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 주일설교, '흑암과 사망의 그늘', 시 107:10-15
2019-10-20 주일설교
본문: 시 107:10-15
제목: 흑암과 사망의 그늘
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한 까닭이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107:10-11)
우리 인생들이 원하는 것은 행복과 형통이다.
이런 소원과는 달리 왜 인생은 고통과 슬픔과 위기들이 많은가?
그 원인을, 배운 게 적어 몰라서, 가진 게 없어서, 운이 안 좋아서 등등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도움을 받고자 달려가는 곳이 우상이요 미신이다.
단숨에 일거에 지름길로 해결을 보고자 한다.
또 그들이 그렇게 약속하니까 그렇거니 하고 의지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항상 우상을 가까이하고 더 열심히 믿은 것은
신속한 고난 해결과 음란과 방탕을 합법적으로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늦고 불확실하고 보이지 않으니 교인들도 현대판 이스라엘에 머물고 있다.
보이는 우상에게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우상은 마음 속에 있다.
돈과 권력과 명예가 우상이고 자식과 가정과 사업이 우상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우상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이 우상이다.
야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버릴 줄 몰랐고, 옛 사람 그대로였고, 성결할 줄을 몰랐다.
20년만에 일가를 이루고 많은 소와 양떼들을 이끌고 에돔 땅 숙곳에 자리잡았다.
그렇게도 두려웠던 에서 형과의 만남도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해결되었지만,
형에게로 간다는 약속도 저버리고,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했다.
20년 동안 괴롭힌 라반 삼촌도 이제 없고, 두려움 에서도 해결되어 안심하였다.
엘엘로헤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하나님 이름 ‘엘’이 두 번 들어있고 자기 이름 ‘이스라엘’을 붙였다.
중심은 하나님에 있지 않고 나 이스라엘에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이 교만과 외식과 안심이 어떻게 깨어지는가?
열 두 아들 중 외동 딸 디나가 그곳 추장 아들에게 욕을 당하면서였다.
레위와 시므온은 할례를 빙자하여 그곳 남자들을 다 죽이고 재물을 강탈하였다.
야곱은 두려워 떤다.
“가나안 족족과 브리스 족속---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창34:30)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일 뻔하였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 거주하고 제단을 쌓으라 하신다.
그제서야 야곱은 깨닫고 세 가지를 결단한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창35::2)
엘엘로헤이스라엘 제단은 이방 신상들, 곧 우상들을 품은채
거룩함도 없고, 옛 사람을 버리지 않은 채 드린 제단이었다는 것이 비로소 판명되었다.
우상을 버리고 거룩하게 하고 새 사람으로 갈아 입고 제단을 쌓아야 한다.
내가 쌓아야 할 제단은, 내가 편하고 내가 좋은 곳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나 주시는 곳, 벧엘, 그곳은 야곱이 도망갈 때 만나 주신 곳이었다.
그 벧엘에서 거주하고 거기서 쌓는 제단, ‘엘벧엘’, 벧엘의 하나님 제단을 기뻐하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엘엘로헤이스라엘’, 내 이름의 하나님 제단을 쌓으면서 안심하고 있다.
나의 하나님 제단이 아니고 ‘엘벧엘’의 제단, 벧엘의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만나 주시는 곳 벧엘, 그곳에 거주하고 거기서 엘벧엘 제단을 쌓고 예배하여야 한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아무 곳에서나 제사 드리지 말라고 하셨다.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와서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곳도 외식만 할 뿐 마음은 먼 제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사마리아 산당에서도 말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요4:23) 하셨다.
오직 성령으로, 오직 순전한 진리의 말씀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결해진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를 영적인 예배로 받으신다.
십계명 중 1, 2, 3 계명은 우상을 버리라는 것이다.
다른 신을 두지 말고, 형상(우상)을 새기지 말고, 하나님 이름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과 정성으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부모를 공경하고 범죄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되는 유일한 원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존자,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의 뜻을 기록한 것이다.
하나님과 말씀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뜻인 말씀을 사랑한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5:3)
우리 인생길을 광야길로 걷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오직 떡으로만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면서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게 되는 것도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되는 것도, 그 원인이 무어라 하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한 때문이라 하신다.
말씀을 공부해야 지존자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
말씀을 공부해야 이 세대를 본받지 않게 되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을 수 있다.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고 배우면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고 하셨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며 거룩하게 되는 길은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뜨겁게 공부하는 것 밖에 없다.
내 인생에 드리워져 있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을 벗겨 내는 길도,
내 인생을 옥죄고 있는 곤고와 쇠사슬에서 풀려나는 길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지존자의 뜻을 존중하는 것 밖에 없다.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하였다.
말씀을 버리면 받은 축복도 버려진다.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하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경멸한다고 하셨다.
2. 고통을 주어 겸손하게 하시고 환난중에 기도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시107:12-14)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면,
하나님은 고통을 주어 낮추시고 엎드러지게 하신다.
그때에 힘있다는 다른 인생은 도울 수가 없다. 돕는 자도 없게 하신다.
그 환난 중에 주위 사방이 다 막히면 사람은 하늘을 쳐다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비로소 생각하고 그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그 고통에서 구원하여 주신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어주신다.
그렇게 회개하고 돌아와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을 가게 된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이, 곤고와 쇠사슬이 자기 인생에 들어닥친 원인을 모르는 사람들은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봐야, 자기 생각과 자기 뜻을 고집하며 완고하게 살아봐야
고난은 더욱 깊어지고, 자기 땅을 사사시대 흑암의 시대로 만들 뿐이다.
장기간의 포로생활이 닥치고 결국은 멸망으로 끝이 나고 만다.
환난 중에 하나님께 돌이키고 회개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오시지 않고 영적인 빛을 비춰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돌이켜 죄를 회개할 수도 없고 복음을 믿을 수도 없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하였으면, 이제 우리는 성화의 길을 가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말씀으로, 성령으로, 우리는 거룩함의 길을 가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서기 위해 성령을 힘입어 나도 힘을 다해 수고해야 한다.
3.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시107:15)
이 말씀이 이 시편에만 네 번 반복되고 있다.
반복한다는 것은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이고, 확신하고 또 확신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자하셔서 고난과 고통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위로하고 기적을 행해주신다.
환난을 주는 자에게는 환난으로 갚아주시고
환난을 받은 자에게는 안식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시고 심판의 표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셔서 지금도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세상 건축자들이 다 버린 돌일지라도 하나님은 그 돌로 머릿돌을 삼으신다.
이것은 여호와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일이요, 우리 눈에는 기이하게 보일 것이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요, 이 날에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고난으로 인하여 낙심하고 불안한 영혼일지라도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면
하나님은 나타나 도우심으로 우리가 여전히 찬송하게 해주신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영웅들을 본받고 그 결말도 확신해야 한다.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약한 것은 우리에게 붙들어야 할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살고 성령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떡으로만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살기를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
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 의를 위해, 먼저 쓰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을 풍족하게 채워주시고 더해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말씀을 지키는 자라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하나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신다.
임신하지도 못하고 출산하지도 못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자식이 많아지게 하시고 외쳐 노래하게 하신다.
장막터를 넓히게 하시고, 처소의 휘장을 널리 펴게 하시고, 말뚝을 견고하게 하신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게 하시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게 하신다.
시작은 미약하였을지도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가 살아 계시고 통치하시고 복을 주시고 반드시 상을 주신다.
그러나 순서는 먼저 주의 교훈(말씀)으로 인도하시고 후에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신다는 것이다.
어떤 환난이나 곤고도,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도, 위험이나 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이전에 행하신 일들을 오늘 우리에게도 나타내시고 주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은총을 부어주셔서 우리 손이 행한 일을 이제 견고하게 해주신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소망을 품어야 한다.
모세와 같이, 요셉과 다윗과 같이, 환난 후에 일으키시고 머리를 들게 하시고 높이시는 것을
믿고 구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시글락 시절이 있었다면, 반드시 헤브론에 오를 날이 오게 하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었다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셔서, 내 잔이 넘치게 하신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송할 날을 기대하고 소망해야 한다.
남의 인생이 아니라 나의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찬송할 날을 소망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