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2', 25장 성령의 은사

강대식 2019. 10. 22. 20:44

25장 성령의 은사

 

이 주제에 대한 고전적인 본문은 고린도전서 12장이다. 여기에는 성령을 받았을 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특별한 은사들이 나와 있다.

 

1.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첫째, 영적 은사들은 자연적 은사들과 구분해야 한다. 영적 은사는 성령이 우리에게 직접 주시는 것이다. 자연적 은사가 강화된 것도 아니다. 새롭고 다른 것이다. 유명한 헬라어 사전,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구별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비범한 능력, 그들이 영혼 속에서 성령에 의해 작용하는 신적 은혜의 능력으로부터 받는다.”

 

둘째, 성령이 이 은사들을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주신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12:11). 성령이 뜻대로 주신다. 결정은 우리가 아니라 성령이 하신다. 누구에게 언제 주시느냐까지도 성령이 결정하신다. 주시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신다. 은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다.(7)

 

셋째, 그리스도인은 각자 무언가 은사를 가지고 있다.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참된 지체, 즉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이든 특별한 영적 은사를 가지고 있다.

 

넷째, 이 은사의 가치가 다르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14).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이 말에 주의하라)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28). 바울은 의도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맨 뒤에 두고 있다.

 

다섯째, 모든 은사는 언제나 사랑 안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13장의 위대한 메시지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13:1). 절대로 그가 가지고 있는 은사만을 가지고 사람의 영성을 평가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영성과 은사가 언제나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놀라운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특정한 면들에서는 실패할 수 있다. 결국에는 은사를 잃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고레스와 같은 사람들을 사용하셨던 것처럼 그 은사들을 사용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영혼의 상태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여섯째, 특정한 은사를 소유하거나 나타내 보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성령세례를 받았거나 성령의 충만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보편적 은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어느 은사를 가지게 될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

 

2. 은사의 지속성

 

이 모든 은사들이 초대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아니면 오늘날의 교회에도 마찬가지로 해당하는 것일까? 일시적인 것인가? 지속적인 것인가? 저는 이 세상에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최종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고 겸손하게 말씀드리고 싶다.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은 반복되지 않는다.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터라는 말은 분명 단 한 번, 그리고 영원히 놓인 무언가를 시사한다. 터는 단 한 번만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다. 정의상 터는 계속해서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 끝이다.

 

교회의 시작에 있어서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우리에게는 신약성경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증거 및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터가 있는 것이며 더 이상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사도, 선지자직의 단회성에 대한 히브리서의 증거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3-4). 이 특별한 은사들과 나타남들은 그들이 사도적 권위를 입증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으며 지금처럼 사도들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는 때에는 그런 은사들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다.

 

고전13:8,“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런 것들이 끝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고 권위자들은 말한다. 저는 그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믿음과 소망조차도 눈에 보이게 되는 날의 궁극적 영광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도와 선지자들의 은사들은 사도시대 이후에 중단되었다.

실제로 사라졌다. 명백하다. 성령의 특권이다.

 

사도들의 은사가 중단 되었다는 말이 기적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교회 역사 내내 기적들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원하시면 언제 어디서나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하고자 하실 때는 비범한 방법으로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다.

 

지속성에 따른 은사의 분류

어떤 은사들은 일시적이었지만 다른 은사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서 오늘날에도 분명히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다.

 

일시적 은사들

사도직의 은사이다. 사도들은 반복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단 한 번 존재했던 사람들이다.

예언의 은사도 마찬가지이다. 두 가지를 의미한다. 밖으로 말하는 것, 즉 하나님께 받은 진리를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또 장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이다. 신약 선지자들이 두 측면에서 은사를 발휘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신약 정경이 생겨나기 전에 필요한 것이었다. 그후 추가적인 계시는 없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정경이 마무리 된 뒤에 몇 가지 진리를 계시받았다고 주장한다.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 승천 교리 등이다. 주교들은 사도들의 계승자이며 오늘날에도 영감이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치유의 은사도 같은 범주에 넣고 싶다. 이 점에서도 제 말을 오해하지 말라. 성령으로부터 은사를 받아 그 은사로 사람들을 직접 치료한다는 의미이다. 기도의 결과 치유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적의 은사에도 같이 적용된다.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적의 은사는 사도들과 더불어 끝났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영 분별의 은사 및 방언의 은사도 마찬가지이다. 방언의 은사는 종종 문제와 혼란을 야기시킨다. 사도행전은 다른 민족의 언어들을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는 언어가 아니라 황홀경 중에 나오는 발화로서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내는 소리나 단어를 말하고 있다. 방언은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12:30)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목록의 가장 마지막에 놓는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모든 일을 적당하고 질서대로해야 한다. 무질서와 혼란이 있다면 그것은 교린도 교회에게 설명한 방언의 은사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지속적인 은사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가르치는 능력, 섬기고 돕는 은사, 다스리고 관리하는 은사, 집사들과 장로들 등이 가진 능력, 전도의 은사, 목회의 은사, 권면의 은사와 9절에 언급된 믿음의 은사 등이다. 믿음의 은사는 조지 뮐러나 허드슨 테일러 같은 사람들에 주어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돈과 물질의 필요의 공급을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한 채 사역했다.

 

3. 성령 모독죄

 

이 주제는 마12:31-32, 3: 및 눅11: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러분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 혹은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저지르고 있지 않나 고민하고 있다면 답은 이것이다. 그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죄를 짓지 않고 있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라. 6:4-610:26을 보라. 사도 요한이 요일 5장에서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그렇게 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는 것, 심지어는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의 권능을 바알세불이나 마귀의 짓으로 돌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믿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조롱한다. 멸시의 대상으로 대한다. 그리스도께 등을 돌리고 떠나 버린다.

 

그러니 여러분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지었다고 염려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싶어하며 여러분이 죄를 지어 그 관계가 끊어졌다고 느낀다면, 이로 인해 탄식하고 느낀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죄와는 천리 만리 떨어져 있다.

 

그런 죄를 지은 사람들은 행복해한다. 그들은 그 안에서 혼자 흡족해한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다.

여러분은 정반대이다. 여러분은 근심하고 괴로워하며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려 할 것이다. 낙심시키고 기쁨을 빼앗아 가고자 애쓰는 마귀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이렇게 말하라.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싶어하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것 자체가 내가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렇게 하면 분명 해방을 얻을 것이다. 여러분은 평강을 찾고 주님의 기쁨, 구원의 기쁨이 다시 회복될 것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 돌이켜 성령의 은혜로우신 사역을 감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