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빌립보서 강해', 8장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김영희)

강대식 2019. 10. 13. 19:42

8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지는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1:21-14)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죽음을 대하는 바울의 태도를 살펴보겠다. 지난 설교에서 사도는 이 진술을 통해 삶의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로 첫 번째 질문을 하였다.

 

- 이제 두 번째 질문으로 죽음이란 무엇인가?”이다.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싫어한다. 죽음에 대한 설교도 싫어한다. 삶에 온 관심을 쏟는 것도 죽음이라는 현실을 잊고 최대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위대한 전통의 출발점이 된 17세기 청교도들은 시종일관 죽음을 통해 삶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이상하고 기이한 일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건강보험이나 생명보험에 들라는 말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으며 보험에 드는 것을 더없이 현명한 행동으로 인정한다. 현대인들은 이렇게 미리 대비하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며, 모든 영역에서 대비책을 마련해 놓는다. 그런데 가장 확실하고 긴요하며 중대한 사건인 죽음에 대해서만큼은 정반대로, 죽음을 직시하고 그에 대비해야 할 의무와 중요성만 이야기해도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한 현대인의 반응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히브리서 2:15은 죽음에 무관심한 현대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울은 완전히 다른 태도로 죽음을 직시한다. 그리고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만큼 놀라운 복음의 업적은 없다. 죽음에 대한 구약성경의 관점을 살펴보면 죽음에 대해 흐릿하고 모호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마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불평하는 시편도 있다.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6:5)

죽음에 대한 새로운 태도는 우리 주와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야 비로소 등장한다.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 을 펼치면 죽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 과거에는 없었던 새롭고도 낯선 관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당연히 부활 때문이다. 부활은 이미 죽음을 정복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부활이라는 이 중대하고 영광스러운 사건 덕분에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웃으면서 죽음을 맞을 수 있었던 것이고,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가 빌립보 교회에 이 강렬하면서도 도전적인 말씀, 굉장한 말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렇게 죽음을 직시했다면, 우리도 죽음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리는 말과 죽은 것도 유익함이라는 말 중에 어느 쪽이 더 어렵고 면밀한 기준인 것 같은가? 주저 없이 앞의 말이라고 대답하겠다. 그 이유는 죽음과 영원한 운명은 감사하게도 그리스도께 달린 문제이다. 그런데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해 주시는 일이 아니라 나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어렵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앞의 말만큼 어렵고 면밀한 시금석은 아니어도 아주 중대한 시금석이다. 죽음이 현실로 닥쳤을 때 나한테 유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현대인의 흔한 관점은, 첫 번째로 두려워하거나 증오하는 것이다. 죽음은 서서히 다가오는 무서운 대상이며 공포심을 일으키는 대상이다. 또 다른 태도는 체념이다. 어차피 죽음은 찾아오게 되어 있고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으니 걱정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 관점은 용기를 가지고 굳게 서서 두려움을 물리치자는 것이다. 일종의 저항을 하자는 것이다. 마지막 관점은 기독교적인 관점이다.

 

이 시는 버지니아의 뛰어난 목회자 제임스 포위스 스미스의 시이며, 그는 남북전쟁에 참여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숱하게 헤쳐 나온 사람이었다.

청황색 말이 왔으니 지체치 않으리라.

밤이 찾아와 떠나야 하지만

친구가 손잡고 함께 가시니

홀로 미지의 땅으로 떠나는 건 아니다.

내가 싸울 싸움을 다 끝냈고 달려갈 길도 다 마쳤다.

나 이제 그분의 얼굴을 맞대고 보리라.

오래 전 날 부르신 분의 얼굴,

믿고 따르라 명하신 분의 얼굴을,

삶의 기쁨은 그의 선물이었다.

저 구름 다 걷히면 그 친구가 보이리라.

그 친구와 영원히 살기 위해

이 집과 모든 것을 두고 간다.

그는 무엇을 주실까? 사랑의 잔을 주어

저 위에서 자신과 함께 쉬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나 헤매지 않고 달려 올라가리라. 청황색 말이 내 집으로 날 데려간다.

이 시가 보여 주는 것은 두려움이나 체념이나 담대한 용기를 내 보려는 시도가 아니라 승리이다. 웃으면서 죽음을 맞이하며 자신감과 확신에 차 있다. 이 시는 죽음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적인 태도를 보여 준다. 이 말은 죽는 행위보다 죽음 이후에 대한 언급이다.

 

아 말의 앞뒤 구절을 보면 죽는 행위에 대한 암시가 나온다. 떠나서”(23)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닻을 올리는 것 출항하는 것으로 죽음이란 다음 세상으로 건너가 그 순수한 기쁨의 땅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장막을 걷는 것, 야행생활을 접고 길을 떠나는 것이다. 저는 후자를 택하겠다. 바울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고후5:1)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유대인의 전형적인 관점이다. 덧없는 세상의 삶은 마치 장막생활과 같다는 것이다. 그에게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 옮겨가는 행위에 불과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16:22) 우리 머리로는 이런 일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다음 세상으로 건너가는 마지막 행위를 할 때 천사들이 우리를 받들어 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란 이런 것이다.

 

바울의 진정한 관심은 죽는 행위 자체보다 죽음 이후의 상태와 상황에 있었다. 그는 23절에서 죽는 것이 유익한 이유를 밝힌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라”(23) - 이 구절은 훨씬,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것 말고 달이 표현할 말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바울은 도대체 왜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것일까?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11:14-16)

이들이 결국 찾는 것은 장막이나 야영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신 성, 요동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성이라는 것이다. 일시적이지 않은 영원한 삶을 살게 되기에 훨씬 더 좋은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13:14)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속적이고 영원한 상태, 불변의 상태를 누릴 것이다. 이것이 죽는 것도 유익한 이유이다.

 

죽음을 귀향으로 보는 개념이다. 우리의 교제(시민권)는 하늘에 있는지라”(3:20) 우리는 이곳 백성이 아니다. 본향이 따로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요 순례자이다. 저 하늘에 우리 집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것이다.

죽으면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 안에서 이 사망의 몸을 벗게 되며(7:24), 죄로 가득 찬 모든 것과 불완전한 모든 것을 벗게 된다. 죄의 요소들이 전부 씻겨 나가는 날,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본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 기이함과 영광을 본다는 것이다. 아무 한계나 장애 없이 이해하고 안다는 것이다.(고전13:12)

 

무엇보다 죽음이 참으로 유익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앞서 말한 유익들은 어떤 의미에서 소극적인 것들이나, 이것은 크고 적극적인 유익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얼핏 보았는데도 그때 본 얼굴을 평생 잊지 못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그의 얼굴을 보는 것, 그 자체가 그에게는 천국이었고 영원한 지복이었다. 바울은 그것을 사모했고, 그것을 위해 살았다.

세상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경험을 하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혼이 활기를 잃고 교통이 막히는 때가 찾아온다. 그 때에도 우리는 세상에서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행한다.(고후5:7) 그러나 그곳에서는 교통이 막히는 법이 없으며, 중단 없이 영원토록 동행할 수 있다. 바울은 이런 이유들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한 것이 분명하다.

 

- 사람들이 신약성경은 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더 이야기해 주지 않는가?”라고 묻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설령 더 이야기한다 해도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세상은 전부 죄에 물들어 있고,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성경이 자세히 설명해 준다 해도 언어의 한계 때문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것이다. 우주의 온갖 어휘를 동원한다 해도 이렇게 놀라운 일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이것은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놀라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온전해져서 자격을 얻은 후라야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고 설명할 수가 있다.

 

바울이 생각했던 것만큼 우리도 생각하게 하시려고 일부러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죽으면 앞서 말한 것들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온전케 된다는 이야기만 했다. 우리가 천국에 가고 싶은 유일한 이유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서이며 그를 보기 위해서이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는 이 한 글자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사람만이 진정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며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발람 선지자는 의인의 죽음을 원한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의인의 죽음을 죽기 위해서는 의인의 삶부터 살아야 한다는 점을 그는 망각했다. 바울은 앞의 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뒤의 말도 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바울의 삶을 불태우는 열정 그 자체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도 이처럼 삶과 죽음의 관점에서 자신을 검토해 보게 하시며, 사도의 영광스러운 확신에 동참하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