 기회라고 대답한다.

종교적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는 관점으로, 종교적 인생관은 기독교적 인생관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삶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종교를 가지고 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있다. 설교자의 가장 큰 위험은 활동(연설, 설교, 목회, 바쁜 종교 활동)에 빠져 사는 것이다. 그런 것에 빠져 살다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면 공허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이것은 인생의 큰 비극이다. 활동과 여러 가지 관심사에 빠져 사는 사람들은 바울이 말하는 삶을 그런 것으로 대체해 버릴 위험이 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에게 삶은 곧 하나님이 아니다. 지나친 말로 들리는가? 유대인이나 무슬림이라면 나에게 삶은 곧 하나님이라고 아주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세상에 많이 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말이 오직 기독교만의 표현이자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표지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하나님,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바울에게 삶은 종교적 관심사도 아니고 종교 활동도 아니다. 그에게 삶은 곧 그리스도이다.

 

-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삶은 무엇인가? 그가 말하는 삶은 사랑이다. 사랑이야말로 삶의 최고봉이요 목적이요 이유이다. 사랑이 없는 삶은 아무 뜻도, 의미도 없다. 바울은 그 사랑이 자신의 삶 전체를 다스리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 가장 좋은 표현일 것이다. 이것이 자기 삶의 목적이요 본질이요 목표라고 바울은 말한다.

 

- 삶이란 무엇인가의 좋은 분류법은 우리가 하는 일을 곧 삶으로 보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 앞으로 남은 날들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 그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삶은 우리의 생각과 관심 영역으로 이루어진다. 바울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 자고 깨는 것, 일을 하고 직장에 다니는 것이 삶은 아니다. 바울은 지금 그런 삶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삶에 목적이 있다고, 참된 의미를 부여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우리가 여가 시간 대부분을 어떻게 보내는지, 무엇을 읽고 생각하며 보내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사랑의 특징은 당연히 사랑하는 대상을 늘 생각하는 것이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21) 우리의 실제 관심사가 무엇인가? 바울은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가 항상 중심이었다.

사랑하면 그 느낌과 감정을 표현하게 되며, 마음 속 갈망을 표출하게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더 많이 알고 사랑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 느낌, 이 충동, 이 감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삶은 활동과 행동을 가리키기도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파하는 일에 시간을 썼으며, 자신을 통해서든 다른 사람을 통해서든 그리스도를 알리기를 원했다.

산다는 것은 우리 삶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앞으로 남은 삶을 산다면 나는 어떠어떠한 일을 할 것이고, 어떠어떠한 일들을 겪을 것이다. 그것이 곧 삶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도 자신에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바울은 매사를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외부에 일들에 매이지 않고 상황이나 우연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상황에도 짓눌리지 않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삶과 사랑에 대해 할 수 있는 또 다른 말은, 누구나 채워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찾는 것이 생기게 마련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채워 주신다고 말한다. 자신의 본성적인 요구와 개인적인 요구가 전부 채워지고 충족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적 입장의 핵심이다. 이 모든 의미에서 바울에게 사는 것그리스도였다.

 

두 번째 질문) 바울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성자의 영광에 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그를 직접 보자 그 광경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리스도의 얼굴과 그 영광 외에 모든 것, 그 복되신 분 외에 모든 것이 빛을 잃어버렸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도 믿음의 눈으로 잠시 그분을 본 사람은 누구나 타오르는 열정에 사로잡힌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바울이 보았던 환상을 나도 본다면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1:8)라고 했다.

 

위대한 성도들의 생애를 읽어 보라. 그들은 예수를 사랑했다. 믿음의 눈으로 예수를 보았고 그에 대한 증언을 우리에게 남겼다. 이처럼 예수의 영광은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허락된 이런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다. 우리는 그토록 복을 갈망하면서도 정작 그 복을 주시는 분은 잊고 지낸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것을 알았다. 이것이 십자가의 영광이요 경이이다.

 

바울이 보고 알게 된 사실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참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 다 쓸모없는 쓰레기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삶은 삶이 아닌 생존이다. 삶은 원래 어그러진 데 없이 온전해야 한다. 삶은 지성이 채워져야 하고, 감정도 채워져야 한다. 삶 전체에 빈 구석이 없어야 한다. 온전한 삶이 원처럼 사람을 둘러싸고 있어야 한다.

 

바울이 이런 생각과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인생관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상의 삶이 장차 다가올 위대한 삶의 준비과정에 불과함을 알았다. 그것은 이 세상을 무시한다거나 회의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져 산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적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수동적으로 세상에 대해 죽은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죽은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악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큰 전투를 벌이고 있음을 알았다. 왕이 귀환하여 악한 군대를 물리치고 그 나라를 세우실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저 영광을 생각해 보고, 장차 내가 살게 될 삶을 생각해 보았다. 이것을 알았기에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었다.

 

- 우리에게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우리 모두 이 열정을 품게 된다면, 하루아침에 이 땅이 변화되고 위대한 부흥이 임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분, 오직 그분! 그분을 생각하자. 그분을 묵상하자. 그분을 계시해 주시기를 성령께 간구하자. 이 일에 시간을, 이 일을 중심에 놓자. 그분을 잘 알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하자. 그분을 알면 자연히 사랑하게 되어 있다. 그분, 오직 그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