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 5부 종교적 정서, 3장 종교적 정서의 시금석이 될 수 없는 표지들 7-12

강대식 2019. 10. 22. 20:52

8 위로와 기쁨이 양심의 각성과 죄에 대한 깨달음 뒤에 오는 것이 종교적 감정의 성격을 확정할 수 있는 기준은 전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청교도들(윌리엄 퍼킨스, 토마스 셰퍼드, 토머스 후커)의 회심론에 의하면, 회심은 먼저 각성, 공포, 그리고 끔직한 불안 후에 전적 죄성과 무력함에 대한 인식 속에서 율법적 겸비가 따르고 그 다음에 이러저러한 빛과 위로가 오는 순서를 따른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반론은 인간의 고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러한 순서대로 회심을 체험하는 것이 꼭 그 체험이 가짜라는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그러한 순서대로 체험한 정서가 참된 회심의 표지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구원이 감지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죄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악에 대한 어떤 상당한 감각을 주셔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터무니 없는 주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구원을 얻는 사람들은 두 개의 극도로 다른 상태들을 거친다. 첫째는 정죄의 상태요 다음은 칭의와 축복의 상태다 --- 그러므로 구원받는 인간들이 이 두 상태 속에 느껴지는 방식으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합리적이며 하나님의 지혜에도 부합되는 일이다.

 

에드워즈는 이 점을 거듭거듭 강조한다. 회심되기 원하는 자들은 먼저 비통한 재앙과 무서운 비참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 후에 느껴지는 방식으로구원과 행복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들은 먼저 그들의 절대적 극도의 필요를 느낀 후 그리스도의 충족성과 그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어떤 의미에서 칼빈의 죽임살림에 해당하는 이 두 단계의 체험을 회심의 거의 필수적 요소로 본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상적구원 방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광야의 체험을 거치게 한 후 위로하는 것이었다. 즉 먼저 인간의 무력과 비참을 깨닫게 한 후 죄인들의 심령에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구원 순서라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일종의 낮아짐높아짐의 이중적 단계를 거치는 것이 성경적 구원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는 그러한 예들이 얼마든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기 전에 그들은 그것을 위한 준비의 단계를 거쳤다.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보고 중한 멍에로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이다. 홍해에서 구원받기 전에도 그들은 큰 고민에 빠졌었다. 뒤에는 추적해 오는 애굽 군대, 앞에는 홍해로 인해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없는 무력함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가나안 안식에 들어가 젖과 꿀을 즐기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해서 크고도 무서운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을 낮추시고 그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게 하셨다. 결국 그들에게 선을 행하셨다(8:2,16).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요셉도 그러했다. 그는 자기 형들을 먼저 큰 당황과 고민 속에 빠뜨렸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반성하고 큰 죄를 지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을 전적으로 그의 처분에 맡기게 한 후 그들에게 자신이 동생 요셉임을 드러낸다.

 

신약성경에서도 12년간 혈루병 앓던 여인이 치료받기 전에 어떠했는가? 자신의 모든 것을 지상의 의사들로부터 치료받는 데 다 써 버렸다. 그런 다음, 그녀는 아무 돈도 값도 없이 위대한 의원이신 예수께 왔다. 그녀의 요구를 완전히 거부하고 그녀를 처참하게 낮추셨다. 스스로 개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하신 다음 그녀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놀라운 구조를 받기 전에 감당키 어려운 정도의 고난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되었다. 예수의 제자들도 폭풍이 와서 배가 가라앉으려 했을 때 그들은 주여 우리를 건지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고 소리쳤다.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통상적 자기 현현 방법이 처음에는 무섭게그리고 다음에는 자비롭게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대개 먼저 자신을 무서운 방식으로 드러내신 후 위로를 주신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기 전에도 먼저 커다란 어두움의 공포가 있었다. 시내 산의 모세에게도 먼저 하나님의 두려운 위엄의 공포가 있었다. 엘리야에게는 폭풍, 지진, 불 다음에 고요하고 작고 달콤한 음성이 들려왔다. 다니엘은 먼저 그를 두렵게 한 번개 같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에게 왕은 먼저 정죄를 선언하고 그 식솔들을 모두 노예로 처분하라고 한 후 그 빚을 탕감했다. 돌아온 탕자는 극단적 상황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했다. 아담과 하와는 먼저 하나님의 위엄에 질린 후 여인의 씨에 대한 약속으로 위로를 받았다.

 

다른 한편, 기쁨과 위로가 커다란 공포와 지옥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뒤에 따라온다고 해서 그 기쁨과 위로가 올바른 것이라는 증거도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비록 양심이 죄를 깨닫는단계가 회심의 전 경험으로 필요하며, 그러한 죄에 대한 양심적 확신이 종종 공포를 야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포가 죄에 대한 깨달음의 본질은 아니다. 공포는 종종 다른 요인들에 기인할 수 있다. 성령의 영향에 의한 죄의 확신의 본질은 다음 몇 가지에 대한 확신이다. , “마음과 삶의 죄악됨”,“가공할 엄위와 무한한 거룩의 하나님을 대항해 지은 죄의 무서움”, “죄에 대한 증오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벌하시는 것은 아주 정의롭다는 확신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유사한 감정과 체험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마음과 삶의 죄악됨을 참으로 확신시켜 주는 밝은 양심은 거의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경우들이 있다고 했다. 마귀도 사람을 공포에 빠뜨릴 수는 있으므로 공포 후에 어떤 긍정적인 감정이 온다고 해서 그것이 다 참된 은혜는 아니다. 예드워즈는 은혜의 모조품이 얼마나 정교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열거했다. 예를 들면, 마귀는 은혜의 준비 단계마저도 모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심지어, 죄에 대한 커다란 확신과 그로 인해 겸비해진 마음도 모양만 모방할 수 있다. 죄에 대한 깨달음 뒤에 위로가 따르는 그 순서도 흉내낼 수 있다. “회심에 있어 성령의 역사의 순서라고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그러한 순서와 방법을 정확하고 분명히 밟은자들, 죄에 대한 깨달음 후 감정을 체험하는 식의 규칙대로 회심한 것처럼 보이고 자신들의 그러한 체험을 멋있게 진술한자들이 결국은 참 회심자가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일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에드워즈는 당시의 청교도 전통 속에서는 아주 급진적인 주장을 제시한다. 그는 그 죄의 각성과 위로의 분명한체험이 없다고 해서 회심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다소 기존의 자기 주장과 상반되는 듯한 주장을 내어 놓는다.

단계와 방법에 관한 이 명료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어떤 사람이 회심했다는 분명한 표지는 아니듯이 그것이 없다고 해서 어떤 사람이 회심되지 않았다는 증거도 전혀 아니다”. 에드워즈가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즈는 깨달음의 필요성에 관한 자신의 강조를 고수하고 있다. “자기의 죄의 비참, 그리고 자기 자신의 공허함과 무력함 또한 자신이 영원히 정죄되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지 못한 죄인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영접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확실한 깨달음이 어떤 식으로든 자기 영혼에 일어난 역사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한 성경적 원리로 증명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에드워즈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의 것이다. , 참된 회심자라 할지라도 그가 회심에 이르는 은혜를 받는 과정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행위에 포함된, 혹은 신앙의 행위에 전제된 그 요소들이 때로는 희미하게 나타나 마치 어떤 것들이 생략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청교도들의 회심의 정형화, 획일화하는 것에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는 것은 그 소리를 들어 혹은 그 영향을 보고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는 것처럼 회심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도 신비하고 다양해서 인간이 측량하기 어렵다는 일반적 진리를 에드워즈가 여기서 다시금 확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누군가가 정말 회심의 은혜를 체험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최종적 시금석은 열매즉 영혼에 일어난 결과의 성격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성경에서 열매의 성격에 의해 자신들을 시험해 보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생산하는 성령의 방법에 의해 그렇게 해보라는 권고는 아무 데도 없다. 결국, 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그의 삶과 인격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참된 중생의 체험 없이 단지 도덕적 수양과 훈련에 의해 남들 보기에 훌륭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9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이 참 회심의 증거는 아니다. 한국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점이다. “종교적인 문제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예배와 외적 의무들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참 신앙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는 확실한 표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참된 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를 듣는 등의 종교적 활동들을 즐거워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월삭, 안식일, 대회 등의 절기가 아주 많았다. 손을 펴고 많이 기도했다(1:2-15). 구원 얻는 신앙이 없는 자들도 종교적 의무와 규례를 각근히 준수할 수 있다. 돌 밭같은 마음을 가진 청중들도 기쁨으로 말씀을 들었다. 바리새인들도 그러했다. 그들은 길게 기도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다. 단지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각종 교회 집회나 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하는 것이 참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는 못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도 아니다.

 

10 입에 할렐루야”, “아멘을 달고 다니는 것이 참 은혜의 증거는 아니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소위 은혜 충만한" 사람들, 특히 일부 은사주의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다. 그것은 입으로 하나님을 많이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는 종교적 정서의 본질에 대해 어떤 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참 회심의 표지가 될 수 없으며 또 거짓 은혜의 증거도 아니다. 에드워즈는 그러한 것이 꼭 그가 남들보다 더 은혜가 충만하다거나 참된 종교적 정서를 소유했다는 증거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죽지 않은 교만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사울을 그러한 예로 제시한다. 사울은 굴복되지 않은 교만과 다윗에 대한 적대감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다윗의 전례 없는 자비를 높이면서 외쳤다.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삼상 26:21).

 

11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도 그 정서가 참된 것이거나 거짓된 것이라는 표지가 못된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이것은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심장한 경고가 된다. 특히 복음주의적 신자들 사이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너무 쉽게 말하는 경우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신자가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것은 책망 받을 일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합당치 않은 일이며 또 크게 비난받을 만한 일(고후13:5)”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본인들 스스로 표명하는 자신감이 구원의 확실성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것이 얼마나 크고 강한가의 여부와 상관 없이 그들의 자신감만 보고서는 어떤 확실한 단정도 내릴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성도이며 가장 휼륭한 성도임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참 성도들이 가끔 자신의 구원에 대해 의심을 한다. 에드워즈는 위선적 확신의 몇 가지 특징을 제시한다. 첫째, 위선자들은 신중한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참 은혜 받은 사람들은 각성과 신중함이 점점 더해 간다. 둘째, 위선자들은 자기의 영적 소경 상태, 자기 마음의 거짓됨, 자기의 낮은 이해력에 대한 인식이 없다. 셋째, 마귀는 위선자들의 소망은 건드리지 않는다. 넷째, 거짓 소망을 가진 자들은 자기 부패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믿음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영적 빛- 에드워즈는 여기서 사람이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복음의 빛이 비취어야 믿을 수 있다고 본다. 억지로 믿거나 믿기로 결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 없이 자기 의지만으로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에 유행하는 일반적 복음전도 방식에 중대한 도전이 되는 주장이다. 현대에 유행하는 복음 전도자들은 청중들이 자기 의지를 발동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 영적 조명에 대한 언급은 없이 단지 누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복음을 믿기만 하면, 혹은 받아들이기로 결단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현대 복음 전도의 핵심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아무 영적 빛이나 조명 없이 사람들에게 밀어붙이거나 촉구하는것은 흑암의 왕자의 기만을 크게 도와 주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참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신령한 조명이 꼭 필요하며 그것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고 확신했다. “영적 빛이 없는 믿음은 빛의 자녀들의 믿음이 아니라 어두움의 자녀들의 주제넘은 상상이다.” 소위 무조건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싸구려 믿음주의에 대한 정면 공격인 것이

 

. 에드워즈가 우리 시대에 살았더라면 현대의 기독교가 그처럼 피상적이고 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무력하며 불신자들과 큰 차이가 없는 삶을 사는 이유는 신령한 조명 없이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자처하는 데 있다고 진단했을지 모른다.

 

에드워즈는, 우리가 조명 받은 만큼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어떤 영적 빛이 없이는 믿음을 구사할 수없을 뿐 아니라 영적 빛을 가진 꼭 그 정도만 믿음을 구사할 수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믿음은 신령한 지식과 거의 동의어였다. 알지 못하고는 믿을 수 없었고 빛을 받지 못하고는 알 수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만 그를 신뢰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신실하심을 본 것 이상으로 한 치도 더 그분에 대한 믿음을 구사할 수 없다.”

 

체험과 은혜와 믿음의 상관관계- 에드워즈는 생생한 은혜의 역사혹은 감지되는 기독교적 체험없이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은혜의 체험이란 바로 신령한 빛을 비췸 받아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보게 되는 것과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영적 조명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생기기 전에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 내지 신뢰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체험, 즉 영적 조명 없이 믿음으로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믿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런 것이 믿음이라면 바리새인들도 굉장한 믿음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사죄 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그리스도는 가르쳤다. 성경에 의하면 믿음은 그것에 의해 구원으로 인도되는 것이지 자기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가 믿음을 가졌다고 믿는 것이거나 자기가 믿는다고 믿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요즘처럼 전도를 통해 그 자리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도전이 되는 주장이다.

 

에드워즈는 체험 외에는 은혜의 다른 증거가 없다고 보았다. “대단한 체험을 하는 것은, 만일 그 체험들이 참된 것이고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대단한 은혜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참 체험이 있으면 반드시 은혜가 따른다. “참 체험들치고 은혜의 역사가 없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은혜와 성결의 정도는 참 체험의 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 체험을 파먹고 사는 경우들이 있다. 그것은 자기 체험을 의로 삼고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않는 경우다. , 그들은 자기에게로 눈을 돌려 자기 성취와 자기의 높은 체험, 그리고 자기들이 만났던 위대한 일들만 바라보면서 즐거워한다. 그것들이 그들의 눈에는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도 자기들의 그러한 체험들에 대해 자기들만큼이나 대단한 평가를 하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태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불신자의 엄청난 부도덕보다 더 가증한 것이라고 비난한다. 과거의 어떤 체험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낙관하는 이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지적일 것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체험을 먹고 사는 아주 심한 경우다. 그러한 자들은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 상에 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옛날에 받은 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정욕과 부패가 영혼을 지배하고 있어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으면 은혜로운 자신감과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어둠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의지해야지 체험을 의지하면 안 된다고 타이르고, 믿음으로 살아야지 보는 것으로 행하면 안 된다는 성구를 인용하면서 구원을 확신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혜롭고 은혜로운 질서에 반하는 일이다. 성도의 상황이 불투명해 보일 때도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과 영적 조명 없이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령한 빛이 비취는 체험 없이 자신의 구원을 직관하는 것과는 상관 없는 일이다.

 

12 외적 모습과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이 경건한 자들이 듣기에 아주 감동적이고 유쾌하여 그들의 호의를 얻고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로 단정할 수 없다. 위선자들도 많은 종류의 종교적 정서를 소유할 수 있다. 그들도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아주 비슷한 일종의 하나님에 대한 애정을 가질 수 있으며 형제들에 대한 일종의 사랑을 가질 수 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사역에 대한 경탄, 죄에 대한 슬픔, 순종, 자기 비하, 감사, 기쁨, 종교적 갈망,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열심 등의 외양을 다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이 커다란 각성과 양심의 가책 후에 올 수 있다. 모조품 사랑과 기쁨이 참된 회심자들이 경험한 것과 같은 순서로 올 수도 있다. 실로, “성도들 속에 있는 모든 구원 얻게 하는 은혜는 그 모조품들이 위선자들 속에 존재한다. 영적이고 아주 현명한 사람들조차도 성령의 참된 구원의 역사로 쉽게 착각할 수 있는 유사품들이 위선자들에게 있다.”

 

우리는 에드워즈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데 얼마나 엄격한지를 본다. 그리고 참 회심과 거짓 회심, 참 구원의 은혜와 거짓 은혜가 외양에 있어서 얼마나 비슷할 수 있는지를 본다. 염소들도 양들과 얼마나 비슷할 수 있는지를 본다. 한편, 한국 교회는 이런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구분에 얼마나 무관심하며 무능력한지를 느낀다. 얼마나 쉽게 번쩍이는 것은 모두 금이라 간주하는가? 어쩌면 한국 교회는 그러한 구분을 하고 싶지 않은지 모른다. 지금 한 사람이라도 교인으로 더 받아들여 교인 수를 늘리고 싶은 판에 언제 진짜와 거짓을 구분한다는 것인가? 이러한 현상은 에드워즈 식으로 옥석을 가리다가는 교회에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반발심 때문일 수도 있다.