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 주일설교, '완전한 자', 골 1:28-29
2019=10-13 주일설교
본문: 골 1:28-29
제목: 완전한 자
1.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1:28)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복을 받고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도 미신도 한다고 할 수 있다고들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바알신 섬기기를 좋아한 것은
쉽게 복을 받고 문제 해결을 받고 아울러 음란까지 즐길 수 있어서였다.
현대판 이스라엘인 현대 교인들 중 상당수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동일한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몰라서 였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육신의 사람들의 공통 분모이고 공통 욕구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항상 다수를 차지하고 당대의 제도권 종교의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책을 줄줄 외면서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 수 없었고
영적인 것은 알 수도 없고 분별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그리스도는 복 주머니도 아니고, 문제 해결사도 아니다.
그런 거 받으려면 현대판 바알신들에게 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교회들로 가면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이시다.
만물이 그리스도에게서 창조되었고, 만물이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았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고, 하나님은 신성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우리도,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와 화평을 이루고 화목을 이루시며 구원하신 목적은
복을 받기 위함도 아니고, 문제 해결을 위함도 아니고,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운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이다.
사람이 어떻게 완전할 수 있느냐? 하는 사람들은
그 의미도 모른채 인간의 상식으로만 완전은 불가능하다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지는 방법은 말씀으로 살고 성령으로 살 때 가능하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신다.
내가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신다.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할 수 있으니까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힘입어 말씀으로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도 광야 생활의 연단을 통해서,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면서,
떡으로만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게 하시는 것은,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완전한 자로 세울려고 우리를 돕는 것이다.
이렇게 거룩하고 성결해지면, 주님의 형상을 닮으면,
하나님은 축복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고 가나안 기업을 주신다.
그것이 구원의 목적이고 축복의 언약인 것이다.
성결함 없이 거룩함 없이 복을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주제넘은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함께 거룩해져야 하는 것이다.
이 소망을 가진 우리는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는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과 같다.
주님의 제자가 될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매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고,
내가 내 몸을 쳐서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야 한다.
2. 권하고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골1:28)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영적인 것들을 전혀 알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권함을 받고 가르침을 받기 전에는 영적인 것들을 이해할 수도 없다.
성경도 영적인 지혜로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교회는 설교와 가르침으로 이 영적인 것을 알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거듭난 성도들도 영적인 것은 영적인 가르침으로 배우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권함을 받고 배우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위시해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영적인 것들은 배우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많은 교회들이 영적인 것들을 가르치지 않고 세상의 바벨탑 쌓기에만 급급해 하고 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서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고 열심을 내어 말씀을 영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것들은 등불이 꺼지듯이 꺼지고 말고, 풀이 시들듯이 시들고,
채소가 쇠잔해지듯이 쇠잔하고 만다고 하신다.
영적인 것을 배우기 전에는 우리 속은 육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세상의 그것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그것으로 바꾸어야만 한다.
그럴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지혜로 가르친 것을 배워야 하고 다시 세워야 한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2:8)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이미 사로잡혀 있음을 알고 깨어나야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만든 전통이요,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고 있는 동안,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하신다. 육신의 생각이 무엇인가?
바로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라서 사는 것이다.
그 육신의 생각으로 살면 아무리 애써도 사망과 멸망이 올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 속에 가득차 있는 육신의 생각과 세상의 지혜들을 씻어내야 한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하신다.
영의 생각으로 살아야 건강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영의 생각이 무엇인가?
성령의 생각과 말씀의 생각이 바로 영의 생각이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고 하는 말씀이 그것이다.
성령이 가르치신 지혜로 말씀을 공부하고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우리가 육신으로 하는 기도는 받지 않으신다.
성령 안에서 말씀으로 하는 기도를 받으신다.
성령과 말씀, 이 둘이 함께 하고 균형을 이루는 것,
그것이 우리의 거룩과 성숙과 완전을 이루게 한다.
사람의 지혜로 말씀을 배우면 고작해야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 될 뿐이다.
바리새인은 성경을 줄줄 외우면서도 겉만 알고 겉만 지켜서 외식하는 자들이다.
말씀을 법 조문처럼 율법화만 하는 자들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
사두개인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교회를 세속화하는 자들이다.
영적인 것은 도무지 믿지 않고 자기가 아는 상식, 사람의 지혜와 자기가 배운 초등학문만 알고,
인정하고 오직 그것으로만 성경을 알고 고집하는 자들이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과 공회 회원들과 부자들이 그러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은 사람만이 성령이 가르치신 지혜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한다.
그것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지켰던 전통이고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지킨 전통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되찾아야 하고 돌아가야 하는 사고방식이고 가치관이다.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살후2:15)
사도들이 한 말과 편지는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하고 쓴 편지들이었다.
그것이 성경으로 기록되었고, 그 가르침이 전통으로 지켜 온 전통이다.
19세기 말 이후 교회는 이 전통을 버리고 소위 현대신학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소위,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돌아간 것이다.
교회는 이 현대신학의 검불(가시덤불)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로잡혀 있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사람의 지혜요, 세상의 초등학문인 것을 알고 과감히 벗어던져야 한다.
교회가 사는 길은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신학으로 돌아가서
성령의 지혜가 가르친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계명을 교훈으로 삼아 가르치는 헛된 예배를 드릴 뿐이다.
성령의 가르침으로 우리 옛 사람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바꿀려면 말씀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
평신도들도 목사들도 성경을 다시 배우고 익혀야만 한다.
교회생활을 오래 했지만,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우리가 배운 적도 없다.
성령으로 뜨겁게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운동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한가족교회가 헤브론에 오르고 성령을 부어주시면,
교회는 개혁되고 참된 부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오기를 소망하고 기도하고 있다.
평신도들도 신학생처럼 말씀을 뜨겁게 공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과 마음에 베어있는 세상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바꿀 수 없다.
떡으로만 살던 방식에서 말씀으로 사는 방식으로 바뀌기 위한 확실한 기초과정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한 주에 6시간씩은 투자해서 3년 9학기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을 주신다.
돈 버는 열심에 바쳤던 시간의 10분의 1만 여가시간에 드리면 할 수 있는 것이다.
낮에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루 6시간만 바치면 되고,
직장과 사업을 하는 사람은 밤에 이틀만 3시간씩 바치면 되는 것이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 읊는다는 말을 참고하라.
성령의 사람으로, 말씀의 사람으로,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으로 사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이 되고, 다윗과 여호수아와 같은 사람이 되는 훈련이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2:2-3)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1-2)
3. 능력의 역사를 따라 나도 힘을 다해 수고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속에는 성령이 내주하신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고 계신다.
그 능력을 구하고 힙입고 의지하여 나도 힘을 다해 수고해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질 수가 있다.
주님의 참된 제자가 돌 수 있고,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HERE & NOW!’ 말씀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청교도들처럼 말씀을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며 지켜 행해야 한다.
하나님께 복 받는 다른 지름길은 없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고 주님 말씀하셔도
왜 땅의 것만 먼저 구하고 있는가?
말씀을 모르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니까, 믿음과 확신이 없어서 그렇다.
말씀을 통해 성령을 통해 우리 속사람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의 운명은 결코 달라질 수가 없다.
사랑하는 내 자녀의 운명도 바꿀 수가 없다.
거룩함이 먼저이고, 완전함이 먼저이고, 그것만이 우리의 운명을 하늘길로 데려다 준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나도 그 역사를 힘입어 힘을 다해 수고를 해야 한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