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2', 23장 성령세례에 대한 추가적 고찰

강대식 2019. 10. 22. 20:42

23장 성령세례에 대한 추가적 고찰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교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사람들이 쉽게 과장하거나 옆길로 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1. 성령세례를 탐구하는 올바른 자세

 

극단을 피하라

도에 지나친 주장들이 있어 왔다. 육적인 영이나 심지어 악한 영에 의해 생겨난 현상일 뿐임이 밝혀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 교리는 체험적인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이처럼 극단적이거나 왜곡된 주장이 생겨나기 특히 쉬우며, 실제로 교회사에서 그런 일이 대단히 많이 일어났다. 이 때에는 그런 극단과 잘못된 주장을 피하기 위해 정반대의 극단으로 흐르게 되는 위험이 즉시 생겨난다. 우리는 양자의 중간 어디쯤에 있을 진리를 지나쳐 다시 비성경적인 극단에 도달하게 된다. 저는 금세기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성령의 사역으로 오인되는 일이 많았던 극단들과 요란한 감정주의를 두려워한 나머지 성령을 소멸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다.

 

역사의 교훈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17세기 청교도주의에서 일어났다. 청교도주의는 하나의 학파로 시작했으나 둘로 나뉘게 되었다. 한 편에는 조지 폭스와 퀘이커 교도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존 오웬, 런던의 토마스 굿윈 같은 위대한 청교도 교사들이 있다. 성경에 비추어 불 때 저는 그 두 파가 모두 바른 방향 안에서 지나치게 멀리 나갔다고 확신한다.

조지 폭스는 분명 중요한 문제에 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었지만 너무 지나쳤다. 그는 성경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내적인 빛과 성령뿐이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러다.

그 결과 현대 퀘이커주의는 거의 완전히 비교리적이 되어서 때로는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인지조차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퀘이커주의는 막연한 자비심과 선한 마음일 뿐이다.

하지만 위대한 인물들이 대표하는 다른 학파가 퀘이커파의 지나친 주장에 대한 두려움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인정해야겠다. 그들은 항상 오로지 지식적이 되어 생명과 성령이 없는 새로운 개신교 스콜라철학을 만들어 낼 위험에 처해 있었다.

위대한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두 학파를 결합시키는 일에 탁월한 기여를 했다. 그는 위대한 청교도 지도자들의 교리적 강조점을 고수하고 주장했으나, 동시에 퀘이커 교도들과 같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일에도 깨어 있었다. 그는 어느 한쪽 극단으로 완전히 치우치지 않고 둘을 결합했으며, 저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성령의 이름으로 지나치게 요란하거나 육적으로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하지만 성령을 소멸시켜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의도하신 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는 일에도 똑같이 주의해야 한다.

 

2. 성령세례와 구분해야 하는 것들

 

성령세례와 중생의 차이

고린도전서 2장에서 육에 속한 사람과 대조시키는 신령한 자는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이 사람들이 다시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고 바울은 강조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12:13). 대단히 중요한 증거가 요한복음에 나온다.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하신 말씀이다.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0:21-22). 이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1:4-5)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과 다르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숨을 내쉴 때 중생하여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다시 말씀하신다.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그 일은 열흘 후에 일어났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이 체험 사이에 언제나 시간적 간격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님을 명확히 하고 싶다. 두 가지 일은 종종 함께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이 둘을 구별하도록 하자.

 

성령세례와 성화의 차이

제가 이해하기로는 지난 70년의 세월 동안 우리가 끊임없이 성화와 지금 다루고 있는 성령세례의 체험을 혼동했다는 사실보다 더 큰 해를 끼친 일도 없었다. 한 번의 체험으로 성화를 받게 된다는 말 때문에 수없이 많은 오해가 생겨났다. 성화는 체험이 아니다. 반면에 성령세례는 본질적으로 체험이다.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체험은 성화를 도울 뿐 성화의 필수적 부분은 아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

이 둘은 같은 것이 아니며 같은 것으로 간주해도 안 된다. 5:18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계속해서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 있으라는 의미이다. 성령세례는 영속적인 상태의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특별하고 독특한 것이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부여된 어떤 특별한 과업을 위해 일어난다.

 

3. 성령세례의 올바른 의미

 

1)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타나심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저는 이것이 핵심 구절이라 생각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영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것은 확신 이상의 어떤 것이다. 사람들이 신자가 되고, 중생하고, 구원희 확신을 가지고서도 그리스도가 이같이 영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2) 성령세례의 예를 보여주는 인물들

존 플라벨

그는 다소 조용한 사람으로 작은 영역에서 대단히 놀라운 방식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혼자 여행하였고 그의 마음은 자기성찰과 기도로 가득차 있었다.

하루 종일 여행하면서 그의 생각은 에스겔의 환상 속에 나오는 물과 같이 커지고 커져서 마침내 넘치는 홍수가 되었다. 그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하늘의 기쁨이 너무나 매혹적으로 다가왔고, 그 안에 있는 권리가 너무 큰 확신으로 다가 왔기에 그는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관심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관에 도착한 후에도 그 영향은 계속 되었으며 잠도 오지 않았고, 주님의 기쁨이 계속 흘러넘쳐 그는 마치 딴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는 그 날을 천국의 날들 중 하나라고 불렀으며, 그가 이전에 읽었던 어떤 책들이나 즐겨 들었던 강연들보다도 그 날로 인해 천국의 삶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그는 아마도 이 세상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신앙감정론>에서 성령의 사역과 종종 성령의 사역을 흉내내는 육욕을 구분하는 법을 가르쳤다.

1737년 숲으로 말을 타고 나갔을 때, 걸으면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하기 위해 한적한 곳에서 말에서 내렸다. 그대 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성자의 영광이라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고, 그의 놀랍고 위대하고 충만하고 순결하고 달콤한 은혜와 사랑, 온유하고 친절한 겸손을 보았다. 그처럼 온화하고 감미롭게 나타난 은혜는 또한 하늘 위에 광대하게 나타났으며, 그리스도의 인격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나타나 그 탁월함이 모든 생각과 개념을 가려 버렸다.

 

무디

그들은 내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도록 마음을 쏟아 놓았으며, 그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큰 갈망이 내 영혼으로 들어왔다. 나는 이전 어느 대보다도 크게 울기 시작했고 갈망은 점점 더 커졌다. 나는 정말로 섬김을 위한 이 능력을 갖지 못한다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나님께 나를 그의 성령으로 채워달라고 계속해서 부르짖었다. 어느날 뉴욕시에서였다. 말로 하기에는 정말 신성한 체험이다. 나로서는 단지 하나님이 나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그분의 사랑을 너무 강렬하게 체험해서 하나님의 손을 멈추어 달라고 간구해야 했다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다시 나가서 설교했다. 설교는 전혀 다르지 않았고 새로운 진리를 제시하지도 않았지만 수백 명의 사람이 회심했다. 나는 그 복된 체험을 하기 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위대한 침례교 설교자인 크리스마스 에번스에게도 웨슬리에게도, 휫필드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성경에는 탁월한 사람에게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경험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순절 날 베드로가 말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2:38-39) 이 말은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해야 할 체험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체험이 무엇일까요? 이것을 성령충만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이 한 번의 위대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성령충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충만에 대한 최초의 경험이거나, 또는 충만에 대한 예외적으로 탁월한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것을 부어진다는 말로 표현했고 성경도 그 용어를 사용했다. 피니의 경우는 계속되는 물결로 쏟아졌다고 말한다. 그것은 뭔가 비범한 경험으로서, 이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마치 천국으로 들려 올라가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후에도 여러 번 충만이 무엇인지 경험했지만, 이 체험은 뭔가 독특하고 특별한 것이었다. 그것은 신적인 일들의 실상이 전무후무한 방법으로 명백하게 나타나는 사건이었고, 그들이 그 일을 돌아볼 때마다 그 사건은 큰 영광 가운데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극단을 두려워한 나머지 결코 이런 체험을 추구하지 않으며, 이런 일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되고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3) 성령 세례와 감정- 참된 성령세례는 반드시 심오한 감정이 동반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부어 주실 때, 여러분은 그 사랑을 느끼고, 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나에게 사랑을 부어 주고 계셨으며 나는 그 사랑을 압니다. 내 마음은 사랑으로 하나님께 향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라고 기록한 것처럼 감정이 개입된다. 우리는 감정주의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우리의 감정을 억눌러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의 사람들은 죄의식이 무엇인지,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자신들의 죄성에 대해 단 한 번도 울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경험을 하지 않고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저는 단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아는지, 그리고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마음이 그리스도께 향하는 것을 느끼고 그로 인해 놀란 적이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일 뿐이다.

 

4) 성령 세례와 거짓 체험의 구분

가짜를 조심하라. 이 일을 추구하는 당신에게 사탄이 끼어들어와 진실이 아닌 체험을 전해 주려 하지 않는지 주의 하라.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최종적 시금석이 있다. 체험을 추구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추구하라. 그분을 알기를, 그분의 임재를 깨닫기를, 그분을 사랑하기를 추구하라. 오로지 주님 안에서, 주님을 위해 살기 위하여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기를 추구하라. 그리고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라.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신다면 여러분은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그저 경험만을 추구하고 있다면, 스릴과 흥분만을 찾고 있다면, 여러분은 거짓 경험이 들어올 문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언제나 겸손하게 하고 낮추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우리 자신을 끝까지 파헤쳐 죄를 드러낸다. 우리는 현재의 모습 그대로 성령의 권능과 위대한 체험들을 갖기 원하지만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성령께 완전히 굴복해야 하며, 성령은 우리를 우선 전시실로 데려가실 것이다. 우리가 완전히 절망적이라고 느낄 때에야 여기에 기록된 놀라운 병거를 제공하셔서 천국으로 데려가시고, 약속하신 대로 성자의 실재하심,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라는 영광스러운 체험을 하게 하신다. 이 체험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놀라움과 사랑과 찬양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